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10화 (210/575)

[210] 디 임팩트 9권 10화

“등선궁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렇습니다, 사부님.”

노일문의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옥룡산 등선궁으로 가겠다는 청선의 말에 태선군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어젯밤 괴한의 손에 의해 네 사형제들이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것은 알고 있느냐?”

“예.”

청선은 노일문의 위패가 놓인 단 앞에서 사부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이런 때에 대제자인 네가 자리를 비우고 산으로 돌아가는 게 올바른 행동이냐?”

“부끄럽습니다, 사부님.”

“못난 놈.”

뒷짐을 진 태선군은 며칠을 굶어 생기가 없어 보이는 청선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노일문의 장례가 끝나는 대로 네게 벌을 내리려 하는 상황인데, 네 녀석은 여전히 거침없이 행동하려 하는구나.”

“원하신다면 죽음이라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청선이 엎드려 고개를 숙이자 태선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썩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사부의 호통에 청선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중심이 서지 않는 문파는 작은 충격에도 허둥대다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무허는 나를 문파의 중심으로 여기지 않고 도전했지만 결국 나는 꿋꿋하게 버텨 내고, 오히려 그를 무너트렸다.”

태선군의 목소리가 천장이 높은 단층 건물 안에 울림을 주며 퍼져 나갔고, 그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네가 나와 같은 중심이 되어 문파를 이어 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대제자의 본분이 아니더냐?”

“…….”

“등선궁에 다시 가겠다는 생각은 단념해. 네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이다.”

“사부님, 석 달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곳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무슨 마음을 정리하겠다는 것이냐?”

“지나온 시간입니다.”

“지나온 시간?”

태선군의 눈빛이 깊어졌다. 한동안 청선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음에 변화가 생겼구나. 좋다,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사부님.”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는 청선에게 태선군은 바짝 다가섰다.

“한데, 어제 그 괴한이 넌 누구라 생각하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청선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보지 못했으니 제자가 어찌 알겠습니까?”

“얼마 전 널 구해 주고 사라진 복면인과 동일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지워지지 않는구나.”

태선군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청선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놨다.

“청선아, 무엇을 내게 숨기느냐? 복면인은 너를 알고 있어. 게다가 어제는 이곳까지 다녀간 것 같고. 대체 그는 누구냐?”

“제자는 알지 못합니다.”

“모른다?”

태선군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청선의 앞을 지나쳐 단 위 노일문의 위패를 응시했다.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거지가 불쌍해 보이거나 아니면 적선하는 자의 자기만족이겠지. 그것이 세상 이치다. 세상에 이유 없이 행동하는 자는 찾아보기 어려워. 나는 복면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한 태선군은 몸을 돌려 청선의 두 눈을 응시했다. 며칠간 밤을 새운 그의 두 눈은 붉은 핏줄이 흰자를 가득 덮고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너는 검선문의 사람이야.”

섭상의 집을 조사하고 온 도현은 며칠을 홍영의 집에 머물며 홍영의 어머니와 시장도 가고 외식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상해 서쪽에 있는 정림사라는 절도 다녀왔다.

“도현 씨 때문에 엄마 주름이 두 개나 사라졌어요.”

홍영은 도현이 귀찮아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사실 작은 체구인 홍영의 어머니는 돌아다니는 걸 아주 좋아했다. 홍영도 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한번 다녀오면 눈 밑이 검게 변할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와 도현은 미소를 잃지 않고 며칠을 동행했으니 홍영이 감격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집을 나와 가로등이 켜진 밤거리를 도현과 손을 잡고 걸어가던 홍영이 말했다.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요. 너무 오래 있어도 엄마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홍영은 상해에 업무차 왔다는 핑계를 댔고, 도현은 상해에 볼일이 있어서 온 것으로 홍영의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홍영 씨와 한집에서 살고 있다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

도현은 홍영의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몇 번이고 기회를 봤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예비 사윗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홍영을 통해 슬쩍 듣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민감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저 ‘저어 어머니.’라는 서두만 되풀이할 뿐 뒷말은 못 잇고 흐지부지하기 일쑤였다.

‘싸우는 것보다 말하는 게 더 어렵네.’

그렇게 며칠을 흘려보낸 도현은 홍영에게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소심 씨.”

홍영의 장난에 도현은 자신의 가슴을 살짝 두드렸다.

“그 말 취소하게 해 줄게요.”

“어떻게요?”

말을 하던 홍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도현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박력 있게 키스를 한 것이다.

아직 밤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도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입맞춤을 했다.

당황하던 홍영의 눈은 이내 사르륵 감겼다.

“봤어요? 이래도 내가 소심해요?”

“한 번 해서는 모르겠어요.”

대담한 홍영의 말에 도현은 움찔하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바보, 얼른 가요.”

얼굴이 붉어진 홍영이 저만치 앞서 갔고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 뒤를 따라갔다.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한 그들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었다. 목적지는 특별히 없었다. 그저 저녁을 먹고 나온 산책 겸 데이트였다.

그런데 걷다 보니 홍문기가 태선군의 손에 죽임을 당한 공원이 나왔다. 그는 이곳에서 아침 운동을 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온 태선군의 일 장에 내부 장기가 찢기고 으스러졌다. 조금 전까지 웃던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걷혔다.

“집으로 그만 갈까요?”

도현의 말에 홍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우리 공원에서 잠시 쉬었다 가요.”

“공원에서요?”

“어서 와요.”

홍영은 공원 벤치에 도현과 앉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한 장소와 매우 가까운 곳이어서 도현은 그녀가 걱정돼 좌불안석이었지만 오히려 그녀는 편안해 보였다.

“하늘을 나는 고수가 나보다 마음이 여려서 어떻게 해요?”

그녀는 도현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젠 괜찮아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몰랐다면 난 이 장소에 올 때마다 무척 두렵고 슬펐을 테지만, 이젠 진상을 알잖아요.”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긴 머리카락 일부가 도현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도현 씨가 옆에 있어서 정말 기쁘고 힘이 나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홍영 씨가 있어서 이계에서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어요.”

“거짓말 말아요. 도현 씨는 나 없어도 얼마든지 복수의 일념으로 그곳에서 견뎠을 거예요.”

“진짜 힘들 때 날 버티게 해 준 건, 복수보다는 홍영 씨에 대한 그리움이었어요.”

도현의 진심이 담긴 뜨거운 고백에 홍영은 괜스레 눈물이 났다.

“그럼 로나는요?”

홍영이 로나를 언급하자 도현은 순간 당황을 했다.

“로나요?”

“용주 씨에게 다 들었어요. 도둑 패거리 중에 금발의 미녀가 있는데, 그 여자가 당신을 좋아해서 함께 다니자고 했다면서요?”

도현은 용주에게만 로나의 일을 얘기했다. 그런데 용주가 홍영에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용주 이 녀석, 날 골탕 먹이려고.’

어쩐지 상해로 떠나는 날, 그를 보며 용주가 이상하게 히죽거리며 웃었다.

“당신은 바람둥이예요.”

“오, 오해예요. 홍영 씨.”

“어쩐지 이계에 다녀오면서부터 말도 부드럽게 잘하고 안 하던 스킨십도 적극적으로 해 오더니, 그거 다 이계에서 배워 온 거죠?”

“그럴 리가요. 그건 순수한 내 마음을 홍영 씨에게 표현 한 거예요. 같이 살면서 가까워진 이유도 있고요.”

“믿음이 안 가요. 아무래도 우리 둘 사이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어요.”

홍영이 토라진 척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을 벗어나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용주가 어떻게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내 말만 들어요. 난 떳떳하다고요.”

도현이 뒤따라가며 말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안 했다.

“홍영 씨.”

“떳떳했다면 왜 로나 일을 내게 숨겼죠?”

“그야 지금처럼 괜한 오해 사기 싫어서죠. 내가 아무리 말해도 홍영 씨가 안 믿잖아요.”

“믿어요.”

“정말요?”

“당신이 바람둥이라는 걸 믿어요.”

“…….”

자신을 놀려 주고 다시 부지런히 걷는 홍영의 뒷모습에 도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홍영이 짐짓 화난 척 말을 했지만 눈가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안 오고 뭐 해요?”

앞서 걸어가던 홍영이 뒤에 서 있는 도현에게 물었다.

“홍영 씨가 자꾸 바람둥이라고 하니까, 정말 그렇게 돼 볼까 생각 중이에요.”

마침 화장을 예쁘게 한 귀여운 젊은 여성이 지나가다 수려한 외모의 도현을 힐끔 쳐다보며 관심을 보였다. 그 모습에 홍영이 달려와 도현의 손을 잡았다.

“한 번은 봐줄게요. 가요.”

도현은 못 이기는 척 홍영의 손에 이끌려 갔다.

저녁 교육이 끝난 후 호태식은 검을 다루는 데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겨서 사범인 용주에게 묻고 있었고,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는 장철호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눈치를 봤다.

장철호는 도장 구석진 곳에서 호심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비록 용주나 홍영과 달리 단전에 기운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부상당한 오른쪽 어깨가 점차 회복되고 있어서 그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특별히 정해진 몸동작이 있는 게 아니라 호흡법을 유지하며 몸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장철호는 호검술을 바탕으로 호심공을 수련해 오고 있었다.

온몸에 땀을 흘리며 목검을 들고 움직이는 장철호의 눈빛은 시종일관 진지해서 감히 말을 붙이기도 어려워 보였다.

“피디님이 물어봐요.”

“나보다는 네가 낫지 않을까?”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는 서로 눈치를 보며 티격태격했고, 은근히 그런 그들이 신경이 쓰였던 장철호는 검을 거두고 호심공을 중단했다.

산적처럼 생긴 장철호가 살짝 인상을 쓰며 바라보자 이호선과 김유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장 사범님과 얘기 좀 하고 싶어서요.”

장철호는 전직 사범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서 관원들은 그를 장 사범이라고 불렀다.

“무슨 일인데요.”

“조용한 곳에서 차나 한잔하시면서…….”

“바쁜데 그냥 여기서 말해요. 뭡니까?”

이호선은 목검을 비스듬하게 내리고 서 있는 장철호의 몸에서 위압감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번에 우리 백두TV에서 ‘다섯 명의 외팔이 검객’이라는 16부작 시대극을 준비 중인데, 오디션을 한번 보시는 게 어떠실까 해서요.”

“오디션요?”

“예, 제목처럼 5인의 외팔이 검객이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세도 가문에 맞서 싸우는 활극입니다. 저와 가까운 형님이 연출을 맡으셨는데, 진짜 검을 잘 쓰고 액션도 잘 소화하는 배우를 찾고 있습니다. 주연 급 검객은 이미 캐스팅이 끝났고, 조연 급으로 상당히 비중 있는 나머지 3인의 검객 배역이 남았는데, 어떠십니까? 장 사범님이라면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배역 같은데요.”

장철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기자도 아닌 내가 그런 걸 왜 합니까?”

“막노동보다는 낫잖아요.”

옆에 서 있던 김유진이 말을 해 놓고 그 자신이 놀라 얼른 입을 손으로 가렸다.

“아, 죄송해요, 장 사범님. 직업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 연기자라는 직업으로 폭을 넓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어요. 보조 출연자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 많거든요.”

장철호가 말이 없자 이호선이 다시 말을 꺼냈다.

“연기를 걱정하신다면 그건 별로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권하는 배역의 오디션은 말수도 적고 그저 형님으로 모시는 또 다른 외팔이 검객의 지시에 물불 가리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우직한 인물이니까요. 그저 필요할 때 한 팔로 멋진 검술을 보여 주시고, 때때로 고난이도의 액션을 조금만 소화해 주시면 됩니다. 전직 격투기 선수셨으니까 액션에 있어서도 조금만 배우시면 무난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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