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29화 (229/575)

[229] 디 임팩트 10권 4화

도현의 말이 길어질수록 숀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똑같은 말이지만 미안해. 더 이상 속이고 나약한 나는 없어. 1년이든 2년이든 돈을 모아 사막을 탐사하고 네게 약속한 스톤을 찾아 줄게.”

“말했지만 사막은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닙니다.”

“나도 말했을 거야. 내게 탈출구는 사막이라고. 증조부가 남긴 그곳을 찾는 것밖에 남지 않았어!”

힘없던 숀의 눈빛이 이때만큼은 강하게 빛났다.

잠시 숀의 눈빛을 들여다보던 도현이 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

숀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는 도현의 등을 보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차마 돈을 투자해 달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도와줄 만큼 도와줬지. 로마 격투장도 대신 가고, 조지 삼촌의 빚도 5년이나 연장해 줬으니까.’

며칠 전에 이미 못 도와주겠다고 한 도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말이 나오지 않았다.

쿠웅.

도현이 나가는 문소리가 들렸다.

숀은 테이블 위의 맥주병을 정리하다가 도현이 앉았던 의자 옆에 있는 검정색 가방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도현이 들어올 때 가지고 온 가방이었다.

가방 손잡이에는 작은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5만 파운드입니다. 술과 도박으로 돈을 날렸다는 소식이 조지를 통해 내게 들리면, 당신을 사막에 파묻어 버리겠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크흑흑!”

숀은 쪽지에 얼굴을 파묻고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한국에서 온 낯선 사내가 그를 믿고 손을 내민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는 문을 벌컥 열고 도현의 방으로 가다가 중간에 되돌아왔다.

“그를 만나는 건, 결과물을 얻은 후라도 늦지 않아!”

조지가 선물로 준 5만 파운드를 숀의 방에 놓고 온 도현은 다음 날 아침 호텔을 나섰다.

숀에게 사막에서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다는 마지막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어제 본 그의 눈빛을 떠올리니 그럴 수가 없었다. 옆에서 누가 뭐라든지 자신의 길을 갈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히드로 공항의 활주로를 이륙한 비행기에서 멀어지는 런던을 내려다봤다.

숀에게 직접적으로 얻은 건 없지만, 그의 주변인들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스톤의 에너지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영국에 온 보람은 넘치고도 남았다.

비행기 좌석에 기댄 도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굿바이 런던.’

뮤직 박스

“내기에서 내가 이겼다니까 그러네. 이리 와 딱밤 맞아.”

철호의 주장에 용주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이겼지! 형이야말로 그 못생긴 이마 이리 대세요.”

“네 이마보다 훨씬 근사하게 생겼거든!”

철호는 넓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인정할 건 하세요, 좀. 딱밤 맞는 게 얼마나 아프다고. 매일 내게 매를 맞으면서. 자, 이리 와요.”

용주가 손가락에 힘을 모으며 다가오자 철호도 지지 않고 중지에 힘을 잔뜩 주며 용주의 이마를 노려봤다.

그들은 도현이 영국에서 돌아오자 숀과 관련한 내기에서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내기는 ‘딱밤’ 다섯 대였다.

“형은 숀이 안 나온다고 했고, 나는 그 반대였죠. 누가 맞았어요?”

“카페에 숀이 안 나온 건 사실이잖아?”

“전체 그림을 보시라고요. 도현이가 카페는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 숀을 만났잖아요. 안 그래요?”

“카페, 내가 아는 장소는 그곳이다.”

장철호가 콧방귀를 뀌며 눈을 부라렸다.

“답답하네, 정말. 형은 그래서 호심공을 수련해도 내공이 안 생기는 거예요. 큰 그림을 못 보시네.”

“이 자식이!”

가슴에 불이 확 오른 장철호가 먼저 딱밤을 때렸다.

“아이고, 아파라. 왜 때려요, 내가 이겼는데!”

“네 대 남았다.”

철호가 다가오자 용주가 지켜보던 홍영과 도현의 뒤로 몸을 숨겼다.

“도현아, 네가 말해 봐. 누가 내기에서 이겼냐? 나잖아, 안 그래?”

도현은 철호의 눈치를 보며 더듬거렸다.

“글쎄, 숀을 만난 게 사실이긴 한데.”

이때 장철호가 홍영에게 물었다.

“홍영아, 카페에 숀이 안 나왔으니까 내가 이긴 거지, 그렇지?”

“맞아요, 오빠가 이겼어요.”

홍영이 철호 편을 들어주자 용주는 분하다는 눈빛으로 철호 앞에 섰다.

“좋아요, 형, 때려요. 내 편은 아무도 없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속으로 딱밤이 들어왔다. 인정사정없이 때린 철호의 손맛은 깔끔하고도 깊은 맛이 있어서 용주는 비틀거리다 뒤로 쓰러졌다.

“철호 형, 내일부터 내가 어떻게 매질을 하는지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아시겠어요?”

용주의 위협에 철호는 사각 턱을 쓰윽 훑어 내리며 웃었다. 도현이 영국에 있는 동안 등 부위에 이어 복부 쪽에서도 반탄력이 생겨났다. 그게 다 열심히 때려 주는 용주의 덕택이었다.

“얼른 일어나. 도현이 이 녀석 이계 간다고 하기 전에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자.”

“형, 잠시 들렀다 갈 데가 있어요.”

“어딜?”

“있어요. 잠깐이면 되니까 먼저 가 계세요.”

“빨리 와라.”

철호의 말에 도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단골 식당으로 향하는 철호와 용주, 홍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몸을 돌려 길 건너 2층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서지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서지철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는 일을 의뢰한 고객에게 정중한 편이었지만, 이렇듯 윗사람을 대하듯 먼저 몸을 사린적은 없었다. 그만큼 도현을 대할 때는 긴장을 한다는 뜻이었다.

“별일 없었죠?”

도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네, 도장 주변은 조용합니다. 영국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서지철은 도현이 영국에 다녀온 이유는 몰랐지만 인사치레로 물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받으세요. 영국에서 사 온 선물입니다.”

“예? 선물요?”

도현이 쇼핑백을 건네자 서지철은 당황한 얼굴로 받았다. 돈을 받고 일하는 그에게 선물을 주는 의뢰인은 없었다. 그 역시 그런 건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돈으로 맺어진 계약관계일 뿐이었다.

‘혹시 의뢰금이 적어서 내게 미안한 걸까? 선물이라니?’

프로 해결사 서지철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도현이 말했다.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 아, 예.”

서지철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포장된 선물 상자가 들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꺼내 커피숍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뭐지?’

약간 묵직했다. 서둘러 선물 상자를 열어 본 서지철의 눈이 커졌다.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고풍스러운 빛깔이 흐르는 아름다운 뮤직 박스였다. 박스 옆으로 나온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기다란 원통에 돋아난 깨알 같은 금속 뭉치와 고정된 금속 핀이 충돌해 맑고 예쁜 멜로디를 만들어 냈다.

단조로운 음이지만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걸 왜 제게?”

뮤직 박스 손잡이에서 손을 놓으며 서지철이 도현을 봤다.

“런던에서 샀습니다. 서 팀장님 딸이 생각나서요.”

“제 딸요?”

서지철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네, 작년에 제가 서 팀장님 가족사진을 본의 아니게 봤잖습니까?”

도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서지철은 기억이 났다. 작년에 지하 도장을 조사하러 갔을 때 도현에게 발각돼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 도현이 지갑 속 가족사진을 봤었다.

“따님이 아직 어리죠?”

“올해 열한 살입니다.”

“그렇군요.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습니다.”

“절 보자고 한 이유가 이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습니까?”

“네, 내일은 중국에 가야 해서요. 시간이 지금밖에 없네요.”

무서운 사람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할 때면 더 긴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서지철은 깊은 눈빛으로 담담히 선물을 건네고 있는 도현을 보며 긴장을 오히려 풀었다.

‘이런 미친 인간미라니.’

금액으로 따지면 몇 푼 안 되는 선물이었지만 그는 크게 감동했다.

“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코를 훌쩍인 그는 양손으로 테이블 위의 뮤직 박스를 도현 쪽으로 밀었다.

“죄송하지만 이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싫어할 것 같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이혼했습니다. 애는 아이 엄마가 양육하고 있죠.”

“아, 그러시군요.”

도현이 당황한 얼굴로 뮤직 박스를 내려다봤다.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 런던의 가게를 들러 홍영에게 줄 뮤직 박스를 사던 중 문득 서지철의 딸이 생각나 그는 한 개를 더 구입했다. 그런데 괜히 사 온 듯했다.

“외국에 있습니까?”

“아니요, 국내에 있습니다. 하지만 만나기 쉬운 상황이 아니라서요. 죄송합니다, 백 관장님.”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실례를 했군요.”

도현은 쇼핑백 안에 뮤직 박스를 넣고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보니 헤어진 부인과 사이가 썩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딸아이와 헤어져 있는 서지철이 이 뮤직 박스를 가지고 있다가는 계속 마음에 상처만 받을 것 같았다.

“또 뵙죠.”

“네.”

쇼핑백을 든 도현이 커피숍에서 사라지자 홀로 남은 서지철은 무거운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젠장, 그래도 생전 처음 의뢰인이 가지고 온 선물인데, 이렇게 대하면 안 되지. 바보 같은 자식.”

그는 커피숍을 뛰쳐나갔다. 저 앞에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도현이 서 있었다.

“백 관장님!”

한걸음에 달려간 그는 도현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낚아채듯 가지고 갔다.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아이에게 전해 주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하하하, 그럼요.”

서지철은 웃는 낯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어깨는 어딘지 힘이 없어 보였다.

잠을 자다 트레이닝복에 점퍼 차림으로 온 호태식은 택시에서 내려 실내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서지철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이러고 있어요? 아침에 일 안 할 거예요?”

호태식이 말한 일은 도현의 의뢰를 뜻했다.

“걱정 마라, 자식아. 난 술 마시고도 일을 잘하는 사람이야.”

“좋은 꿈꾸고 있을 때 하필 전화해서는…….”

호태식은 실내 포장마차 주인이 가지고 온 술잔에 반병쯤 남은 소주를 기울여 가득 채웠다.

“끄으, 좋다.”

소주잔을 비운 호태식이 계란말이를 집어 먹으려는 순간 서지철이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왜 이래요, 계란말이 많이 남았는데.”

“태식아, 이거 한번 들어 봐라.”

서지철이 쇼핑백에서 뮤직 박스를 꺼내 손잡이를 돌렸다. 귀를 기울이게 하는 청아한 멜로디가 실내 포장마차에 퍼져 나갔다.

“음색 좋네. 그거 뮤직 박스잖아요. 샀어요?”

계란말이를 먹으며 호태식이 물었다.

“선물받았다.”

“선물요? 나 빼고 형님한테 선물 주는 사람도 있어요?”

“놀리지 마, 자식아. 이걸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백도현 관장이 영국 런던을 다녀오며 사 온 거다.”

“예? 백 관장이요?”

놀란 호태식이 뮤직 박스를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쳐다봤다.

“너, 의뢰인한테 선물받아 본 적 있냐?”

“없죠. 그들과 우리 사이에 선물이 오가는 게 이상하죠. 돈이면 끝인데.”

“그렇지. 그런데 백 관장은 내게 선물을 줬다. 사실 그는 나와 그 시작이 좋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놀랍지 않냐?”

“제가 말했잖아요, 백 관장 괜찮은 사람이라고. 근데 선물이 좀 묘하네, 뮤직 박스라니. 무슨 의미지?”

호태식이 곰곰이 생각을 할 때 서지철이 아련한 눈빛으로 뮤직 박스를 봤다.

“아라 주라고 사 온 선물이야, 내가 가질 게 아니라.”

“아라요? 형님 딸요?”

“응.”

고개를 끄덕인 서지철이 술잔을 비웠다.

“고이 보관했다가 아라 만나면 줘야겠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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