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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04화 (204/575)

[204] 디 임팩트 9권 4화

산 정상에서 벌어졌던 무허와 태선군 간의 싸움을 본 적 없는 제자들은 청선을 살려서 내려온 사부의 말을 토대로 그저 그 당시 일을 유추해 낼 뿐이었다.

태선군은 복면인이 청선을 구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청선 역시 자세한 일은 함구했다. 아끼던 사제, 노일문이 무허의 손에 죽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상해로 돌아온 청선은 죽음과 같은 침묵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그는 무허가 아니다.”

“그럼 누구를?”

료쿄는 몸을 돌려 자신이 나왔던 단층 건물을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설마 대사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성하가 살짝 놀라며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죄가 있다. 작년에 부상당해 양처럼 온순해진 무허를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대사형은 그에게 살길을 내주었다. 그로 인해 오사형이 죽었다 볼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요?”

“사부님은 대사형을 천고의 기재라며 우리들과 종종 비교하셨다. 그렇지만 그는 너보다도 약한 무공 실력을 갖고 있는 데다 술을 좋아하고 산에서 유유자적하는 것만 즐길 뿐이지. 대사형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무예 수준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그 긴 세월을 허송세월로 보냈어. 그러니 오사형이 무허에게 죽을 때 제대로 된 힘을 쏟지 못했다. 아마도 술에 취해 있었겠지?”

료쿄는 말을 마친 후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날로 석등의 모서리를 내리쳤다. 쩍 소리와 함께 한 뼘이 넘는 모서리의 두꺼운 돌이 땅으로 반듯하게 잘려서 떨어져 나갔다.

‘구사저의 공력이 이리도 심후했나?’

깜짝 놀란 주성하가 구사저를 다시 봤고, 숨어서 지켜보던 도현도 속으로 감탄했다.

‘저 여자도 깨달음을 얻어 벽을 깼군. 새로운 단전이 열려 내공이 깊어지지 않았다면, 손날로 저 정도 파괴력은 내기 힘들었을 거야. 태선군의 제자들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되겠어.’

료쿄의 경지를 가늠해 보며 도현은 경각심을 가졌다. 그런 그의 귀로 주성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청선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말은 자칫하면 사문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무서운 발언이었기에 주성하는 자연히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한껏 낮출 수밖에 없었다.

“구사저, 사형제들이 대사형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는 맞지만, 사부님은 그렇지 않소. 사부가 살아 계신 한, 그런 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하지 마시오. 그게 빌미가 되어 우리가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나 또한 안다. 그래서 저 안에 청선을 그냥 두고 나온 거야!”

“제발 목소리 좀 낮추십시오.”

우는소리로 말한 주성하는 노일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듣고 일본에서 서둘러 돌아온 료쿄의 마음을 다독이려 애썼다.

“사부님은 어디 계시지?”

그녀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노일문의 시신이 있는 단층 건물 안에서 슬피 운 뒤 나온 상태였다. 그래서 아직 태선군에게 인사를 올리지 못했다.

“침소에 계시겠지요.”

“여자와?”

주성하가 입을 굳게 다물자 그녀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모서리가 부서진 석등을 번개처럼 베어 버렸다.

석등 안에 있는 전기등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꺼진 뒤, 잠시 후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는 석등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그녀가 가진 칼은 쇠도 잘라 버린다는 전설의 명검처럼 뛰어난 보검이었다. 그 검에 그녀의 검술이 더해지자 단단한 돌도 두부처럼 베여 버린 것이다.

“제자가 죽었고, 장례식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사부님은!”

료쿄의 눈에서 차가운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녀는 칼을 거두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주성하가 그녀의 팔소매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료쿄는 교묘하게 팔을 움직이며 주성하의 손길을 피했다.

“사부님께 인사드리러 간다.”

“내일 날이 밝거든 하십시오. 사부님은 이미 주무실 겁니다.”

주성하가 신법을 발휘해 그녀의 앞을 가로막자 료쿄가 소리쳤다.

“비켜!”

“지금 가서 사부의 심기라도 건드리겠다는 말씀이오! 그래서 남는 게 뭐요, 대체!”

주성하가 사납게 호통을 쳤고, 료쿄는 흠칫 놀랐다.

“함께 그것을 찾기로 한, 나와의 약속은 헌신처럼 버릴 거요?”

“…….”

“냉정해지시오, 구사저. 지금 그 상태로 사부님께 가면 혹독한 결과가 따를 거요.”

주성하의 걱정 가득한 시선에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료쿄의 눈빛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잘 생각하셨소. 그게 구사저다운 거요. 지금은 때가 아니니, 힘을 합해 원래 계획대로 나갑시다.”

가까이 다가온 주성하가 슬며시 료쿄의 손을 잡으려다 뺨을 얻어맞고 뒹굴었다.

“섭 사형은?”

“쳇, 따라오시오.”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낸 주성하가 료쿄와 정원에 난 길로 사라지자 숨죽이며 지켜보던 도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선문 내부가 혼탁한 느낌이야.’

두 제자들 간의 대화를 엿들은 도현은 제자들마다 태선군에 대한 충성심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저들의 말을 들어 보면 태선군이 여자와 동침을 하고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이 집은 태선군을 위해 지어진 곳일 가능성이 높겠어.’

제자의 집에서 여자를 불러와 잠을 잘 문파의 문주는 드물 것이다. 적어도 그 자신의 거처라는 생각을 했을 때나 아무렇지도 않게 벌일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제야 홍콩에서 주로 활약하는 사업가인 섭상이 상해에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고풍스러운 집을 지어 놨다는 게 도현은 충분히 납득이 됐다.

‘이 집은 옥룡산에서 내려온 태선군을 위한 집이겠지?’

료쿄와 주성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도현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단층의 건물이 보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은밀히 움직여 건물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천장이 높은 건물은 쥐죽은 듯 고요했고 향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바닥에 신발 자국이 남을까 봐 물구나무 선 상태로 나무 바닥을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간 도현은 천장을 떠받치는 거대한 원형 나무 기둥에 몸을 숨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뺐다.

안쪽에는 노일문의 위패를 놓은 높은 단이 있었고, 흰 연기를 어두운 실내에 퍼트리는 청동 향로도 두 개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봉두난발의 청선이 두 눈을 감은 채 고승처럼 앉아 있었다.

도현은 청선의 뒷모습만 봤는데도 괜스레 코가 시큰해졌다. 청선의 뒷모습에서 형용할 수 없는 진한 슬픔과 아픔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청선은 노일문을 매우 아낀 게 분명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현은 청선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었다. 검선문의 사형제들처럼 청선에 대한 편견도 없었고, 사물을 보이는 대로 직시할 수 있는 올바른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의 성격이기도 했지만, 무예가 점점 발달하면서 깨달음이 그가 가진 장점을 더욱 극대화해 주었다.

“누구신가?”

청선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려왔다. 며칠을 단식하며 좌선을 하고 있던 청선은 그 어느 때보다 오감이 발달해 있어서 도현이 움직이며 만든 공기의 미묘한 파동을 운 좋게 감지한 것이다.

도현은 숨죽이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청선의 기감에 놀라며 어떻게 할까 갈등을 하다가 물구나무서기를 포기하고 두 다리로 섰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청선에게 담담히 인사를 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잠시 말이 없던 청선이 뒤를 돌아봤다.

마음고생이 심한지, 며칠 전보다 그의 얼굴은 많이 늙어 보였다.

“저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도현이 복면을 벗자 청선이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넨!”

도현을 알아본 청선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아버지 복수를 포기할 수 없다며 당차게 말하고 등선궁을 내려가던 도현의 모습이 청선의 눈앞에 또렷이 그려졌다.

“음.”

청선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검붉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냈다. 옷에 묻어 나무 바닥까지 떨어지는 청선의 피를 보며 도현은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물러나게, 난 괜찮으니까.”

청선은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 세우며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이 사람의 부친 역시 결국은 나로 인해 죽은 거야. 사부님만을 탓할 순 없지.’

노일문의 죽음으로 심신이 허약해져 있던 그는 도현을 보자 과거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이 빌미가 되어 사부의 손에 죽은 도현의 부친이 떠올랐다. 그것은 노일문의 죽음과 더해져 말할 수 없는 심적 타격을 순간적으로 주었다.

청선은 술을 좋아했지만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며 거의 흔들리지 않고 도인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노일문의 죽음으로 쇠약해진 마음에 도현이 가지고 온 과거의 일까지 더해지자 그만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거대한 망치로 여러 번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청선은 폐가 쪼그라드는 고통 속에 피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도현은 걱정이 되어 거듭 물었고, 등선궁에서처럼 도인의 복장을 한 청선은 피 묻은 소매를 가볍게 옆으로 휘두르며 괜찮다는 뜻을 표시했다.

“대담하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또 찾아왔는가? 그때 내가 분명히 경고를 했을 텐데, 어찌 이리 사리 구분을 못해!”

청선이 준엄한 눈빛으로 꾸짖었다.

“내가 또 자네의 목숨을 구해 줄줄 알고 왔다면 크게 오산한 거야.”

“감히 그럴 마음은 품지도 않았습니다.”

“하면? 무슨 이유로 이렇게 빨리 내 앞에 나타난 건가?”

청선이 기억하는 도현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의 사내였다. 그렇기에 언제고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재회할 줄은 몰랐다.

검선문의 무서움을 알았다면 적어도 실력은 쌓고서 올 줄 알았는데, 불과 1년도 안 돼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으니 기가 막히면서도 화가 났다.

피를 토하며 창백하게 변한 청선의 얼굴엔 주제도 모르고 나타난 도현을 책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노일문의 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 걱정해 주는구나.’

도현은 피곤함이 가득해 보이는 청선을 보며 차분히 대답했다.

“선배님이 우려하시는 일은 오늘 밤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이지?”

“저는 단지 선배님의 스승이 되시는 검선문의 문주가 등선궁에 보이지 않기에 그 뒤를 추적한 것뿐입니다.”

“사부님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오늘은 그렇습니다.”

청선은 공손하게 대답하는 도현의 위아래를 새삼스레 다시 살폈다. 하체는 중심이 잘 잡혀 있었고, 두 눈빛은 안으로 깊숙이 갈무리되어 사람됨이 무척 진중해 보였다.

‘대나무가 거목이 되어 돌아왔군. 어인 일이지?’

불과 1년도 안 된 사이에 딴사람이 되어 돌아온 도현이 청선은 놀랍고 기특했다.

“무맥의 후예라도 만나 기연이라도 얻었는가?”

도현은 곧이곧대로 얘기해 줄 수가 없었다. 청선이 아무리 자신에게 잘해 주더라도 태선군의 일로 언제 칼을 겨눌 사이로 돌변하게 될지 모른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돌아가신 부친이 도우셨는지, 짧은 기간이지만 적지 않은 성취를 이뤘습니다.”

도현의 대답에 청선이 허허 웃으며 뒤를 돌아 노일문의 위패를 응시했다.

“어린 후배도 이렇게 성장하거늘, 난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는 두 눈을 감았고, 실내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도현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오는 도중 검선문의 제자들이 하는 얘기를 우연찮게 들었습니다.”

도현은 료코와 주성하가 나누었던 대화를 짤막하게 해 주었다. 청선은 별 반응이 없었다.

“검선문 내부 일이니 제가 나설 입장은 아니지만,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전 이만.”

“그 얘기를 해 주려고 일부러 날 찾아왔는가?”

“아닙니다. 그냥 어찌 계시나 싶어서……. 만약 제 기척을 알아내지 못하셨다면 전 조용히 물러갔을 겁니다.”

“과연 그랬을까?”

청선은 청동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몇 줄기 연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도현을 응시했다.

“이곳은 어찌 알아냈나? 자네 처지에 사람을 부려 등선궁을 감시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말이야.”

“뜻이 있으니 길이 보여 따라왔을 뿐입니다.”

“따라와 보니 어떻던가? 사부님을 다시 보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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