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디 임팩트 10권 3화
마크는 손에 든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골동품 상점에서 구해 온 중세 갑옷 모형의 손에서 날이 선 검을 휙 뽑아 들었다.
“이 망할 자식! 날 찾아온 이유가 저 사람 때문이었나? 나와의 우정 때문이 아니라!”
“오해네.”
조지가 검을 든 마크의 행동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오해? 혹시 네놈 사업에 저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고?”
속이 뜨끔한 조지는 검을 들고 다가오는 마크를 피해 탁자 뒤로 갔다.
“이보게 마크, 내가 여길 찾아온 건 저 친구 때문만은 아니야. 말했지만 난 자네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게 더 중요해. 그래서 일부러 저 친구와 같이 온 거고.”
“이기적인 인간. 넌 내가 포클랜드 스톤을 얼마나 귀중히 여기고 아끼는지 알면서도 그걸 팔라고 저 사람을 데리고 왔어.”
“그 스톤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신비로운 물건이 아니네. 30년이 넘었지만 그걸로 인해 자네에게 뭔가 변화가 있었나?”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조지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말을 하던 마크가 화난 얼굴로 검을 내리쳤다. 그러자 나무 탁자에 검이 깊숙이 박혔다. 원래 의도는 탁자를 두 조각 내는 거였는데, 마크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얼굴이 벌게진 마크는 탁자에 반쯤 박힌 검날을 빼내려고 했지만 잘 빠지지 않았다.
“제가 빼 드리죠.”
뒤에서 지켜보던 도현이 손가락으로 검신을 튕기자 단단한 나무 탁자가 두 조각이 나며 검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도현이 검신을 손가락으로 튕길 때 엄청난 압력이 마크의 손바닥으로 전달됐고, 그 힘을 버티지 못한 마크가 검 손잡이를 놓은 것이다.
“자네 뭐 하는 사람인가?”
놀란 마크가 화끈거리는 손바닥의 열을 식히며 물었다. 그로서는 손가락으로 검에 진동을 일으키는 사람을 처음 본 것이다. 얼마나 손가락 힘이 강했으면 검신이 진동하고 반쯤 잘렸던 탁자가 완전히 갈라졌겠는가.
“그는 한국에서 검술 도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네.”
조지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중세 갑옷 기사의 손에 다시 들려 줬다.
“검술 도장?”
마크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도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손바닥은 괜찮으십니까?”
도현이 정중히 물었다.
“괜찮긴 한데, 어떻게 그리 손가락 힘이 강한 거지?”
“어려서부터 수련을 했습니다.”
“굉장해.”
마크도 놀랐지만 사실 조지도 많이 놀란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로 마크와 조지의 다툼을 깨끗이 눌러 놓은 도현은 직접 마크에게 찾아온 용건을 설명했다.
하지만 마크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포클랜드 스톤과 똑같은 것을 찾고 있다는 게 신기하군. 하지만 팔 수는 없네.”
“돈은 최대한 제가 맞춰 보겠습니다. 원하시는 금액이라도…….”
“아니, 난 돈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야. 이미 난 스톤에 정이 들어 버렸어. 자네도 스톤을 취미로 모은다고 했으니, 내 심정을 이해할 걸세.”
“그러십니까.”
도현은 아쉬운 표정으로 턱을 한번 매만졌다. 마크의 태도를 보니 절대 팔 것 같지 않았다. 하긴, 여동생의 일로 조지와 30년을 불편하게 지낼 정도면, 성격도 있고 고집도 센 사람 같기는 했다.
‘흠, 어쩌지. 조지 말대로 훔쳐서라도 가지고 가야 하나?’
도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지, 경고하겠네.”
“뭘 말인가?”
조지가 헛기침을 하며 마크를 봤다.
“만약 내 스톤이 없어지면 자네 소행으로 간주하겠네. 그땐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장담할 수 없어. 나도 죽고, 자네도 죽는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자넨 목적을 위해선 그런 짓도 할 것 같거든.”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어떻게 보고! 걱정 마, 도둑질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
조지는 대답을 하며 도현을 힐끔 봤다. 그의 눈빛 속에는 스톤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섞여 있었다.
‘난감하군. 스톤을 손도 못 대게, 마크가 조지를 걸고넘어졌어. 그렇다고 스톤을 포기할 수도 없고.’
찰나지만 여러 생각을 이리저리해 보던 도현은 결국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먼 이곳까지 왔습니다. 팔지는 않으셔도 보여 주실 수는 있겠지요?”
“마크, 내 얼굴을 봐서라도 보여 주게.”
조지가 거들자 마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부서진 탁자를 정리하고 있게. 내가 가지고 오지.”
마크가 2층으로 올라가자 조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네. 마크가 저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 못 했어.”
“아닙니다.”
담담히 대답한 도현은 부서진 탁자를 현관문 쪽으로 옮겼다.
“런던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스톤을 찾아보겠네.”
조지는 도현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친구인 마크를 포기할 순 없었다.
도현이 부서진 탁자를 다 정리했을 무렵, 2층에 올라갔던 마크가 묵직해 보이는 상자를 안고 내려왔다.
그는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고 귀한 보물을 공개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게 바로 포클랜드 스톤이네. 아름답지?”
부드러운 보라색 천 위에는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스톤이 들어 있었다. 얼핏 봐도 도현이 네팔이나 미국에서 얻은 것의 서너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이런 걸 가치 있게 여기는 자네나 미스터 백이 난 이해가 안 돼. 조각상도 아니고 말이야.”
“실례가 안 된다면 스톤과 잠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조용한 곳에서요. 이렇게 크고 멋진 스톤은 본 적이 없거든요.”
도현의 뜬금없는 요구에 마크의 눈에 의심이 서렸지만, 도현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2층을 가리켰다.
“올라가면 문이 열린 방이 있네. 스톤과 교감하는 즐거운 시간을 갖게.”
“감사합니다.”
상자를 들고 도현은 2층의 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그는 돌아서서 바닥에 상자를 놓고 뚜껑을 열었다.
“조 박사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에너지만 흡수할 수밖에.”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은 겉만 멀쩡한 스톤을 남겨 두고 그가 원하는 에너지만 흡수해 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마크와 조지 그리고 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설마 에너지가 없는 건 아니겠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긴장된 마음으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스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네팔의 돌탑에서 경험했던 일이 반복해서 벌어졌다. 스톤과 도현의 손이 맞닿은 지점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그 빛이 도현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내가 찾는 스톤이었어.’
도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팔이나 미국에서 구한 스톤보다 빛이 훨씬 많이 새어 나오고 있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어.’
길게 느껴지는 몇 초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 스톤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도현이 모두 흡수한 것이다.
스톤의 외관이 이상 없는지 확인한 도현은 상자를 닿고서 흥분된 눈빛으로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타투가 다시 생겼다.’
검은색을 띤 선명한 타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며칠만 지나면 황금색 타투로 변할 테고, 그럼 다시 이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이번엔 정말 큰 걸 얻었어. 스톤의 크기로 보아 적어도 이계에서 1년 이상은 머물 수 있겠지?”
흐뭇한 미소를 지은 도현은 한동안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상자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감사합니다. 마음의 평화가 느껴지는군요.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마크는 도현의 진심이 묻어나는 말에 기분 좋게 웃었다.
“스톤의 가치를 알아보는군. 시간도 늦었으니 저녁 먹고 내일 가게. 나와 검 대련도 해 주고.”
“대련요?”
“한국에서 검술 도장을 한다면서?”
“아, 예.”
도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의 스톤에서 에너지를 흡수했는데, 그 정도도 못 해 줄 이유는 없었다.
그날 밤 도현은 마크와 조지 틈에 끼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이튿날은 마크의 바람대로 검을 겨뤘다.
“늘 이런 복장을 하고서 싸워 보는 꿈을 꿨네.”
조지의 도움을 받아 골동품 갑옷을 몸 이곳저곳에 끼워 맞춘 마크는 둔한 몸짓으로 도현의 앞에 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세 기사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마크는 나이답지 않게 우렁찬 기합 소리를 내며 몇 미터 앞에 서 있는 도현을 향해 돌진해 갔다.
“이얏!”
힘 있게 내려치는 마크의 검을 도현은 슬쩍슬쩍 막기만 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즐거워하는 마크를 단숨에 꺾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도현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몇 번 검을 휘두른 마크는 무거운 갑옷의 무게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헉헉대며 땅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졌다. 목을 쳐라!”
투구를 벗으며 숨을 헐떡이는 마크는 영화 속 왕처럼 멋들어지게 말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조지가 마크의 뒤로 돌아가 그의 등을 발로 힘 있게 밀었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우린 그만 비행기 타러 인버네스로 가야 돼. 난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저녁 비행기로 런던에 도착한 조지는 공항에 마중 나온 부하의 인사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타게, 호텔까지 태워다 주겠네.”
공항에서 헤어지려고 했던 도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차에 탔다.
차는 공항을 벗어나 런던 중심부를 향해 이동했고, 조지는 차 안에 비치된 파이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자네, 마음이 꽤 넓군.”
도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조지를 쳐다봤다.
“한국에서 영국까지 스톤 하나를 보고 숀을 만나러 온 사람이 자네 아닌가? 취미든 뭐든 그만큼 자네에게는 그 스톤이 중요하다는 것이겠지. 나 같으면 눈앞에 찾는 스톤이 보이는데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못했을 거야. 스톤을 안 판다는 마크와 기분 좋게 어울리지도 못했을 거고.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보는 것 같아. 자넨 괜찮은 사람이야.”
분위기를 잡으며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조지의 행동에 도현은 낯이 조금 뜨거워졌다. 솔직히 원하는 건 거의 다 얻어 온 셈이었기 때문이다.
“고맙네, 내 체면을 세워 줘서.”
“아닙니다.”
“말한 대로 유럽 쪽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 스톤과 비슷한 게 있는지 조사해 보겠네. 쉽진 않겠지만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고맙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멋진 스톤은 볼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게라도 말해 주니 고맙군, 하하하!”
조지는 호탕하게 웃었다. 마크와의 껄끄럽던 관계도 이번 기회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됐다. 게다가 도현도 소득 없이 돌아오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밝아 보여서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막히는 길을 통과해 도현이 묶고 있는 호텔에 차가 도착했다.
“미스터 백, 난 언제나 자네를 환영하네. 잊지 말게. 자, 그럼 우리 또 보도록 하지.”
“감사했습니다.”
조지의 차가 떠나자 도현은 몸을 돌려 호텔을 올려다봤다.
불이 켜진 호텔 객실 창가에서 숀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다녀왔나?”
3층에서 소리치는 숀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멀리 퍼졌다.
도현은 별다른 대꾸 없이 호텔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그의 객실 앞에 서 있는 숀과 마주쳤다.
“이틀간 조지 삼촌과 같이 있었던 거야? 왜?”
“1시간 뒤에 당신 방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때 보죠.”
도현의 대답에 숀은 슬쩍 그의 객실 문 앞에서 비켜섰다.
1시간 뒤, 숀의 방으로 찾아간 도현은 그가 건네주는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조지와 어딜 다녀오긴 했는데, 조지는 내가 떠들고 다니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숀은 궁금했지만 도현을 그 일로 더는 귀찮게 하지 않았다.
“나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미안해, 먼 곳까지 불러서.”
숀이 헛기침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얘기를 했다면, 나는 당신에게 사막을 탐사할 수 있는 자금을 어느 정도 후원해 줬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가능성이 크든 적든 간에. 그런데 당신은 이메일을 통해 끝까지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고 이용해 먹으려고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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