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14화 (214/575)

[214] 디 임팩트 9권 14화

장철호의 어깨를 잔인할 정도로 집중 타격한 박세중을 용주는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었다. 그 경기로 인해 장철호는 한쪽 팔을 못 쓰게 됐다. 호심공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런 상황일 것이다.

“박세중이 형을 도장 앞까지 태워다 줄 정도면 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건데, 맞아요?”

“자식이 삐딱하게 묻기는. 이 근처에서 저녁 먹은 김에 도장까지 태워다 준 거뿐이야.”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됐는지 잊었어요? 나 같으면 속에서 천불이 올라와 얼굴 마주 보면 주먹이 날아갔을 텐데요.”

“말했지만 케이지 안에서 일은 그 안에서 끝내야지 밖으로 가지고 오는 거 아니다.”

“그 자식은 심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몇 번 더 형을 가격했다고요, 불필요하게요. 그 찰나의 순간이 형의 어깨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겁니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도현이가 말해 준 거예요.”

곁에서 듣고 있던 도현의 얼굴이 조금 무거워졌다. 용주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장철호는 굳은 얼굴로 도장 바닥에 앉았다.

“용주 너, 여기 앉아 봐. 도현이 너도.”

둘이 자리에 앉자 장철호는 힘주어 말했다.

“너희들은 케이지 안의 격투가들이 어떤 심리 상태인지 잘 모른다. 단 한 번의 경기를 위해 수개월을 연습하고 최후에 와서 폭발적인 경기력을 보이는 그 순간은, 오로지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말겠다는 강한 적개심만 팽배하지. 신사적이고 아름다운 격투가는 없어, 비정하고 냉혹한 야수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상대방의 허점을 찾아서 맹렬히 달려들 뿐.”

잠시 말을 끊고 도현과 용주를 둘러보던 장철호는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 상황에 빠지다 보면 그 누구라도 심판의 제지를 생각 못 하고 타격을 더 가할 수 있는 거야.”

“고의가 아니란 말이죠?”

용주의 물음에 장철호가 굳은 표정을 풀며 피식 웃었다.

“당시 박세중은 나를 이기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너희들은 경기에서 진 내 모습만 기억하고 정작 경기에서 이긴 박세중의 모습을 잊었나 본데, 그 녀석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양쪽 눈이 다 부어서 세상이 단추 구멍만 하게 보였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 심판의 제지가 눈에 곧바로 들어왔겠어?”

잠시 말이 없던 용주는 귀밑머리를 긁적였다.

“진작 이렇게 말해 줬으면 박세중을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죠.”

“이제 박세중 만난다고 해서 날 배알도 없는 놈처럼 보진 않겠지?”

“미안해요, 형.”

용주가 사과를 했다.

“도현이 넌 홍영이 결혼 문제 올해 안에 매듭지어. 알았어? 홍영이 어머님께 정식으로 결혼하겠다고 인사드리란 말이야.”

백남식이 없는 상황에서 장철호는 어떤 의무감이 생긴 건지 도현에게 강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순순히 도현이 대답하자 장철호가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말이야. 어제 이 피디가 나보고 드라마 오디션을 한번 보라고 하던데,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그 이야기라면 저도 들었어요.”

“용주는 드라마에 내가 출연하면 네가 좋아할 거라고 하던데.”

장철호는 용주 말이 상당히 신경 쓰였나 보다.

“철호 형, 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형 생각이 중요하죠. 형이 하고 싶으면 오디션을 보는 거고, 아니면 이대로 끝내는 거죠. 참고로 전, 형이 드라마에 나오든 안 나오든 신경을 안 써요.”

“왜?”

“드라마 볼 시간이 없으니까요.”

“야, 굳이 그 얘기는 왜 하냐. 나중에 보면 되지.”

“넌 조용히 해.”

장철호가 옆에 앉은 용주를 노려봤다.

“자식이, 알고 보니까 순 지 생각이었네. 도현이는 관심도 없는데.”

장철호는 더 이상 고민할 것 없다는 눈빛으로 벌떡 일어나 도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향했다.

“형! 어쩔 건데요?”

용주가 묻자 장철호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안 해.”

도현은 이른 아침에 배낭을 메고 도장으로 향했다.

그의 옆에는 며칠 전 중국에서 돌아온 홍영이 아쉬운 눈빛으로 함께 걷고 있었다. 검을 수련하려 취영산에 들어가는 도현과 상당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같이 가고 싶은데, 안 되겠죠?”

“홍영 씨하고 가면 검에 집중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듣기는 좋네요.”

좋은 말로 안 된다고 말하는 도현에게 홍영이 작게 미소를 보였다.

도장에 도착한 도현은 배낭을 건물 앞에 주차해 놓은 자신의 차에 실었다. 수련용 진검 두 자루도 챙긴 그는 차를 타기 전 홍영을 가볍게 안아 주었다.

“다녀올게요.”

“도현 씨 없는 동안 나도 도장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게요.”

“그래요.”

“아직 산속은 추울 거예요. 건강 조심하고요.”

“걱정 말아요.”

두 사람이 다정한 모습으로 헤어지는 장면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차 안의 남자가 있었다.

“아주 애틋해서 못 봐주겠네.”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커피를 마시며 서지철이 말했다.

“새벽부터 기다린 보람이 있어. 역시 내 예감대로 백도현은 또 어딘가로 사라지려고 해. 이번엔 놓치지 않고 반드시 네놈이 어디로 가는지 밝혀내겠다.”

의뢰인이 바라는 건 이런 비밀스러운 도현의 행적인지도 모른다.

긴 시간에 걸쳐 차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현과 홍영을 지켜보던 그는 갑자기 조수석 창문을 누가 두드리자 화들짝 놀라며 옆을 쳐다봤다.

“형님, 문 좀 열어 봐요.”

“뭐, 뭐야 넌?”

불쑥 나타난 호태식을 보고 깜짝 놀란 서지철이 조수석 창문을 조금 내렸다.

“문 열라고요.”

“내가 왜 열어 줘야 하는데?”

“안 열면 확 소리쳐요, 백 관장 들으라고.”

“이 자식이 정말.”

서지철은 어쩔 수 없이 차 문을 열어 줬고, 호태식은 두툼한 등산복 차림으로 차에 올랐다.

“백 관장 미행할 거죠? 같이 가요.”

“네가 왜?”

“확인해 보려고요. 언제까지 형님하고 불편한 관계로 지낼 수는 없잖아요. 백 관장이 산으로 또 수련을 간다고 했으니까 형님 주장대로라면 수련을 핑계로 엉뚱한 일을 벌이기 위해서 가는 거 아니겠어요? 따라가 보면 진실을 알 수 있겠죠.”

“오, 너도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구나. 기특한 놈.”

서지철은 호태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좋아했다.

“오늘 백 관장이 산으로 수련을 가기로 했다는 말이지?”

“네, 어제 조 사범이 그랬어요. 당분간 또 보기 힘들 거라고요.”

“좋았어.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백도현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거야, 하하하!”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백 관장이 조금 수상한 점은 있지만 내가 보기엔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으니까요.”

호태식이 작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서지철이 간밤에 도현의 차 밑바닥에 부착해 놓은 GPS 위치 추적 장치 신호가 잘 잡혔다.

“자식아, 가까이서 보면 큰 그림을 못 보는 거야. 나처럼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봐야지. 두고 봐라, 백도현이 진짜 산에서 수련을 하는지 안 하는지.”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도현이 차를 돌려 경남 함양에 있는 취영산을 향해 출발했고, 그들은 멀찍이서 뒤를 미행했다.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해 3시간 가까이 차를 몬 도현은 함양 IC를 통과해 함양군에 이르러 쌀과 부식 등을 트렁크에 꽉꽉 채워 넣고, 취영산 산자락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이장님.”

“어이구, 그때 그 양반이네.”

마을 회관에서 나오던 박 씨가 알은척을 했다.

“저기 마을 공터에 차 좀 세워 놓으려고요.”

작년 겨울에도 이장에게 말을 하고 차를 세워 놨었다.

“뭐 편한 대로 하시우.”

“감사합니다, 이장님.”

“근데 허 영감님 집에 가는 건가?”

“네.”

도현은 웃는 얼굴로 답했다.

박 씨는 작년에 도현이 왔을 땐 허 할아버지에게 가는 걸 몰랐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이건 오다가 이장님 손녀가 생각나서 사 온 과자입니다.”

마을에서 장기 집권해 온 이장 박 씨는 도현이 건네는 과자 선물 세트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이런 걸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 애들이야 좋아하겠지만 서도.”

“괜찮습니다, 받으세요.”

“험, 뭐 그렇다면 고맙게 받아야지. 버릴 수도 없고.”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박 씨는 때마침 다가오는 손녀에게 손짓을 했다.

“고맙다고 인사해. 삼촌이 사 온 과자다.”

“고맙습니다!”

또랑또랑한 말투로 꾸벅 인사를 한 여섯 살 여자아이는 도현이 주는 과자 선물 세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동네 친구와 같이 풀어 헤쳤다.

갖가지 과자를 보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도현은 산을 올라갈 준비를 했다.

천으로 감싼 수련용 진검이 끼워진 배낭을 등에 멘 그는 오다가 구입한 쌀과 부식도 양어깨에 걸쳤다. 쌀만 해도 20킬로그램짜리 세 부대였고 자잘한 부식 등을 합하면 그 무게가 못해도 70에서 80킬로는 나가 보이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등과 어깨에 한 짐을 진 도현의 모습에 이장 박 씨는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그걸 들고 저 산으로 들어간다고?”

“예.”

“산속은 아직 눈이 안 녹고 그대로인데, 길도 험하고. 그 걸 메고 허 영감님 집에 가다간 힘들어서 쓰러질 텐데.”

“쉬엄쉬엄 가면 됩니다.”

“젊은 사람이 힘이 아주 장사네.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닙니다, 이장님.”

돌아선 도현은 마을 뒤편에 우뚝 서 있는 취영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리산의 산세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취영산은 높고 험했지만 허 할아버지 집까지의 길은 그래도 소로가 끊기지 않고 쭉 이어져 있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산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가는 도현의 뒷모습은 얼마 뒤 사라졌고, 마을 회관 앞에 서지철과 호태식이 쓱 나타났다.

차를 마을 도로가에 세워 두고 걸어서 온 그들은 도현이 산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서둘러 이장의 손녀에게 다가갔다.

“이 차 타고 온 아저씨하고 잘 아니?”

“누구세요?”

여섯 살 여자아이는 캐러멜을 씹으며 당돌하게 물었다.

“응? 우리? 외계인.”

호태식의 유치한 대답에 여자아이와 주변 아이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아저씨가 하도 대단해 보여서 그냥 물어본 거야.”

“저는 잘 몰라요. 옛날에 한번 왔던 아저씨예요.”

여자아이는 의심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그럼 저 아저씨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아마 산속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가는 걸 거예요.”

“왜?”

“몰라요. 얘들아 가자!”

여자아이는 친구들과 과자를 나눠 들고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잠깐만! 그 할아버지 집은 어디 있는데?”

다급히 묻는 서지철에게 여자아이는 고개를 좌우로 귀엽게 흔들었다.

“몰라요. 우리 할아버지가 이장이니까, 우리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세요.”

이장에게 굳이 물을 것도 없었다. 서지철은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에게 취영산에 사는 허 할아버지의 정보를 구해 왔다.

그들은 다시 마을 밖에 세워 둔 차로 돌아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가죠. 더 이상 뒤를 밟지 않아도 답이 나왔잖아요.”

호태식은 도현이 허 씨 노인 집에 머물며 산속에서 조용히 수련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괜히 의심했네.”

“안 돼.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겠어.”

수련은 핑계고 다른 일을 해 왔다고 의심을 품어 온 서지철은 여전히 보이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짐 싸 들고 가는 거 봤잖아요. 위장이라면 뭐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산을 가겠어요, 가볍게 배낭 하나 메고 가지. 가 볼 필요도 없어요. 백 관장은 진짜 수련하려고 온 거예요.”

“태식아, 산으로 들어가 보자.”

“형님.”

“몇 시간만 고생하면 된다. 가자.”

서지철의 고집을 호태식은 꺾을 수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