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디 임팩트 9권 13화
호심공의 경지가 깊어진 용주는 관장실에서 도현이 전화상으로 미처 말해 주지 못했던 중국에서의 일을 자세히 들었다.
“검선문도 완전히 콩가루네. 태선군은 무허란 사람과 싸우고, 대제자 청선은 다른 사형제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처지인 것 같고. 거기다 태선군은 청선이 전대 문주로부터 전수받은 오원신공을 노리고 있고. 문파가 유지되는 게 신기하다.”
용주는 독설을 퍼부으며 손바닥에 붕대를 감았다. 도현의 검을 막다 손바닥에 있던 굳은살이 갈라지고 물집이 터졌다.
“괜찮아?”
도현이 약간 미안한 마음에 물었다. 친구를 위한 대련이었지만 조금 심했나 싶기도 했다.
“괜찮지 그럼. 이 정도가 뭐 대수라고. 아니, 근데 오원신공은 무슨 무공이기에 그 괴물 같은 태선군이 탐을 내는 걸까?”
“문주 무공을 배우지 못해서 자신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정말 강한 무공이기 때문에 배우고 싶은 걸 수도 있지.”
“무허의 말처럼 청선이 정말 검선문의 전대 문주에게 그 무공을 전수받았을까?”
“글쎄…….”
도현은 말끝을 흐리며 차를 입에 댔다.
“어째 찝찝하다. 청선이 만약에 문주 무공이라는 오원신공을 배워서 무섭게 강해지면 우리에게는 좋을 게 없잖아.”
“태선군이 배워도 그렇겠지.”
도현의 차분한 대답에 용주가 그 부분은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눈이 커졌다.
“그러네. 그 인간이 오원신공을 배우기 전에 네가 먼저 찾아가서 끝장내 버려.”
“오원신공이 그렇게 강하다면 한번 상대해 보고 싶긴 해.”
“미친놈, 차라리 그걸 빼앗아 와. 내가 익힌 다음에 네 상대가 되어 줄 테니까. 엉뚱한 생각 말고 취영산에 들어가서 검술을 대성하고 내려와. 해 넘기기 전에 태선군을 하늘나라로 보내 버리게.”
용주의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영이 내일 중국에서 돌아오는 걸 보고 취영산에 들어갈 계획을 이미 세운 상태다.
“아 참, 어제 이 피디가 철호 형에게 TV 드라마 오디션을 보라고 했어.”
“오디션?”
“어. 5인의 외팔이 검객이 활약하는 액션 시대극이라는데, 조연급으로 말이야.”
“그래서?”
“철호 형이 인상을 팍 쓰더라, 안 한다고. 내가 보기엔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겠지. 연기자도 아닌데 오디션을 통과하는 게 쉽겠어?”
“대사가 거의 없는 행동파 역인가 봐. 그리고 내가 딱 보니까 이 피디가 말하는 투가 어째 권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가 줬으면 하는 눈치더라고. 아마 오디션은 그냥 통과의례고 그냥 가면 무조건 합격시킬 것 같아.”
“흠.”
도현은 차를 마시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디션 없이 배역을 준다 해도 그 형 성격에 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도와준다고 했지만 거절했잖아, 천천히 자신의 길을 개척하겠다면서. 그런데 드라마에 배역을 준다고 해서 그 형이 움직이겠어?”
“안 움직이지. 근데 약간 흔들리는 기색은 있더라.”
“뭐?”
도현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용주를 응시했다.
“내가 옆에서 막 바람을 불어넣었거든. 호검술 제자가 TV에 한번 나가서 인상적인 연기 한번 ‘팍’ 보여 주면 좋지 않겠냐고. 너도 좋아할 거라고 말했지.”
“내가 왜 좋아해?”
“그냥 말하다 보니까 그런 말이 나왔어. 그랬더니 철호 형 얼굴이 갑자기 심각하게 변하더라고, 하하하!”
“장난칠 게 따로 있지 그런 일에 왜 내 이름을 파냐?”
“미안, 미안.”
용주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 관장님이 왔어요?”
“예, 조금 전에 인사도 했는데요.”
호태식이 도복으로 갈아입으며 대꾸했다.
‘잘됐군. 교육 끝나고 만나 봐야겠어.’
이호선은 도복의 허리끈을 힘주어 매며 눈을 빛냈다.
교육이 끝나고 그는 김유진과 함께 지하 도장으로 향했다.
“관장님,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들어오시죠.”
도현은 손에 든 진검을 거두며 관장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지?’
도현은 찻잔에 차를 담으며 약간 긴장된 얼굴로 앉아 있는 이호선을 힐긋 바라봤다. 이호선, 김유진과는 불과 30분 전 저녁 교육 시간에 만나 인사를 나눈 상태였다. 교육이 끝나고 자신을 찾은 이유가 뭘까 생각하며 도현은 갈색빛이 나는 차를 찻잔에 담아 이호선과 김유진에게 권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보니 두 분 다 목검 끝이 살아 있는 게 보여서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집에 돌아가서도 열심히 수련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도현의 칭찬에 이호선과 김유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빈말을 안 하는 백 관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는 칭찬의 느낌은 아주 달콤했다.
“다음 주부터는 조 사범과 대련 시간도 가질 겁니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두려움을 이겨 내다 보면, 얻는 게 또 있을 겁니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호선이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김 작가님은 피부가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얼마 전부터 그런 이야기 많이 듣고 있어요.”
김유진이 부끄러운지 몸을 살짝 꼬았다. 도현 옆에 홍영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마음 한편에 도현에 대한 호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호검술을 수련하면서 변비가 사라졌답니다.”
이호선의 짓궂은 말에 김유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피디님!”
“사실이잖아. 안 그래?”
김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도현의 시선을 회피했다.
“쓸데없는 말씀 그만하시고 얼른 관장님께 하실 말씀이나 하세요.”
톡 쏘는 김유진의 말투에 이호선은 자신이 온 목적을 상기하며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놨다.
“관장님, 장 사범을 설득해 드라마 오디션을 보게 해 주십시오!”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는 이호선의 행동에 도현은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했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용주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도현은 이호선에게 직접 듣기를 원했다.
“회사에서 준비하는 16부작 액션 시대극 있습니다. 저와 가까운 선배가 연출을 맡았는데…….”
이호선은 장장 5분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숨도 쉬지 않고 이게 어떤 드라마이고 조연 급인 외팔이 검객으로 장철호가 출연하면 어떤 장점이 있는지 물 흐르듯 설명했다.
“김 작가, 그것 좀 줘 봐.”
“여기요.”
김유진은 드라마 팀에서 받아 온 다섯 명의 외팔이 검객 시놉시스를 이호선에게 건넸다.
“오죽했으면 제가 이런 걸 다 가지고 와서 백 관장님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한번 읽어 보십시오. 장 사범에게 딱 맞는 배역이고, 화제성도 단연 독보적이라니까요. 인기도 얻고 수입 면에서도 막노동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요.”
묵묵히 차를 마시며 이호선의 이야기를 다 들어 준 도현은 탁자 위에 놓인 시놉시스를 읽지도 않고 이호선에게 돌려줬다.
“한번 읽어 보시는 게…….”
“괜찮습니다. 이 피디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했으니까요.”
김유진은 도현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손을 뻗어 이호선 앞에 있는 시놉시스를 가방 안에 도로 넣었다.
“다시 오지 않는 좋은 기회입니다. 장 사범이 연기에 대해 어려워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평상시 표정 자체가 완벽한 연기 수준이니까요.”
“이 피디님의 제안을 장 사범이 거절한 이유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다른 여러 이유가 있겠죠.”
“저희는 그걸 알 만큼 친분이 없잖습니까? 그러니 관장님이 도와주십시오. 장 사범을 설득해 주시겠습니까?”
이호선이 긴장된 얼굴로 도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본인이 싫다고 한 일을 제가 나서서 되겠습니까?”
“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관여할 부분은 아닌 것 같군요.”
“정말 매정하십니다, 관장님. 우리가 이런 사이입니까?”
이호선이 정에 호소했지만 도현은 꿈쩍도 안 했다. 이미 도현의 쇠심줄 같은 고집을 경험해 본 이호선은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모습에 도현이 고심하다가 한마디 했다.
“장 사범에게 오디션에 대해 딱 한 번만 물어보겠습니다. 속마음을 들어 보고 싫다고 하면 그땐 저도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관장님!”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자 이호선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호선과 김유진을 보낸 도현은 5층 도장으로 향했다. 도장은 텅 비어 있었다.
도현은 계단을 통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용주는 그의 전용석처럼 되어 버린 오래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금연한다면서?”
“누가 그래?”
용주가 처음 듣는다는 시늉을 하면서 담배를 피워 댔다.
“조 박사님이 걱정돼서 그래?”
“걱정은. 어련히 잘 계실까.”
용주는 도복 틈 사이로 스며드는 찬 바람에 몸을 한번 떨며 피식 웃었다.
뉴질랜드의 초고대 문명 연구가 사무엘 박사와 탐험을 떠난 조 박사는 한 달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원래 무심한 스타일인 조 박사였기 때문에 연락을 안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조카인 용주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도현까지 걱정하는 기색이자 용주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손짓을 했다.
“야, 이런 적이 한두 번이냐. 예전에도 몇 달씩 연락 안 됐어도 결국엔 멀쩡히 나타나셨잖아. 넌 신경 쓰지 마.”
몇 모금 담배를 더 피운 그는 옥상에 가져다 놓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꼭 담배 끊어야지.”
한껏 기지개를 편 용주는 옥상 난간에 손을 올려놓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넌 여기서 뛰어내려도 멀쩡하겠지?”
도현은 용주 옆에 서서 건물 아래를 내려다봤다.
“자세만 바로 잡으면.”
“내가 사실 그저께 밤에 3층에서 뛰어내렸거든, 내공을 믿고 말이야. 죽는 줄 알았다. 무릎 관절 나가는 줄 알았어.”
용주는 대담하게도 호기심에 일을 벌였다가 큰코다칠 뻔했다.
“지금 네 수준으로는 한 번에 뛰어내리는 것보다 중간에 사물을 이용해 속도를 줄이거나 아니면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착지할 때 충격을 최소화하는 게 좋아. 특히 중요한 점은 마지막 착지 순간에 내공으로 두 다리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거. 아마 네가 3층에서 뛰어내리고도 이렇게 멀쩡한 이유는 그나마 착지 순간에 본능적으로 내공을 두 발에 집중해서일 거야.”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을 하던 도현은 장철호가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도현아, 철호 형이지?”
용주도 본 모양이다.
“여기가 그 도장이냐?”
차를 세운 박세중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호검술 도장의 간판을 차창 너머로 올려다봤다.
“그래.”
박세중과 저녁을 먹고 평소보다 도장에 늦게 도착한 장철호는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막노동하면서 밤에는 검을 배운다? 그게 뭐냐, 돈도 안 되는 거.”
“모르고 하는 소리니까 봐준다. 그만 가 봐.”
장철호가 도장이 있는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자 박세중이 차에서 내려 외쳤다.
“야, 운동할 데 없으면 우리 체육관으로 와! 언제든 환영이니까!”
장철호는 박세중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5층에서 도현과 용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영이 어머님께 결혼 승낙을 받았어?”
장철호는 도현을 보자마자 물었다. 그는 도현이 태선군 때문에 상해에 다녀온 줄을 몰랐고, 단순히 홍영의 일로 중국에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반은 승낙받았어요.”
“반은 또 뭐야?”
“굳이 말을 안 해도 이심전심으로 어머님과 저 사이에 암묵적인 그런 관계가 형성됐다는 뜻이죠.”
“무슨 말장난 같은 소리야? 너 홍영이와 한집에 살면서 결혼 얘기는 꺼내지도 않은 거냐?”
장철호가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자 도현이 난처한 얼굴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게 그렇게 쉽지 않더라고요. 홍영 씨도 급하게 말할 필요 없다고 해서.”
“사내자식이 여자를 책임지는 자세가 안 보여. 이리 와! 관절 꺾기로 내가 그냥!”
“박세중하고 왔죠?”
조용히 지켜보던 용주가 한마디 하자 도현에게 다가가던 장철호가 흠칫했다.
“맞네, 박세중. 어두워서 긴가민가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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