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디 임팩트 9권 24화
그는 근육과 지방이 적절히 조화된, 고무공 같은 탄력을 자랑하는 자신의 몸을 믿고 도현에게 일직선으로 접근했다. 몇 대 맞아 주면서 도현의 발목 관절을 부러 트린 다음 실컷 두들겨 패고 살을 물어뜯을 속셈이었다. 그의 치아는 보기 드물 정도로 가지런했고, 튼튼했다.
“흐흐흐, 쳐 봐. 날 눕히지 못하면 내가 널 눕힐 거야.”
도현은 겁 없이 무방비로 다가오는 로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가볍게 뻗었다. 빠각 소리와 함께 로키의 턱이 빠졌다.
“어어.”
놀란 로키가 걸음을 멈춘 순간 도현의 한쪽 발이 하늘로 쭉 올라가더니 도끼가 내리꽂히듯 전면을 강타했다.
마우스피스 없이 다가온 로키의 안면에 도현의 발꿈치가 벼락처럼 박혔다.
으저적.
코뼈가 부러지고 가지런한 치아가 순식간에 망가진 로키는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극한의 고통을 받으며 뒤로 쓰러졌다.
“으아아아악!”
피투성이 입을 감싸며 목이 터져라 외치는 로키였지만 냉정한 심판은 아직 그의 패배를 선언하지 않았다.
도현은 말없이 걸어가 턱이 빠지고 입이 엉망이 된 로키의 관자놀이를 발끝으로 툭 걷어찼다. 로키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이 뒤집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심판은 도현이 그를 쳐다보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도현의 승리를 선언했다.
“조지 승!”
사방이 고요했다. 도현에게 돈을 건 사람들도, 로키에게 돈을 건 사람들도 케이지 안에서 벌어진 압도적인 도현의 힘에 모두 눌려 버린 것이다.
수백 명의 열기를 단번에 재워 버린 도현은 기절한 로키를 직접 업어서 케이지 밖으로 나왔다.
스태프들에게 로키를 넘겨준 도현은 관중석에 앉아 있는 숀과 조지를 힐끔 쳐다본 뒤 경기장을 나갔다.
“와아아아! 이겼다! 조지! 조지!”
도현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순식간에 끝난 경기에 짓눌려 있던 소수의 사람들이 조지를 연호하며 기뻐했다.
그들은 모두 다섯 배의 배당금을 받게 된 행운의 사내들이었다.
도현이 묶고 있는 호텔 앞으로 조지의 밴과 승용차가 멈춰 섰다.
밴에서 도현이 내렸고, 승용차에서는 조지와 숀이 내렸다.
“호텔이 낡은 것 같은데,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나? 최고급 호텔로 숙소를 바꿔 주겠네.”
조지가 호텔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도현이 승리를 해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괜찮습니다. 여기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조금 있으면 날이 밝겠어, 축하주라도 해야 되는데 말이야. 괜찮다면 오늘 저녁에 시간을 내주겠나? 같이 저녁이라도 하지.”
“글쎄요. 전 다른 볼일이 남아서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도현은 옆에 서 있는 숀을 응시했다. 새벽 늦은 시간이 됐지만 그와 나눌 대화도 많았고, 증조부가 남겼다는 탐험 일지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도 해야 했다.
숀은 조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조지 삼촌의 저녁 초대는 받아들이는 게 좋지.”
“숀이 모처럼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군. 미스터 백, 다른 의도는 없네. 오늘 자네 때문에 큰돈을 벌어서 그것에 감사하는 조촐한 술자리 겸 저녁 식사를 하려는 거지. 물론,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겠네. 로키를 날려 버린 자네의 주먹이 두려우니까, 하하하.”
조지가 농담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조지의 부하들이 크게 웃었다. 그들도 조지를 따라 개인적으로 얼마간의 돈을 걸었고, 모두 큰 이득을 봤다.
“좋습니다. 저녁 초대에 응하죠. 단, 로마 격투장에 다시 출전하라는 말씀은 없어야 합니다.”
“자네와 이미 약속했으니 어길 마음은 없어. 맘 편하게 오면 되네.”
조지는 도현에게 웃으며 말을 하고는 숀에게 시선을 돌렸다.
“숀, 저녁에 미스터 백과 함께 내 집으로 와.”
“그러죠.”
조지가 부하들과 사라지자 호텔 앞에는 도현과 숀만이 남았다.
“아, 빌어먹을 조지 삼촌. 다섯 배나 받았으면서 돈 한 푼 안 주고 가네.”
숀은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주머니 안에 있는 지갑을 꺼냈다.
“미스터 백, 저기 미안한데, 조지 삼촌에게 잡혀서 있는 돈을 다 빼앗겼거든. 호텔비 좀 내줄 수 있을까?”
숀은 도현이 시합에서 이겨 자신이 자유로워지자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 톤으로 돌아왔다. 그는 유쾌한 사람으로 심각한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 있습니까?”
“뭐가?”
“증조부의 탐험 일지.”
“그건 잠을 좀 자고 낮에 찾으러 가면 안 될까? 사실 이틀 전에 조지 삼촌에게 잡힌 후로는 한숨도 잠을 못 자서 제대로 말하는 것도 힘들어.”
도현은 숀을 쳐다봤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서 있는 모습이 초라하고 피곤해 보였다.
“안 됩니다. 지금 봐야겠습니다.”
냉정한 도현의 태도에 숀이 하소연을 했다.
“탐험 일지가 없는 게 아니라 정말 피곤해서 그래. 그걸 보며 내가 이런저런 얘기도 해 줘야 하는데, 맑은 정신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나와 한 약속을 벌써부터 깨트리려고 하는 건 정말 위험한 짓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숀은 도현이 로키를 쓰러뜨리는 장면을 떠올리며 몸을 살짝 움츠렸다.
“탐험 일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끈질긴 도현의 추궁에 숀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꼭 지금 봐야겠어?”
도현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당신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미안할 정도로 감사하게 생각해. 당신이 아니었으면 로마 격투장에서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으니까. 좋아, 가자고.”
“꺼져 버려!”
어슴푸레 밝아 오는 새벽하늘 아래 한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거리에 맴돌았다.
“오해라니까! 난 너밖에 없다고!”
숀이 고개를 쳐들고 3층 창가에서 소리치는 인도계 여성에게 말했다.
“소문 다 들었어! 거지 같은 자식!”
“아민, 그러지 말고 문 좀 열어 줘!”
3층에 사는 여자 친구의 집에 가기 위해서는 출입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비밀번호도 바뀌었고 그녀는 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꺼져!”
숀과 동거를 했던 아민은 잠을 자다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러지 마, 아민. 우리 둘이 그동안 좋았잖아. 내가 널 위해 얼마나 훌륭한 아침을 만들어 줬는데. 잊은 거야?”
“맛없었어.”
금융회사에 다니는 30대 초반의 여성 아민은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숀은 멍하니 서 있다가 옆을 돌아봤다. 도현이 팔짱을 끼고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나올 거야. 아민은 날 좋아하거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3층 창문이 다시 열렸다.
“봤지?”
웃으며 위를 올려다보던 그는 물벼락을 맞았다. 아민이 커다란 통에 물을 받아 와 쏟아 버린 것이다.
머리에 감은 붕대와 옷을 다 버린 숀은 화가 난 얼굴로 외쳤다.
“정말 이러기야, 아민!”
“보기 싫으니까 가!”
“좋아! 그럼 내 물건이라도 챙겨 오게 문을 열어 줘!”
“거기서 받아.”
숀의 여자 친구는 커다란 옷가방을 낑낑대며 3층에서 떠밀었다.
밑에서 받기엔 무리였다. 숀이 놀라 옆으로 피할 때 도현이 손을 움직여 커다란 옷가방을 부드럽게 받아 냈다.
“아민, 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닥쳐!”
아민은 가방 두 개를 또다시 창문을 통해 던졌고, 그럴 때마다 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던진 가방들을 받아 냈다.
“이제 없어! 다신 오지 마!”
“아민, 언젠가 오해가 풀리면 다시 연락해! 그동안 즐거웠다!”
3층에 굳게 닫힌 여자 친구의 창문을 보며 소리친 숀은 멋쩍은 표정으로 도현에게 다가갔다.
“성격이 화끈한 여자라니까.”
그는 도현이 받아 놓은 작은 가방을 열어 두툼한 책자를 한 권 꺼냈다.
“이게 증조부가 기록한 탐험 일지야. 이제 내가 지어낸 게 아니라는 걸 믿겠지?”
도현은 하드커버로 된 책자를 열어 봤다.
탐험은 내 삶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첫 페이지에 쓰인 빛바랜 검은 필기체에 잠시 시선이 빼앗긴 도현은 다음 장을 넘겨 봤다.
숀의 증조부 헨리가 기행문 형식으로 기록한 탐험 이야기들로 책 한 권이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길거리였기 때문에 자세히 읽어 볼 수 없어 대충 훑어보던 도현은 책 후반부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는 심장이 살짝 뛰었다.
‘스톤의 문양이다!’
한 페이지에 걸쳐 그려진 문양의 그림 밑에는 헨리가 적어 놓은 글이 있었다.
모래폭풍 뒤에 나타났다 자취를 감춘 건축물의 벽면에 그려진 문양이다. 내가 이 복잡한 문양을 기억하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그만큼 건축물은 내게 인상적이었다. 내가 이 문양을 기억하는 한, 나는 헛것을 본 게 아니다.
도현이 그림에 시선을 빼앗길 때 숀이 옆에서 말했다.
“이메일에 증조부의 기록사진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사진이 아니라 이 그림이었어. 어때, 놀랍도록 당신이 찾던 스톤의 문양과 흡사하지?”
“그렇군요.”
도현은 책을 덮었다. 길거리에서 책을 길게 읽어 볼 형편도 안 됐고, 물벼락을 맞은 숀이 추위로 덜덜 떨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죠.”
“호텔비는 내주는 건가?”
숀이 가방을 양손에 들며 물었다.
“나중에 조지에게 청구해서 받겠습니다.”
호텔로 돌아온 도현은 잠을 자지 않고 두툼한 헨리의 탐험 일지를 정독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영어 단어는 객실에 비치된 컴퓨터를 이용해 그 뜻을 파악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숀의 증조부가 남긴 탐험 일지를 완독했을 때는 어느덧 해가 높이 떠 객실 창을 통해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사막 밑에 숨겨진 건축물이라…….”
도현은 헨리의 탐험 일지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밝은 햇빛이 그의 몸 전체를 감쌌다.
헨리의 탐험 일지에는 모두 세 건의 탐험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 도현이 관심을 갖는 부분은 책 후반부의 마지막 탐험 이야기다.
도현은 창 너머로 보이는 작은 공원을 응시하며 ‘사막의 지하 건축물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서술된 헨리의 글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집트 왕가의 계곡으로 고고학자들과 탐험가 들이 몰리고, 20세기 초반에 영국 출신 하워드 카터가 도굴되지 않은 투탕카멘왕의 무덤을 발굴해 세상이 떠들썩할 때, 헨리는 사막 유목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사막의 지하 건축물을 찾기 위해 사막을 떠돌고 있었다.
사재를 털어 탐사대를 꾸린 그는 1년여에 걸쳐 이집트 서부 일대와 리비아 지역의 사막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었고, 재정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탐사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됐다.
결국 헨리는 이집트 북서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 ‘시와’로 돌아가기로 하고 지친 탐사대와 함께 사막에서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동틀 무렵 거대한 모래폭풍이 덮쳐 일행과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홀로 남은 헨리가 일행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중 모래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우연히 자신의 키만 한 크기의 석조 건축물을 발견하게 됐다.
사각형 모양의 그것은 둘레가 상당히 넓어서 방이 여러 개인 집의 크기와 견줄 만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건축물의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모래 위로 드러난 건축물이 지하에 숨겨진 건축물의 일부라고 판단한 헨리는 흩어진 탐사대 인원들을 모아 발굴을 해 봐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됐다.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탐사대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고 추위 속에서 그는 건축물에 등을 기대고 내일을 기약했지만, 다음 날도 탐사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식수도 떨어져 갔고, 그는 살기 위해 이동을 해야 했지만 건축물에 대한 미련이 남아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며칠 만에 다시 나타난 모래폭풍이 주변의 모래들을 이용해 건축물을 다시 사막 아래로 숨기려 했고, 헨리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힘에 등 떠밀려 건축물 곁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봤던 건축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정확한 위치도 감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사막은 태연하게 원래의 모습으로 모든 걸 되돌려 놓은 것이다.
그는 지나가는 유목민의 도움으로 사막을 벗어나 영국으로 돌아왔고, 자신이 경험한 그날의 일을 탐험 일지에 소상히 기록해 놓은 뒤 얼마 가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도현이 본 탐험 일지 속 문양은 헨리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막의 지하 건축물의 일부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