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디 임팩트 9권 20화
서지철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한 장씩 받은 용주와 홍영은 5층 도장으로 올라갔고, 관장실에는 도현과 서지철만 남았다.
“천만 원입니다. 나머지 반은 3개월이 되는 달에 지불하죠.”
도현이 수표가 든 봉투를 내밀자 서지철은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품 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3개월 뒤에 연장을 하실 때는 금액이 대폭 상승될 겁니다. 프로 해결사인 제가 벌어들이는 평균 수입이 있기 때문이니 불쾌하게 생각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때 가서 보도록 하죠. 연장할지 안 할지는 아직 결정된 게 없으니까요.”
3개월에 2천만 원은 사실상 큰 금액이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달랐다. 한 달에 7백만 원이 안되는 금액인데, 밤낮없이 도장 주변을 살피며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업무를 고려해 보면 프로 해결사인 서지철 입장에서는 시간은 많이 잡아먹고 돈은 다른 일에 비해 적었다. 도현이 쿨하게 과거 일을 덮고 지나가지 않았다면, 서지철은 그 금액에는 절대 일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연락할 일이 생기면 내게 먼저 해 주시고, 만약에 연락이 안 되면 용주와 홍영 씨에게 연락을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홍영이 따라 주고 간 차를 한 모금 한 서지철은 궁금했던 것을 슬쩍 물었다.
“저어, 그런데 앞선 제 의뢰인은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미스터 주 말입니까?”
“예.”
“조용히 처리했습니다.”
도현의 대답에 서지철이 쿨럭거렸다.
‘설마 죽였다는 건가?’
그가 오해를 할 때 도현이 뒷말을 이었다.
“서 팀장님처럼 이렇게 마주 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사이가 됐다는 뜻입니다.”
“아, 그렇군요.”
서지철은 대답을 하며 새삼스럽게 도현을 쳐다봤다. 뒷조사를 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보통 뒷조사 대상과는 좋은 감정이 아니다. 주성하 역시 마찬가지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과 차를 마실 정도로 가까워졌는지 궁금해졌다.
‘힘으로 굴복시켰나?’
공중으로 수 미터나 점프를 하고 나무젓가락으로 문과 사기 주전자에 구멍을 내고, 흘러내리는 폭포수를 검으로 잘라버리는 특별한 능력의 도현이라면 무슨 짓이든 해서 그렇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야.’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댄 호태식은 주차장을 나와 편의점에 들렀다.
“얼마예요?”
도장 사람들에게 줄 음료수를 머릿수에 맞춰 넉넉하게 산 그는 그 자신이 먼저 하나를 시원하게 마신 후 밖으로 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꽃샘추위로 인해 쌀쌀했는데, 오늘은 날이 좀 풀려 낮부터 햇볕이 따뜻하니 좋았다. 저녁이 된 지금은 기온이 좀 떨어지긴 했어도 어제에 비하면 따뜻한 편이었다.
인도를 따라 호검술 도장을 향해 걸어가던 그는 분식집을 지나쳤다가 흠칫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내가 잘못 봤겠지?”
혼잣말을 하며 분식집 내부를 들여다보던 그는 살짝 인상을 썼다.
“아니, 저 형님이 또.”
분식집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떡라면을 먹고 있는 서지철 맞은편에 앉았다.
“형님.”
“왜?”
서지철은 라면을 입안에 크게 넣고 우물거렸다.
“여기서 뭐 하세요?”
“떡라면 먹는다. 요즘 하도 입맛이 없었는데, 요건 제법 괜찮네. 너도 하나 시켜 먹어.”
“도장에 가야죠, 곧 교육 시간인데.”
“아, 그렇지.”
서지철은 후루룩 소리를 내며 라면을 입안에 넣었다. 맛있게 먹는 그 모습이 어쩐지 짠하게 보여서 호태식은 화가 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형님, 여기서 뭐 하시냐고요.”
“이자식이! 왜 시비야, 라면 먹는다고, 자식아.”
“다른 데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서 먹어요.”
“미친놈이네 이거. 내가 어디서 떡라면 먹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래?”
“그날 산에서 내려오면서 우리 약속했잖아요, 백 관장 무서운 사람이니까 다시는 건들지 않기로. 그런데 형님 지금 모습 보면 그게 아니잖아요. 백 관장 감시하다가 배고프니까 와서 떡라면 먹는 거잖아요.”
그제부터 도장 주변을 살피며 일에 충실하고 있던 서지철은 공깃밥을 하나 시켜 밥을 말기 시작했다.
“형님, 정말 이러깁니까?”
“나 일하고 있다.”
서지철이 목소리를 낮췄다.
“일요?”
“호검술 도장 주변을 감시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어.”
“미치겠네, 정말. 제정신이에요! 그러다 정말 죽는다니까 그러네. 백 관장 검에 목이 잘리고 싶어요? 그때 봤으면서 정말.”
“백 관장이 한 의뢰야.”
자리에서 일어난 서지철이 계산을 하고 분식집을 나섰다.
“혀, 형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백 관장이 한 의뢰라니!”
“따라와.”
호태식은 서지철이 커피숍으로 들어가자 손목시계를 봤다. 저녁 교육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간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2층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서지철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재촉했다.
“빨리 말해 봐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며칠 전 새벽에 누가 일식집에서 만나자고 해서 가 봤더니 백 관장이 떡하니 앉아 있더라고.”
“예에?”
호태식의 눈이 커졌다.
“내가 딱 네 표정이었을 거다. 나도 어찌나 놀랐는지 죽을 뻔했다. 긴장도 되고.”
“그래서요?”
“이미 다 알고 왔더라고. 변명할 게 있어야지. 작년의 일도 들키고. 아무튼 위험해 보여서 이판사판으로 싸우려다가 네가 한 말이 생각나더라고, 백 관장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
커피가 나오자 잠시 말을 끊은 그는 티스푼으로 설탕을 녹인 후 커피를 한 모금했다. 그러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길 건너 도장 주변을 가볍게 훑어봤다.
“그래서 꾹 참았다. 솔직히 덤벼도 살 것 같지도 않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고는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고 했더니, 오히려 나를 고용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물론 의뢰금은 평소보다 훨씬 적게 받게 됐지만.”
“정말입니까?”
호태식은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냐.”
서지철은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가 도장 건물로 향하는 걸 지켜보며 답했다.
“어떤 의뢰인데요?”
“조금 전에 말했듯이 도장 주변을 감시하는 일이야. 수상한 자들이 얼쩡거리거나 나 같은 자들이 나타나는지 지켜봐달라는 거지.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은 안 해 주더라고.”
“백 관장과 과거 일을 깨끗이 털었으니 잘됐네요.”
호태식이 어딘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표정이 왜 그래?”
“제 얘기도 했습니까?”
“안 했어. 넌 검술 배우려고 간 거잖아, 나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죠. 저도 고백을 해야겠어요. 형님도 했는데 저도 해야죠.”
“넌 입 다물고 모른 척 앞으로도 계속 도장 다녀. 내가 혹시 도장에 들러도 나 알은척하지 말고. 얘기했다 괜히 불이익 받을 수도 있어.”
“할 겁니다. 그래야 진정한 호검술 관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창밖으로 도장 쪽을 응시하며 얘기를 해 오던 서지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홱 돌아봤다.
“하지 말라니까, 자식이. 백 관장은 어쩔지 모르겠는데, 그 조 사범 녀석은 분명히 널 싫어할 거야. 날 볼 때 얼마나 못마땅하게 쳐다봤는데.”
“조 사범이 그랬어요?”
“그래.”
용주는 호검술 2초식을 반복해서 수련하는 이호선과 김유진의 뒤를 돌아 호태식 곁에 섰다.
“오늘 무슨 일 있었습니까?”
“예?”
호태식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용주를 쳐다봤다.
“검 끝도 힘이 없고 자세가 자꾸 흐트러져서요. 평소에 이러지 않았잖아요. 걱정거리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도와줄게요.”
용주는 호심공을 통해 내공을 쌓고 검의 경지도 조금씩 더 깊어지면서 눈빛이 날이 갈수록 범상치 않았다. 평상시에는 장난스러운 눈빛이지만 사범으로서 교육을 할 때에는 그 진면목이 드러나서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태식은 용주의 그 눈빛을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자 문제예요.”
“아, 그렇군요. 그럼 이따가 끝나고 술 한잔할까요? 나이는 제가 호태식 씨보다 어리지만 여자 심리는 제법 잘 알거든요.”
귓속말로 용주가 슬쩍 하는 말에 호태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사범님.”
“부끄러워하시기는.”
용주가 호태식을 지나쳐 도장 한쪽에서 검을 수련하는 장철호에게 걸어갔다.
“철호 형, 저랑 내기할래요?”
“무슨 내기?”
“도현이가 내일 영국 가잖아요. 가서 그 숀이라는 사람을 만날지 못 만날지 맞히는 내기요.”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일찍 영국에 가서 잠을 자고 그다음 날 숀을 만나기로 계획을 잡은 도현은 내일 낮 비행기를 타고 영국 런던으로 갈 예정이었다.
“너는 어느 쪽인데?”
장철호가 검을 거두며 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숀이 안 나온다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숀이라는 사기꾼이 펼쳐 놓은 그물에 걸려들어서 안 갈 수가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지만, 결과는 그리 낙관적이지 못해요.”
“그럼 나는 반대로 해야겠군.”
“이마에 딱밤 맞기 하죠. 다섯 대.”
“흐음.”
돈 내기가 아니라 맞는 내기를 하자 장철호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내가 먼저 선택하면 안 될까?”
“형이요?”
“숀이 안 나온다에 딱 밤 다섯 대. 반대로 할 거면 하고 안 할 거면 내기는 없다.”
“그래요? 알았어요. 그럼 나는 숀이 나온다에 걸죠. 사실은 숀이 나올 확률이 높아요.”
“뭐? 그 반대라면서!”
“지금 생각을 바꿨어요. 숀이 스톤과 관련된 좋은 정보를 제공해 줬으면 해서요. 딱밤 다섯 대 내기 건 겁니다, 잊지 마세요.”
장철호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 용주는 다시 근엄한 사범의 모습으로 돌아와 앞쪽에서 검을 휘두르는 세 명의 관원들에게 걸어갔다.
“숀이 나올까?”
장철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그는 내기에 져서 꿀밤을 맞아도 도현이 숀을 만나 스톤과 관련된 정보를 얻었으면 했다.
영국 히드라 공항에 도착한 도현은 입국 심사를 거쳐 택시를 타고 호베어 호텔로 향했다.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는 아담한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공원이 보이는 3층 창가의 객실 분위기는, 좋게 말하면 클래식했고, 나쁘게 말하면 낡았다. 하지만 지저분한 낡음이 아니었다. 정성들여 관리하고 있어서 깨끗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객실 전체에 묻어났다.
도현은 홍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과는 시차가 8시간이 나서 한국은 새벽이었지만 홍영은 호텔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를 달라고 했다.
-어때요?
홍영은 인터넷을 검색해 예약한 방이 그녀의 생각과는 다를까 봐 조금은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도현은 객실을 둘러보며 답했다.
“좋아요.”
-정말요?
“네, 혼자 자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다행이에요. 비싼 곳으로 예약하려다가 도현 씨가 싫어할까 봐 그곳으로 했거든요. 그래도 그 호텔, 싼 곳은 아니에요. 알죠?
“그럼요, 잘 알고 있죠.”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말을 한 도현은 객실 창문을 열었다.
2차선 도로에는 차가 다녔고 건너편에는 술 취한 몇몇 사람이 공원에서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도현 씨, 내일 숀을 못 만나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알았죠?
“그럴게요. 내일 전화할게요.”
-잘 자요.
“홍영 씨도요.”
전화를 끊은 도현은 영국 경찰이 달려오자 공원 안쪽으로 도망치는 사내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