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디 임팩트 9권 18화
죽다 살아난 주성하가 지친 음색으로 말했다.
“너희들을 온전히 믿는다고 생각하지 마.”
도현이 검을 휘둘러 묶인 줄을 끊어 냈다.
“구사저를 풀어 줘도 되겠지?”
주성하가 료쿄를 가리키며 묻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료쿄는 몸이 자유로워지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주워 들고 도현을 차갑게 노려봤다.
“약속은 지키겠다. 하지만 언제고 널 내 검으로 쓰러트리겠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면 당신의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 주지.”
“한 가지만 묻겠다. 얼마 전 상해에서 우리 사형제들을 상대하고 간 복면인이 있었다. 당신이지?”
도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주성하를 힐끔 쳐다보다가 인정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어느 정도 강한지 인식을 시켜 줘야 주성하 같은 인물은 딴생각을 안 할 것이다.
“맞아, 그때 당신의 보검을 상대하느라 방상의 검을 망가트려 놨었지.”
주성하는 도현이 생각보다 엄청난 고수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놀랐다.
‘홍콩에서 본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그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거지?’
주성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를 하겠다. 만약 날 배신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희들만큼은 죽여 버리겠다.”
도현의 패도적인 살기에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던 료쿄마저도 가슴이 떨려 왔다.
도현을 따라 폭포에서 내려온 주성하와 료쿄는 힘없이 산 아래로 내려가다가 도현이 부르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날도 어두워졌는데 와서 밥이나 먹고 가.”
“필요 없어.”
돌아서던 료쿄의 손을 주성하가 붙잡았다.
“구사저, 이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합시다. 아닌 말로 저 사람은 필요할 때 우리를 도와줄 수도 있는 인물 아닙니까?”
“…….”
“구사저.”
료쿄는 팔짱을 끼고 저만치서 보고 있는 도현을 노려보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하하하, 잘 생각했습니다, 구사저. 마침 나도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거든요.”
료쿄와 함께 도현에게 걸어간 주성하가 웃으며 말했다.
“백 형, 고맙소. 우리 밥도 먹고, 술도 마십시다. 깊은 산중에 사는 노인들이라도 술은 있겠지.”
“어르신들에게 무례하지 마라.”
도현은 얻어터지고 흙이 잔뜩 묻은 주성하와 료쿄를 데리고 노부부의 집으로 향했다.
“그 사람들은 누군가?”
도현이 낯선 남녀를 집으로 데리고 오자 개밥을 주던 허진국이 물었다.
“아는 사람들인데요. 절 찾아오다가 산을 헤맸어요.”
“그래? 길만 따라 쭉 올라오면 되는데 왜 산을 헤맸을꼬?”
“우리나 길이 쉽지 외지 사람은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부엌에서 나오던 황순옥 할머니가 말했다.
“인사해.”
도현이 중국어로 말하자 어두운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던 료쿄와 주성하가 어색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어눌한 한국어로 인사하는 그들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허진국이 껄껄 웃었다.
“중국 사람들인가?”
“여자는 일본인이에요.”
“근데 왜 저렇게 옷이며 얼굴이 엉망이야? 산에서 굴러떨어지기라도 한 거야?”
“산에 눈이 많아서 고생을 좀 했다고 합니다.”
“조심했어야지. 아무튼 씻고 들어가. 저녁이나 함께 먹자고.”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잠시 후 그들은 작은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함께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밥에 김치와 나물 반찬 몇 가지, 된장찌개가 전부였지만 주성하와 료쿄는 보는 사람이 흐뭇할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황순옥이 자신의 밥까지 덜어 줄 정도였다.
그 행동에 료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가 맞은편의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사실 그녀는 배가 고프긴 했지만 반찬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맛없게 먹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도현의 은근한 위협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맛있게 밥을 먹은 것이다.
주성하는 도현과 료쿄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 먹는 데만 집중했다.
“아니, 그런데 곡괭이는 아까 왜 가지고 올라간 거야?”
허진국이 따뜻한 숭늉을 마시며 물었다.
“좀 쓸데가 있어서요.”
웃으며 대답을 한 도현은 식사를 마친 료쿄와 주성하를 가볍게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조금 있다가 산을 내려가야 될 것 같아요.”
“아니, 깜깜해졌는데 산을 내려가겠다고?”
도현이 갑자기 하산하겠다고 하자 놀란 허진국과 황순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험하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제가 밤눈이 보통 밝아야죠.”
“가려면 어제 그 색시하고 같이 내려가지 그랬어? 혼자 내려가는 모습이 영 안쓰럽던데.”
도현은 홍영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됐네요.”
주성하와 료쿄는 그 무섭던 도현이 부드러운 얼굴로 허진국과 황순옥을 대하는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도현이 파 놓은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될 뻔했었다.
‘무서운 놈. 철저히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있어.’
생각이 많은 주성하는 숭늉을 마시며 도현의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방을 나온 도현은 짐을 챙겨 마당에 섰다.
“또 오겠습니다. 그동안 건강하십시오.”
노부부에게 작별 인사를 한 도현은 말없이 서 있던 료쿄와 주성하를 데리고 산 아래로 향했다.
집이 멀어지자 도현이 료쿄와 주성하에게 말했다.
“난 말이야,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잘못되는 게 싫어. 그것도 나 때문에. 잘 기억해. 만약에 내 주변 사람들이 너희 검선문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면 무조건 난 너희들을 찾아갈 거다.”
“뭐라고? 이봐요 백 형,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왜 우리를 찾는다는 겁니까?”
주성하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료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와 협력하기로 했으면 그 정도 책임은 져야 하지 않나? 그 정도 책임감도 없이 어떻게 검선문 내에서 나를 돕는다는 거지?”
걸음을 늦춘 도현이 왼편에서 걷는 주성하와 료쿄를 차갑게 응시했다.
“감당할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
주성하와 료쿄는 한동안 시선을 교환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그들이 동의하자 다시 길을 걸었다. 구불구불 눈이 깔린 경사진 소로를 따라 걷던 도현은 료쿄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주성하를 불렀다.
“당신이 돈을 주고 고용했다는 한국인 해결사와 만나야겠어.”
“그는 왜?”
주성하는 혹시 뒷조사를 당한 백도현이 그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어 물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서지철은 콧물을 닦으며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역시 일을 잘해 줬더니 바로 소문이 나는군.’
주성하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연락을 했다는 의문의 사내를 만나기 위해 그는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급한 일인가? 새벽에 만나자는 의뢰인은 오랜만인데.’
강남의 한 일식집에 도착한 그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다다미방 스타일의 룸 안으로 들어갔다.
간결하게 차려진 술상 앞에는 그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경남 함양에서 밤늦게 올라온 도현이었다.
“다, 당신은!”
도현을 보고 놀란 서지철은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왜 이자가 여기에?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뒤로 손을 뻗어 닫혀 있는 문을 열고 도망가려 했다. 뒷조사를 의뢰한 주성하가 허튼짓을 하다가 필시 도현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받은 뒤, 자신의 존재를 발설한 것 같았다.
“앉으세요.”
“…….”
“문 열고 도망가기 전에 이 젓가락이 당신을 꿰뚫을 겁니다.”
쉬익 소리와 함께 도현이 집어 던진 젓가락 하나가 목재로 된 문을 뚫고 박혔다.
반이나 박힌 젓가락 끝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은 서지철에게 전염되어 그의 몸도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원래 강단이 있는 서지철이었지만, 도현의 앞에서는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앉으세요.”
도현이 같은 말을 반복하자 서지철은 뻣뻣한 움직임으로 간신히 몇 걸음 걸어 술상 앞에 앉았다.
“편하게 앉아요.”
“아, 아닙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방석 위에 무릎 꿇고 앉은 서지철의 대답 소리는 엷게 떨리고 있었다.
“술 드시겠습니까?”
도현이 술 주전자를 들어 올리자 서지철은 얼른 술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내 뒷조사를 했다고요?”
술을 따르며 도현이 넌지시 묻자 서지철은 긴장감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죄송합니다. 직업일 뿐, 관장님께 원한은 전혀 없습니다. 살려 주시면 관장님 주변에는 얼씬도 안 하겠습니다.”
“술 드세요.”
도현의 손짓에 서지철은 흰 술잔에 가득 찬 술을 단번에 마셨다.
“내가 여기 있어서 상당히 놀랐을 겁니다.”
도현이 다시 술 주전자를 들자 서지철이 알아서 얼른 술잔을 내밀었다.
“당신 때문에 하마터면 내가 곤란해질 뻔했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졌습니다.”
“드세요.”
도현의 손짓에 서지철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옆에 쌓아 놓은 자료가 뭔지 압니까?”
도현의 말에 서지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술상의 빈 공간에 쌓여 있는 건 그가 주성하에게 준 백도현의 뒷조사 자료들이었다.
그는 급하게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게 의뢰를 한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건 전 그 일과는 무관합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중년의 남자일 뿐입니다.”
서지철은 말을 하며 쿨럭거렸다.
“몸이 약해서 감기에 걸리면 이렇게 며칠씩이나 갑니다.”
“어떻게 죽고 싶습니까?”
도현이 젓가락을 들자 불쌍한 척하던 서지철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갔다.
“관장님, 살려 주십시오!”
서지철은 취영산에서 목격한 도현의 놀라운 능력을 상기하며 자신이 여기서 반항을 해 봐야 소용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자신이 살길은 오로지 무심한 눈빛으로 술상에 앉아 있는 도현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나쁜 짓을 했지만 죽을죄는 아니잖습니까? 차라리 제게 분풀이를 원 없이 하시고, 살려만 주십시오!”
도현은 술잔을 비우고 한동안 서지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부검 자료는 어디서 구했습니까?”
“경찰 인맥을 통해서…….”
“여기 내 가족사를 보면 나도 모르는 것도 있던데.”
“전부 발로 뛰어서 인터뷰하고 녹취를 한 겁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까? 이 일에 즐거움이 있습니까?”
도현이 말을 하며 손바닥으로 술상 위의 자료들을 내리쳤다.
술상이 들썩이는 큰 소리에 서지철의 긴장감이 더욱 높아졌다.
“얼굴 들고 날 똑바로 보세요.”
서지철은 술상에 뒀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서 도현을 쳐다봤다.
“우리 처음 만난 게 아니죠?”
“예에?”
서지철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아까부터 그 일이 걸렸었는데 기어이 도현이 생각해 낸 것 같았다.
“작년에 당신은 도장을 뒤지다 내게 걸려서 혼이 난 적이 있어요. 안 그래요? 그땐 내가 좀도둑으로 알고 불쌍해서 보내 줬는데, 알고 보니…… 그때도 다른 목적으로 왔었던 거군요.”
“과, 관장님, 그건.”
당황한 서지철이 핑계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똑바로 말해!”
도현이 젓가락을 찌르자 사기로 만든 술 주전자에 젓가락이 뚫고 들어갔다.
나무를 가공해 만든 고급 젓가락이 사기 주전자에 꽂혔지만 술은 새지도, 그렇다고 사기가 갈라지거나 깨지지도 않았다. 원래 젓가락과 한 몸인 듯 술 주전자는 술은 품은 채 이상이 없었다.
“으으.”
놀라운 도현의 솜씨에 또 한 번 놀란 서지철은 입으로 낮은 신음을 흘렸다.
머릿속에 호태식이 경고했던 여러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백 관장 위험한 인물이니까 포기하세요. 그러다 진짜 죽어요.
-큰누나가 백 관장 사진을 보더니 입술이 파래지면서 겁을 냈어요. 이승과 저승을 오간 사람이라고요.
-해결사 약력에 오점이 좀 생기면 어때요. 무슨 의미가 있다고.
‘빌어먹을.’
눈을 감고 속으로 후회를 하던 서지철은 발목에 감춰 둔 칼을 사용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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