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디 임팩트 9권 15화
취영산을 오르며 서지철과 호태식은 눈길에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서지철이 추위로 빨갛게 된 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춘분이 지난 3월 하순이었지만 산속은 여전히 겨울 날씨였고, 지나가는 바람도 칼바람과 같아서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햇빛이 없는 그늘이 진 눈길을 걸어서 그런지 더욱 추웠다.
“그러게 길 따라서 가자고 했잖아요.”
호태식이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토해 냈다.
“그 길로 가면 우리가 훤히 드러나잖아. 녀석의 눈을 피하려면 어쩔 수가 없지.”
“지금 몇 시간째 헤매는 건지 아세요? 산속 해가 금방 지는 건 아시죠? 이러다 우리 얼어 죽습니다.”
서지철은 주변을 둘러봤다. 녹지 않는 눈과 많은 수목들만 보일 뿐, 애초에 그들이 찾아가려 했던 허 씨 노인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뭐 먹을 건 없냐?”
“우리가 등산 준비를 해 왔습니까!”
호태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식이 성질내기는. 등산복 입고 있기에 그냥 한번 물어 본 거야.”
추위를 견디며 산을 탔더니 체력 소모가 커서 배가 고파 힘이 하나도 없었다.
티격태격하며 취영산을 이루는 작은 산봉우리를 간신히 넘은 그들은 산등성을 타고 내려가다가 골짜기에 흐르는 계곡물을 발견했다.
한겨울에는 얼었을 물이지만, 지금은 그래도 얼지 않고 물길을 이루며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잘됐다. 물이라도 배부르게 마시자.”
산에 쌓인 눈을 입안에 넣고 갈증을 해소했지만, 찰랑이는 물을 마시는 것과는 또 기분이 다를 것 같았다.
허겁지겁 물을 마신 그들은 눈밭에 등을 대고 누워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춥고 배고팠다.
“한숨 자고 싶다.”
“영원히 잠들고 싶으면 그러십시오.”
일어선 호태식이 손을 내밀자 서지철이 억지로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게 교통사고로 몸도 아직 정상이 아닌 사람이 왜 산을 타자고 그래요?”
“이 산을 쉽게 봐서 그랬지. 들어와서 보니 생각보다 깊네.”
“아무튼 이제 허 씨 노인 집 찾는 건 포기하고 산을 내려가자고요. 해가 벌써 많이 졌어요.”
“그러자.”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하던 서지철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너도 들었지?”
“개가 짖는 것 같은데요.”
“근처에 허 씨 노인 집이 있는 게 분명해. 가 보자.”
호태식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내려가면 서지철은 내일 혼자서라도 올라올 사람이었다. 힘들더라도 가서 확실히 매듭을 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쌓인 눈을 헤치며 골짜기를 넘어가자 널따란 공터에 지어진 황토 집이 보였다. 굴뚝에서는 모락모락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마당에는 개 몇 마리가 보였다.
“찾았다!”
나무 뒤에 숨은 그들은 각기 품 안에서 꺼낸 작은 망원경으로 허 씨 노인의 집을 자세히 살폈다. 그들이 있는 곳이 경사가 높아서 가리는 것 없이 아주 잘 보였다.
“이 자식 안 보이지?”
망원경으로 수십여 미터 떨어진 허 씨 집을 살피던 서지철이 물었다.
“예. 아니, 잠깐만요. 저기 나왔잖아요, 오른쪽 작은 방에서.”
서지철이 망원경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도복 차림의 도현이 검을 들고 방에서 나와 맨발로 마당에 섰다.
안방에서 나온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도현은 북동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너무 민첩해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그들은 그 움직임을 때때로 놓쳐야만 했다.
“귀신이 따로 없네. 와아, 저 달리는 모습 좀 봐.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
호태식이 감탄을 거듭할 때 서지철은 도현이 간 방향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형님, 어디 가요?”
“뭐 하러 가는지 확인해 봐야지.”
얼마 후 그들은 옷을 벗고 폭포수 밑에 들어가 있는 도현을 발견했다.
멀찍이서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훔쳐본 서지철은 질겁했다. 한겨울에 얼었던 물이 녹아 흐르는 폭포수는 잠시만 발을 담가도 견딜 수 없는 차가움을 전해 준다. 그런데 도현은 그 폭포수를 맞으며 부처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굉장한 정신력인데요.”
“음.”
“봤죠? 저런 식으로 극기를 통해 자신과 싸움을 하잖아요. 저게 수련하려고 들어온 게 아니면 뭐겠어요?”
호태식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조용한 산중이라 큰 소리로 말했다가는 도현이 들을 수도 있었다. 물론 폭포수 소리에 그건 불가능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형님, 눈 옵니다. 이제 다 확인했으니 빨리 내려가죠.”
해가 많이 기울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회색빛 하늘로 변한 하늘에선 봄을 시샘하는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동안 진짜 수련을 다녔다는 건가?”
서지철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그만 일어나요.”
호태식의 재촉에 엎드려 있던 서지철이 막 일어나려다 다시 엎드렸다. 도현이 폭포수에서 나와 검을 빼 들었기 때문이다.
“태식아, 잠깐만 보고 가자.”
“형님.”
“진짜 저놈이 그렇게 칼을 잘 쓰는지 보고 싶어서 그래.”
호태식은 인상을 쓰면서도 살짝 호기심이 생겼다. 그 역시 도현이 진검으로 검술을 펼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조금만 보죠.”
내려갈 때는 소로를 따라가면 됐기에 아까처럼 길을 잃을 염려도 없어서 약간은 지체해도 될 것 같았다.
함박눈을 맞으며 망원경을 통해 도현의 검술을 훔쳐보던 둘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도현이 휘두르는 검에 함박눈이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때때로 천둥치는 소리가 나며 멀리 있는 그들의 귀까지 우르릉거리는 묵직한 검명이 들리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도현이 나무를 박차고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떨어지며 환상적인 검술을 펼치고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그가 횡으로 검을 휘두르자 폭포수가 반으로 잘리며 잠시 멈춰 서는 기이한 현상까지 벌어졌다.
“세상에! 지금 내가 헛것을 본 건가? 물이 잘리다니.”
“둘이 똑같이 봤다면 헛것이 아니죠.”
호태식은 자신이 잘못 보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서지철과 함께 도현을 공격하려고 했다면 저 검에 목이 달아났을 거다.
“허공으로 몇 미터를 뛰어오른 거야? 저게 가능해?”
“제가 말했죠, 백 관장 진짜 무서운 사람이라고. 인간이 아니라니까요.”
서지철과 호태식은 대화를 나누다가 도현이 갑자기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얼른 몸을 숙였다.
“제발 눈치채지 마라, 제발.”
서지철은 도현의 검술에 이미 혼이 달아날 만큼 충격을 받아서 그와 싸운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검을 든 도현이 천천히 그들이 있는 경사진 곳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우릴 죽일지도 몰라.’
숨을 꾹 참은 그들은 미동도 못 하고 다가오는 도현의 모습을 보며 공포에 휩싸였다. 머릿속으로는 도망치다가 도현의 검에 팔다리가 잘리는 생각도 했다.
‘죽이지는 않을 거야. 백 관장은 나를 좋아하니까.’
호태식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고, 도현이 바위를 훌쩍 뛰어넘어 그들과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야말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산토끼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를 밟고 뛰쳐나갔다.
“토끼였나?”
걸음을 멈춘 도현은 저만치 뛰어가는 토끼를 잠시 바라보다가 서지철과 호태식이 숨어 있는 곳을 힐끔 쳐다봤다.
서지철과 호태식은 서로 손을 꽉 잡고서 살려 달라고 기도를 했고, 그 기도가 통했는지 도현은 다시 폭포로 내려갔다.
벗어 놓은 도복을 걸쳐 입은 도현이 함박눈을 맞으며 순식간에 멀어져 갔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긴장된 순간을 맞았던 둘은 참았던 숨을 토하며 그대로 축 늘어졌다.
잠깐 사이에 그들이 느낀 심리적 압박감은 대단해서 전신이 나른했다.
얼굴에 떨어지는 함박눈을 그대로 맞으며 한동안 말이 없던 그들은 천천히 일어났다.
“수련하려고 온 게 맞죠?”
“그런 거 같다.”
조금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지철이 대꾸했다.
“백 관장 뒷조사한 자료를 의뢰인에게 줄 겁니까?”
“이미 받은 돈도 썼고, 프로 해결사로서 약속은 지켜야지. 내가 아니더라도 또 누군가를 고용해 똑같은 뒷조사를 시킬 테니까.”
둘은 말없이 소로를 따라 산 아래로 향했다.
해는 졌고 눈은 쏟아져 그들의 머리와 어깨에는 눈이 수북이 쌓였다. 뒤늦게 내리는 3월의 폭설이었다.
작은 손전등으로 산길을 비추며 내려가던 호태식이 입을 뗐다.
“사실, 백 관장이 돈이 어디서 나 빌딩을 매입했는지 저는 관심 없어요. 그가 킬러든 아니든 그것도 상관없고요. 그저 호검술 도장에서 검을 배우는 게 좋다는 것뿐이죠.”
“열심히 배워라.”
“적당히 마무리하고 뒷조사 자료 넘기세요. 오늘 본 백 관장의 놀라운 모습은 숨기시고요.”
“말을 해도 누가 믿겠냐, 보지 않은 이상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낸 서지철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내려가는 길에 백 관장 차에 설치해 놓은 GPS 추적 장치 제거하자.”
“마을까지 가기 전에 우리 얼어 죽을 수도 있어요.”
“무지하게 춥네, 후우.”
삐딱하게 담배를 입에 문 서지철은 코트 깃을 목에 바싹 가져다 붙였다.
구덩이
전날 내린 폭설로 취영산은 다시 한겨울로 돌아간 듯 온통 하얗게 변했다.
도현은 쫓아오는 개들과 장난을 치며 허 할아버지의 집 주변에 쌓인 적지 않은 눈들을 깨끗이 치웠다.
‘욕심은 시야를 좁게 한다.’
도현은 무허와 태선군의 검술을 보고 느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취영산에서 검술의 경지를 높이기 위해 들어왔지만, 스스로의 마음 상태를 경계했다.
마음이 앞선 수련은 늪에 몸을 던지는 어리석은 행동과 같아서 자칫하면 영영 그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검이 영원히 정체되는 것이다.
그가 작년에 깨달음을 얻은 것은 여유 속에 자신을 한번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풍선을 터트리는 데는 큰 칼이 필요 없다. 작은 압정 하나면 될 뿐.’
세상과 거의 단절된 조용한 이 산속에서 그가 추구할 것은 마음으로 빚은 압정 하나.
곧 마음으로 만든 검이다.
그 검이 완성되면 검선문의 검술과 심득을 터득한 태선군의 검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을 치운 도현은 폭포로 가서 하루 종일 떨어지는 물만 바라보았고, 그렇게 3일을 보내던 중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도현 씨!”
바위 위에 앉아 물끄러미 폭포 물을 바라보던 도현이 그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목도리를 한 홍영이 서 있었다.
“홍영 씨.”
홍영을 보고 반갑기는 했지만 입산한 지 며칠 안 돼 홍영이 자기를 찾아오자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도현은 걱정이 됐다.
“도장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숀에게 연락이 와서 찾아온 거예요.”
홍영이 웃으며 답했다.
“숀요?”
상해에서 이메일을 보낸 후 숀에게 다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도현은 예정대로 취영산으로 입산을 했다. 그런데 숀이 뒤늦게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그 사람이 보낸 이메일이에요.”
홍영은 품 안에서 프린트해 온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도현이 읽어 보니 영국 런던의 한 카페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만날 날짜는 오늘 기준으로 8일 뒤였다.
“만날 거죠?”
홍영의 물음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어요. 홍영 씨, 미안한데 런던행 비행기 티켓 좀 예매해 주세요.”
“나랑 같이 안 내려갈 거예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잖아요. 며칠만 더 수련하고 서울로 갈게요.”
도현이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
“할 수 없죠. 비행기 티켓 예매도 하고 호텔도 예약해 놓을게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홍영은 폭포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용주 씨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장난일 수도 있다고.”
도현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비싼 커피를 한잔 마시고 오는 셈 치죠.”
비행기를 타고 영국까지 간 도현이 홀로 쓸쓸히 런던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던 홍영은 도현을 따라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상상만으로도 재밌어서 자꾸 웃음이 나와요.”
“내려가요.”
도현이 검을 챙겨 앞서 걸어갔다.
“여기 찾아오기 어렵지 않았어요?”
“약도도 있었고, 동네에서 물어보니까 쉽게 알려 주던데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요?”
“만났어요. 좋으신 분들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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