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디 임팩트 9권 17화
얼마 전 상해에서 료쿄와 대화를 나누던 주성하를 가까이서 본 도현은 그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누군데 다짜고짜 살수를 쓰는 거지?”
도현은 바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주성하에게 걸어갔다.
“…….”
주성하는 도현이 걸어오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며 황급히 뒤로 도망쳤다.
“도망가면 발목을 자르겠다!”
도현의 무시무시한 엄포에 주성하는 등에 식은땀이 쫘악 흘러내렸다. 왠지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순간, 료쿄가 선녀처럼 훨훨 날아서 그의 머리를 뛰어넘어 뒤를 보호했다.
“검을 제법 사용할 줄 아는구나!”
료쿄는 말과 달리 신중한 눈빛으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도현을 공격했다. 단 한 수에 주성하를 날려 버린 도현이 상상외의 고수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도현은 그녀의 검술을 막아 내며 어리둥절해졌다. 몇 번 검을 섞어 보니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여자가 왜 여기에?’
뒤로 재주를 넘으며 료쿄의 검을 피한 그는 근처에 서 있는 주성하를 힐끗 쳐다봤다.
‘저자는 주성하가 확실할 테고. 대체 이들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상해에서의 일을 눈치채고 추적해 온 건가? 아니야, 그랬다면 더 많은 인원이 몰려왔겠지, 태선군이 왔든지.’
도현은 료쿄의 검을 방어하면서 폭포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조용한 걸 보니 또 다른 자들은 없는 것 같았다.
‘잡아서 확인을 해 보자.’
방어만 하던 도현의 검이 공세적으로 변하자 료쿄는 손발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변화와 빠르기, 검에 실린 힘, 임기응변. 도저히 도현을 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어찌 된 거지? 주 사제 말과 너무 다르잖아.’
힘이 부친 그녀는 어렵게 도현의 검을 막아 내다가 왼손으로 벼락같은 장풍을 사용했다.
‘그자가 썼던 수법을 따라 하게 될 줄이야.’
료쿄는 일전에 복면인이 방상을 상대로 기습적으로 사용한 왼손 장풍 공격을 생각해 내고는 기회를 보다 똑같이 사용했다.
하지만 그 복면인은 도현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왼손을 가볍게 밀었다. 그가 날린 장풍에 료쿄의 장풍이 힘없이 사라졌고, 놀란 그녀의 뺨을 도현의 발등이 스치듯 지나갔다.
“아악!”
팽이처럼 회전하며 날아간 그녀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얼굴이 부어오른 그녀는 고개를 획 돌리며 도현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그녀의 마스크는 벗겨진 상태였다.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도현의 검이 그녀의 검을 교묘히 밀어내며 손목을 타고 올라가다가 목울대 앞에서 멈춰 섰다.
“죽여라!”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콰아앙.
도현의 주먹에 복부를 얻어맞은 료쿄가 구역질을 하며 몸을 숙였다.
“죽고 싶다면 정말 죽여 줄 수도 있다는 뜻이야!”
퍼억.
검처럼 빠른 도현의 발길질에 이마를 걷어차인 료쿄는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충격 속에 그대로 기절을 해 버렸다.
그때 합공을 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주성하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개자식, 죽어라!”
믿었던 료쿄가 패하자 두려움과 분함에 이성을 상실한 주성하였다. 이대로 도망을 간다 해도 도현의 손에 붙잡힐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주성하는 나름 멋지게 팔사형 방상과 같이 익힌 성검술을 펼쳤지만 결과는 싱거웠다. 허무하게 검을 빼앗긴 채 도현에게 실컷 얻어맞다가 끝내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료쿄와 주성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들 앞에 커다란 구덩이 두 개가 생긴 뒤였다.
“일어났어?”
도현은 손에 든 곡괭이를 내려놓으며 흰 이를 보이고 씨익 웃었다. 어둑어둑해지는 산중에 구덩이를 파 놓고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딘지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너희들 때문에 땀을 좀 뺐어. 땅이 얼어서 말이야, 파는 데 힘이 좀 들었거든.”
“뭐 하는 거지?”
료쿄가 날카롭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일어서고 싶었지만 발목부터 어깨까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너희들 묻으려고.”
“미친 자식!”
주성하는 발버둥을 치다가 도현이 휘두른 곡괭이 자루에 어깨를 얻어맞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편하게 죽고 싶으면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주성하.”
“내 이름을 네가 어떻게?”
“너희들이 기절했을 때 내가 몸수색을 좀 했지.”
도현은 주성하의 지갑을 오른쪽 구덩이에 집어 던졌다.
“이건 네놈 무덤이고. 다음은 유키히로 료쿄. 너는 이쪽 무덤이야.”
료쿄의 신분증이 든 지갑을 남은 구덩이에 던져 넣은 도현은 크게 기지개를 폈다.
“아이고 힘들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지.”
그는 주성하와 료쿄를 번쩍 들어서 구덩이에 짐짝처럼 던져 넣었다.
“주성하 너 먼저 묻어 주지.”
도현이 곡괭이로 흙과 돌을 밀어 넣자 주성하가 다급히 외쳤다.
“좋다! 그만 수작 부리고 원하는 걸 말해!”
“무슨 소리지?”
“흥!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질문을 할 거잖아? 안 그런가? 힘 빼지 말고 신사적으로 얘기하자는 거야.”
“착각을 하는군.”
도현이 구덩이 안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주성하에게 흙을 한 움큼 뿌렸다.
입에 들어간 흙을 뱉어 내며 주성하가 다시 말했다.
“네놈 속셈 다 알고 있다니까!”
“입 닥치고 있어. 입에 흙 들어가잖아.”
도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흙을 왕창 밀어 넣었다.
“백도현, 나를 죽이면 네놈도 무사치 못할 거다!”
“걱정해 줘서 고맙군.”
금세 구덩이가 메워져서 주성하의 어깨까지 흙이 찼다. 주성하는 서서히 죽음이 실감나서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네놈들이 뭘 하려고 했던 난 궁금하지 않아, 다음번에도 네놈들 같은 녀석이 나타나면 똑같이 죽여 주면 되니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도현의 무심한 태도에 주성하는 혀가 굳었다. 생각해 보니 도현의 무위는 상상 밖으로 강해서 그는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내가 어디 소속인 줄 아나? 바로 검선문이다! 네 아버지를 죽인 태선군이 문주로 있는 곳! 태선군이 바로 내 사부님이시다!”
“…….”
도현은 남은 흙을 마저 밀어 넣으려다가 멈칫했다.
도현이 반응을 보이자 주성하가 빠르게 소리쳤다.
“네가 작년에 등선궁에 왔다 간 사실을 알고 있다. 그때 우리 사부님을 봤다면 느끼는 게 있을 거다. 그분은 상상할 수도 없이 강해. 네가 아무리 고수가 됐다 하더라도 넌 우리 사부님을 이기지 못해!”
“그렇군.”
도현은 다시 흙을 밀어 넣기 시작했고, 주성하는 어깨에 이어 얼굴 부근까지 흙이 차올랐다.
“미친 인간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봐! 내가 네 원수를 갚는 걸 도와줄 수도 있잖아!”
“주 사제, 그만해!”
지금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료쿄가 싸늘한 어투로 소리쳤다.
“사내답게 당당히 죽어! 사문을 배신할 생각 말고!”
“구사저, 배신할 사문이 지금 남아 있습니까? 사형제들은 온통 자기들 욕심 채울 궁리만 하고 있고, 사부님은 문주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 없이 제자들을 언제까지고 부려 먹을 생각만 하시잖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죽어도 누구 하나 눈이나 깜빡이겠습니까? 죽은 오사형을 보십시오, 개죽음입니다!”
울분이 섞인 주성하의 외침에 료쿄는 잠잠해졌다.
“백도현, 나와 거래를 하자! 우리를 살려 주면 우리가 내부에서 너의 편이 돼 주겠다!”
“음.”
도현은 흙을 더 이상 밀어 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끼었다.
말없이 내려다보는 그의 서늘한 눈빛에 주성하는 긴장이 고조되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태선군이 지시해서 온 것 같지는 않고, 왜 날 죽이려고 했지?”
“김탁훈 때문이다.”
“김탁훈?”
“네 연인인 홍영의 전 남자 친구.”
도현이 주성하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놈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아니야. 말 함부로 하지 마.”
마치 용의 역린을 건드린 듯 화를 내는 도현의 행동에 주성하는 급히 소리쳤다.
“미, 미안하다. 그놈이 그런 말을 해서 말한 것뿐이야.”
“그가 어떻게 너희들과 연관이 되었지?”
도현이 주성하의 머리에서 발을 떼며 차갑게 물었다.
주성하는 베스트엠과 서림이 토지 문제로 홍콩에서 협상 테이블을 가졌고, 그 와중에 김탁훈을 차후에 이용하기 위해서 둘째 사형인 섭상이 김탁훈을 도와주라고 한 사실을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김탁훈이 날 죽이라고 요구했단 말이지?”
도현의 눈치를 보던 주성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도현의 기세를 보니 이대로 산을 내려가서 김탁훈을 때려죽일 듯했다.
김탁훈이 죽으면 섭상이 어찌 된 일인지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여기서 살아 나가도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은 몇 달간 입원할 부상만 입히라고 했다. 하지만 난 손을 보면 확실히 하는 성격이라서…… 미안하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료쿄를 내려다봤다.
“지금까지의 그의 말이 사실인가?”
료쿄는 콧방귀를 뀌며 침묵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거짓인가 보군.”
도현은 흙을 단숨에 밀어 넣었다. 주성하의 입 주변까지 금세 흙이 채워졌다. 마음이 급해진 주성하가 목청을 높였다.
“구사저, 왜 이리 바보같이 행동합니까! 정말 여기서 다 죽어야겠습니까? 검에 대한 열망보다 한갓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까? 구사저!”
주성하의 마지막 말이 료쿄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녀의 입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만해! 그의 말은 다 사실이니까!”
도현의 동작이 멈췄다. 입이 흙에 파묻히는 상황을 가까스로 면한 주성하는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하아, 하아, 그만 우릴 풀어 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무, 무슨 소리야. 우리가 널 돕는다고, 당신 아버지 복수하는 걸.”
“글쎄,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을까? 넌 아직도 내게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무슨 소리야!”
“주성하, 영악한 놈. 왜 홍콩에서 날 본 사실은 꽁꽁 숨기고 있지?”
도현의 차가운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와 주성하의 두 눈에 꽂혔다.
“내가 널 잊은 줄 알았나? 기예잡술서를 훔치러 왔다가 나와 싸우지 않았나?”
“그, 그건.”
“마지막 기회다. 내 신뢰를 얻어 봐, 당장.”
도현의 눈을 올려다보던 주성하는 갈등 끝에 입을 열었다.
“구사저, 아무래도 말을 해야겠습니다.”
“좋을 대로 해.”
료쿄의 대답을 들은 주성하는 도현에게 원 말 명 초 시기에 활약하다 은거한 그 시대 제일의 고수 담기량에 관해 설명을 했다.
도현은 처음 듣는 옛 무인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담기량의 은거지로 가는 지도가 기예잡술서 안에 있었다는 말이지?”
“그래.”
“놀라운 이야기군.”
“너도 무공을 익혔으니 욕심이 있을 거다. 이렇게 하지, 우릴 풀어 주면 우리는 네 편이 되어 네가 복수를 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 그뿐만 아니라 담기량의 무공과 그가 남긴 심득, 영단 등을 찾으면 여기 구사저와 나, 그리고 너, 셋이 공평하게 나누는 거다. 사부를 이기기 위해서는 너도 더 강해져야 하잖아.”
도현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주성하를 응시했다.
‘내부에 이들이 있으면 한결 편해지기는 할 거야. 태선군을 없애더라도 남은 제자들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볼 수도 있고. 게다가 담기량의 무공이라…….’
그가 남긴 상승 무공과 심득이 어떤지 호기심이 강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주성하와 료쿄를 믿어도 될지에 대해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현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고, 주변은 폭포수 소리만 나직이 들려왔다.
시간이 흘러 주성하의 초조한 눈빛이 불안감으로 점점 굳어질 즘 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난 손에 적지 않은 피를 묻혔다. 너희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손에 너희들 피를 조금 더 묻힌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태선군이다. 내 앞에 서지 마라.”
단호한 어조로 말을 한 도현은 주성하를 흙구덩이 속에서 꺼내 주었다.
“믿어 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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