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09화 (209/575)

[209] 디 임팩트 9권 9화

“상납을 하니 만년 밑자리에서 중견 간부로도 승진을 하고 잘나갔지. 간부로 승진하니 돈도 더 잘 모였고. 그런데 4년 전, 일이 벌어졌소. 상해의 낡은 빌딩 매입에 베스트엠이 입찰을 못하도록 손을 써 달라는 청탁이 들어온 거요. 부하 직원 몇과 베스트엠의 상해 법인이 불법적인 일을 한 건 없는 지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지, 증거도 모으고.”

도현은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감찰반이 나를 상대로 뒷조사를 하더군. 탈탈 털렸지 뭐요. 재수 없다 여기며 정식 재판에만 회부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파면당하는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가 됐지. 그런데 나중에 동기들을 통해 알아보니 내가 베스트엠의 경쟁 사업체의 청탁을 받고 조사를 하는 걸 눈치챈 베스트엠 측에서 손을 써서 감찰반이 움직인 거였소.”

탁.

술잔을 소리 나게 탁자 위에 놓은 류장은 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래서 결심했지, 베스트엠에 타격을 주기로.”

“…….”

“표정이 왜 그렇소?”

“그게 답니까? 다른 이유는?”

“그게 전부요. 황금알을 낳는 내 밥그릇을 그놈들이 망가트렸으니 책임을 져야지.”

도현은 갑자기 목이 타서 와인을 몇 모금 연속해서 마셨다. 뭔가 깊은 사연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들어 보니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러니까 그때 그 일 때문에 베스트엠을 조사해 왔다는 거군요.”

“매달리지는 못하고, 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알아봤지. 올 초에는 홍콩에 직접 가서 베스트엠의 본사도 둘러봤소. 그러다가 당신이 섭 회장을 조사하는 것 같기에 혹시나 해서 아까 그 집 주변을 염탐했던 거요.”

“섭 회장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는 아니군요.”

“없다 말하기는 힘들지, 그가 베스트엠의 회장이니까.”

“악감정을 가질 수는 있겠죠. 하지만 어차피 피장파장이 아닙니까? 청탁을 받고 움직인 당신이나 당신보다 윗선을 동원한 베스트엠이나.”

도현의 냉정한 시각에 류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야기를 그렇게 갖다 붙이면 곤란하지. 어쨌든 나는 당한 입장이라고.”

“물론 그렇겠죠, 당사자 입장에서는.”

도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류장의 태도를 보니 베스트엠에 대한 적의는 끝까지 갈 것 같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목적이 같으면 난 얼마든지 당신과 힘을 합칠 생각이오. 내겐 정보력이 있고 당신은 강한 힘이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환상의 콤비가 될 수도 있소. 게다가 종종 우리 사무실로 의뢰를 하러 오는 거물급들이 있는데, 당신이 함께해 주면 돈도 꽤 벌 수 있소.”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말인데, 아까 그 요괴 같은 년의 검을 맨손으로 막으니 중간에 푸른 번개 같은 게 번쩍번쩍하던데, 그건 어떻게 한 거요?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무인들의 한 장면 같았는데, 그녀가 자신을 검객이다 뭐다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당신도 검객이오?”

한때 무술을 배워서 그런지 류장의 관심은 매우 컸다.

도현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제게 받았다는 목숨의 빚은 이 와인 한 병으로 끝내도 됩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십시오.”

“더 이야기 좀 하다 가지 왜 벌써?”

당황한 류장이 벌떡 일어났다.

“이래 봬도 난 인맥이 상당한 사람이오. 나와 손잡고 일 해서 나쁠 것 없다는 말이지. 섭 회장의 일을 해결한 뒤에는 나랑 같이 일합시다. 이 바닥에 일거리 아주 많아요. 당신처럼 뛰어난 사람이 조용히 해 줄 일이 넘친다는 말이오.”

“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나, 조건이 되니까 하는 거지.”

류장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철천지원수가 아닌 이상 섭 회장에 대한 적의는 거두십시오. 그게 당신의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도현은 현관문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류장이지만 그래도 홍영과 가까운 사이라니 또 무슨 행동을 해서 검선문의 제자들에게 당할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잠깐!”

류장은 막 문을 열려는 도현의 팔을 붙잡았다.

“나도 성격이 불같은 성미지만 당신도 만만치 않군. 알았소. 내가 같이 일해 보자는 말에 화가 난 것 같은데,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치시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줄 게 있으니까.”

서재에서 나온 류장의 손에는 작은 사각 가방이 하나 들려 있었다.

“받으시오.”

“그게 뭡니까?”

“내가 몇 년간 조사한 섭 회장과 베스트엠에 대한 자료요. 당신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섭 회장을 쓰러트리는 것이라면 어찌 됐건 내게도 통쾌한 일. 대단한 자료는 아니지만 도움은 될 거요.”

도현은 그가 내미는 가방을 내려다봤다.

그의 원수는 섭상이 아니라 태선군이었다. 하지만 태선군이 머물고 있는 곳이 섭상이 지은 집일 만큼 섭상은 검선문에서 재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 태선군이 상해가 아닌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섭상을 조사하다 보면 쉽게 그 행적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섭상의 자료는 그에게 있으면 유익한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도현이 가방을 받자, 류장은 빙그레 웃었다.

“이름이라도 좀 알려 주면 안 되겠소?”

망설이던 도현이 답했다.

“백도현입니다.”

“한국 사람이오?”

“예.”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시오. 싼 가격에 도와줄 테니까.”

도현은 머리를 꿰맨 주먹코 류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주제넘을지 모르겠지만, 아내분은 그래도 당신과 함께 있어서 행복했을 겁니다.”

“정말 그랬을까? 아프고 가난했는데?”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도현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

꼬박 밤을 새우고 돌아온 도현은 걱정했던 홍영에게 간밤의 일을 얘기해 주었다.

류장을 구하기 위해 태선군의 제자들과 싸웠다는 대목에서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손에 땀을 쥐며 이야기를 들었다.

“팔은 괜찮아요?”

도현은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에요. 살짝 스친 정도에 불과해요.”

“다행이에요.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곳에?”

도현은 류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아저씨에게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섭 회장 주변을 맴도는 건 위험한 일인데.”

도현이 없었다면 간밤에 류장은 목숨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분도 느끼셨을 거예요. 나도 경고를 했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둘은 류장이 준 가방을 함께 살폈다.

수백 장의 사진과 서류 들이 사안별로 정리되어 있었는데, 베스트엠의 직원들 리스트와 베스트엠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의심되는 여러 사건들, 그중에는 살인 사건과 같은 중범죄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섭 회장이 가지고 있는 중국 전역의 별장과 집 들이 꼼꼼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이건 섭 회장의 성장 기록이에요.”

도현이 보니 섭상의 부친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교수로 재직하다 숙청당했고, 누나들의 손에 크다가 안휘성으로 이사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안휘성 남부에는 옥룡산이 있었고 그곳에 검선문이 위치했으니, 어쩌면 이때부터 섭상은 검선문의 제자로 성장했는지 모른다. 그 외의 성장 기록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음, 이자의 이름이 주성하였군.’

도현은 베스트엠의 직원들 리스트 중 사진과 함께 이름이 적혀 있는 주성하를 발견했다. 베스트엠의 홍콩 본사 비서실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누구예요?”

도현이 주성하의 사진에 관심을 기울이자 다른 자료들을 살펴보던 홍영이 물었다.

“태선군의 제자예요. 이름을 몰랐는데 여기에 보니 주성하라고 되어 있네요.”

도현은 간밤에 섭상의 집에서 본 주성하의 체격과 홍콩에서 싸웠던 복면인의 체격을 비교해 보았다.

‘비슷한 것도 같은데…….’

방상이 선보인 검술이 그 당시 복면인의 검술과 같았기에 도현은 복면인이 어떤 식으로든 검선문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검선문이 기예잡술서를 찾았던 것일 수도 있어. 그 복면인은 여기 주성하와 키와 체형이 흡사해 보이니.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왜 기예잡술서를 찾으려고 한 걸까? 안에 적힌 외공 때문이었을까?’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침 먹자.”

방문 밖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홍영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도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가요. 밥 먹고 한숨 자요, 피곤할 텐데.”

“밥이 넘어가냐?”

일곱째 육기천은 앞니가 부러진 방상이 허겁지겁 아침을 먹자 어이가 없는지 한 소리 했다.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장풍에 맞은 배는?”

“사부님이 치료해 주셔서 괜찮습니다. 근데 제 검은 찾아보셨습니까?”

“네 방에 가져다 놨다. 사매의 보검에 날이 다 잘리고 검신은 부서지기 직전이야. 버리고 새로 하나 장만해.”

“쓸 만한 검인데, 아깝네.”

방상은 젓가락을 놓고 물로 입을 헹궜다.

“처음 보는 녀석이었지?”

“그렇다니까요. 아는 사람이었다면 복면을 써도 모를 리가 없죠.”

“사제의 성검술은 제법 쓸 만한데, 어떻게 그 녀석이 단번에 빈틈을 찾아내고 손을 뻗은 거지?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성검술의 복잡함은 기이해서 단번에 그렇게 꿰뚫어 보긴 어려운데.”

육기천은 방상이 밥을 먹은 식탁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의자를 왔다 갔다 했다.

“그래서 사부님도 이상하다 하셨습니다. 혹시 전전 대의 검선문 시절에 사라진 분들이 무예를 가르친 제자가 아닌지 의심도 했고요.”

“글쎄다.”

작은 체구의 육기천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무튼 큰일입니다. 홀로 우리 사형제 네 명을 상대할 정도의 고수가 우리의 적이라면 앞으로 피곤해지는 게 아닙니까?”

방상이 부러진 앞니를 만져 보며 인상을 썼다.

“나쁜 자식, 튼튼한 내 앞니를 부러트리다니.”

“그래서 내가 말을 했지 않느냐, 매사에 몸을 사리라고. 딱 봐서 고수 같으면 물러날 줄도 알아야지. 둔해 빠져 가지고.”

혀를 차던 육기천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막내 주성하가 들어서고 있었다.

“뭐냐?”

“섭 사형이 모이라고 하십니다.”

“알았다. 가 봐.”

“지금 오시라는데요.”

주성하가 눈치를 보며 어서 같이 갈 것을 종용하자 육기천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주성하의 뺨을 후려쳤다.

“건방진 자식이 어디서 눈을 부릅뜨고 말을 해! 간다고 했잖아!”

“…….”

주성하는 홱 돌아간 얼굴을 천천히 바로 세우며 작달막한 육기천을 내려다봤다.

“뭐? 불만이라도 있냐?”

“아닙니다.”

주성하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흥! 무공은 제대로 수련도 안 하고 머리만 쓰는 자식. 섭 사형에게 빌붙어서 눈치만 보는 놈.”

“사형, 그래도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아무리 막내라지만 서른이 넘은 사람인데, 그리 뺨을 때리시는 건.”

방상이 다가와 하는 말에 육기천이 콧방귀를 뀌었다.

“괜찮아. 제깟 놈이 어떻게 할 건데.”

뺨을 맞고 나온 주성하는 복도에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개 같은 놈들. 내가 담기량이 남긴 무공과 영단만 얻으면 찢어 죽여 주마!’

손등에 파란 심줄이 툭툭 튀어나올 만큼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졌던 그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잡자 흠칫하며 뒤돌아섰다.

“왜 그러고 서 있어?”

다리와 팔에 붕대를 감은 료쿄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도현과 내공을 겨루다 내상을 입어 힘이 없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주 사제.”

“예?”

복도를 따라 걷던 주성하가 반걸음 뒤처져서 따라오던 료쿄를 쳐다봤다.

료쿄는 잠시 말없이 주성하를 보다가 천천히 다가와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주성하는 료쿄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어서 몸이 긴장돼 뻣뻣해졌다. 몸이 굳은 그에게 료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담기량의 은거지를 반드시 찾자.”

“예? 아, 예. 그래야죠.”

료쿄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앞서 걸어갔고, 주성하는 어깨에 힘을 주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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