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디 임팩트 10권 5화
“나 이거 한번 돌려 봐도 돼요?”
호태식이 뮤직 박스에 손을 대려 하자 서지철이 손짓을 했다.
“어딜 만져.”
그는 쇼핑백에 뮤직 박스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형님도 참 치사하게. 그거 한번 만져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호태식은 투덜대며 서지철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백 관장에게 선물받았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나오라고 한 거예요?”
“그것도 있고, 다른 일도 있고.”
“다른 일요?”
호태식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흘낏 서지철을 봤다.
“태식아, 너 요즘 한가하지?”
“큰누나 일만 아니면 뭐 그렇긴 하죠.”
해결사 일을 하고 있지 않아서 호태식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김탁훈이 좀 조사해 봐라.”
“김탁훈요?”
“선물을 받았으니 돌려주는 게 사내 아니냐?”
소주잔을 비운 서지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턱을 괴고 의자에 앉아 있던 홍영은 도현이 영국에서 선물로 사 온 뮤직 박스를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박스 옆으로 나온 손잡이를 천천히 회전시켰다.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마치 도현이 노래를 불러 주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별일 없겠지?”
조만간 이계로 갈 도현을 생각하던 그녀는 마음 한편에 있는 불안감을 뮤직 박스의 멜로디로 희석시켰다.
“충분히 강해졌으니까. 그래, 괜찮을 거야.”
그녀는 때때로 도현이 더 이상 이계를 왕래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곳에서 돌아올 때마다 큰 성장을 이루는 장점도 있지만, 어쩐지 그쪽 세계에 도현을 점점 빼앗기는 기분도 들었기 때문이다.
“홍영 씨.”
문밖에서 들리는 도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오전 비행기로 중국에 가려는 도현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다녀올게요.”
“조심해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빙긋 웃어 보인 도현은 홍영의 손을 잡아 준 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영국에서 돌아온 도현은 이계로 가기 전에 주성하, 료쿄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서로 협력하자는 의견의 일치를 봤지만, 사실상 그의 힘에 굴복해 억지로 동맹을 맺은 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일에 동참하는 작은 행동이라도 보임으로써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동질감을 심어 주고 싶었다.
그 행동은 바로 담기량의 은거지를 함께 찾는 것이다. 단 하루라도.
기예잡술서의 지도에는 담기량의 은거지가 옛 지명과 간단한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주성하는 그것을 중국 내의 저명한 사학자들에게 의뢰해 모두 일곱 곳의 유사한 장소를 찾아내 조사 중이었다.
첩첩산중에서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아 헤매는 료쿄 일행에 합류한 도현은 그들의 조사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감시하러 온 거예요?”
절벽 아래로 길게 늘어진 밧줄을 잡고 내려가려던 료쿄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도현에게 톡 쏘듯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궁금해서 한번 와 본 것뿐입니다. 도와 달라는 주성하의 말도 있었고.”
“진짜 속셈은 따로 있겠지. 당신이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려는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절벽으로 늘어진 다른 밧줄을 한 손에 거머쥐고 절벽에 발을 디뎠다.
“같이 내려가 봅시다. 왔으니, 오늘 하루는 당신을 돕겠습니다.”
도현이 라펠을 하듯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해 절벽 아래로 쭈욱 내려갔다. 수백 미터 높이의 절벽 아래에 깊은 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 담기량의 은거지가 있는지 조사하려는 것이다.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는 도현을 노려보던 료쿄는 팽팽해진 그의 밧줄을 자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녀 역시 절벽 밑으로 몸을 던졌다.
밧줄 하나에 생명을 걸고 뛰어내린 료쿄와 도현은 얼마 뒤 절벽 밑에서 만났고, 그들은 플래시를 켜 물방울이 떨어지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는 동굴 초입은 거대해서 사람의 몸이 아주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입구만 그랬을 뿐, 깊이 들어가자 동굴은 급속도로 좁아져 걸을 때마다 서로의 팔이 스칠 정도가 됐다.
“막다른 곳이군요.”
도현은 플래시로 막힌 동굴의 벽을 비추며 말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생성된 자연적인 동굴로, 수백 년 전 담기량이 살았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동굴 이곳저곳을 두드려 본 료쿄는 약간은 실망한 얼굴로 되돌아섰다.
말없이 동굴을 나서던 그녀는 뒤를 따라오는 도현을 힐끔 쳐다봤다. 그에게는 어딘지 여유가 느껴졌다. 사부인 태선군이 제자들 앞에서 보이는 여유와 어딘지 비슷해서 그녀는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부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면 다른 방법도 많을 텐데 왜 멍청하게 정면으로 승부를 보려는 거지?”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조금 이상하군요. 그러는 당신은 나를 죽도록 싫어하는 것 같은데, 왜 아까 절벽에서 밧줄을 자르지 않았습니까?”
“넌 내 검에 쓰러져야 하니까.”
“같은 경우입니다. 태선군은 내 검에 쓰러져야 할 대상인 거죠. 다른 복수는 내게 진정한 복수가 아닙니다.”
도현이 말을 하며 료쿄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눈빛으로 도현의 등을 노려보던 료쿄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따라잡았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를 비롯해 사형제 네 명의 합공을 이겨 낼 만큼 강해진 거지? 네 뒤에 누가 있는 게 아니야?”
“어느 날 산에서 수련을 하는데 지나가는 고승이 소림사 대환단을 하나 건네주더군요.”
“지금 날 놀리는 거야?”
“내가 지금 놀리는 것 같습니까?”
걸음을 멈춘 도현은 플래시로 료쿄의 얼굴을 비췄다.
“이제 내가 묻겠습니다. 4년 전, 당신의 대사형 청선이 도둑맞은 검선문의 비급을 찾아다닐 때 한 여자가 동행을 했습니다. 그 여자는 고서점에 들어가 나이 든 주인이 꺼내는 총구를 칼로 잘라 내기도 했고, 쿵푸 도장을 찾아가 청선이 우리 아버지와 싸우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기도 했죠.”
도현의 말을 들은 료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나는 그 여자가 누굴까 늘 궁금했습니다. 그 여자가 누굴 것 같습니까?”
“…….”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으려면 힘깨나 들겠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고.”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둘은 말없이 동굴을 나와 절벽 밑으로 내려온 밧줄 앞에 섰다.
도현이 막 밧줄을 잡고 절벽을 타고 올라가려는데 료쿄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맞아, 4년 전 그 여자가 바로 나다. 원하는 게 뭐지?”
“우리 아버지는 어땠습니까?”
도현이 밧줄을 타고 올라가며 묻자, 료쿄도 밧줄을 이용해 위로 올라가며 대꾸했다.
“내공은 없었지만 훌륭한 검객이었다. 검에 혼신의 힘을 담았지.”
“칭찬입니까?”
“……그래.”
“그거면 됐습니다. 과거 일을 물은 건 당신을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당신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어땠는지 궁금해서니까요.”
료쿄는 위를 올려다봤다.
도현이 밧줄을 잡고 순식간에 위로 사라져 버렸다.
“백도현.”
날이 어두워지자 료쿄와 함께 산을 조사하던 사내 몇이 평평한 곳을 찾아 야영 텐트를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료쿄 곁으로 도현이 다가왔다.
“수고하십시오. 난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료쿄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
도현은 잠시 료쿄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칼날처럼 솟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
도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때서야 료쿄는 고개를 돌려 도현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한동안 도현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위성 전화기를 꺼내 주성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산을 내려가요? 온 김에 며칠 도와주지, 몹쓸 인간이네.
“닥쳐! 내 허락 없이 다시는 이런 일 벌이지 마. 신경 쓰여, 감시받는 것 같기도 하고.”
-알아요. 실은 녀석이 우릴 완전히 믿게 하려고 중국에 와서 우리가 찾는 걸 도와 달라고 슬쩍 얘기를 비친 겁니다.
“그가 네 의도를 짐작 못 했을 것 같아? 쓸데없이 잔머리 굴리지 마.”
-구사저, 화났습니까?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는 게 뜬구름 잡는 건 아닌지 말이야.”
-구사저, 지도는 틀림없이 진본입니다. 담기량이 남긴 절세의 무공도 존재할 거고요.
“모르겠어. 지금은 그저 조용히 검을 수련하고 싶을 뿐이야.”
-백도현에게 자극을 받아 심란하신 것 같은데요. 흔들리지 마세요. 백도현이 어떻게 저런 고수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구사저는 그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주성하의 격려 섞인 말에도 료쿄의 안색은 밝아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마음이 그렇다 해서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는 걸 그만둘 생각은 없으니까. 섭 사형은?”
-담기량 일은 완전히 포기한 것 같습니다. 하긴, 기예잡술서가 세상에 나오지 않는데, 어디서 지도를 찾겠어요? 하하하.
“섭 사형의 심계가 깊다는 건 우리 사형제들 모두 아는 사실이야. 의심 사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래서 되도록 섭 사형의 시야에서 머물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대사형은?”
-얼마 전에 등선궁으로 갔다고 합니다.
“등선궁으로?”
-예, 사부님이 크게 벌을 내리실 줄 알았는데, 등선궁에서 한동안 근신하다 내려오라고 했다는군요. 벌인지 상인지 모르겠어요. 등선궁을 좋아하는 대사형 아닙니까?
“그곳에는 대사형을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겠군.”
-암요. 누구든 대사형을 죽일 수가 있겠지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누가 움직일지?
“지금 시끄러워지면 나도 사부님께 소집될 거야.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고 있는 일도 중단해야 하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후우, 걱정입니다, 사실. 그런 일이 지금 벌어지면 안 되는데.
“움직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섭 사형이야. 옆에서 잘 지켜봐.”
-알겠습니다. 구사저도 힘들겠지만 담기량의 은거지 찾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 주십시오.
“그래서 말인데, 일본에 있는 우리 가문 사람들을 불러와야겠어.”
-괜찮겠어요?
“실력은 부족해도 충성심이 뛰어난 사람들이야. 여기 몇 있는 네 부하들 가지고는 빠른 수색이 불가능해.”
-백도현이 함께해 준다면 정말 좋겠는데요. 그자가 열 사람 몫은 하고도 남을 거 아닙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 사람은 안 돼.”
료쿄의 차가운 목소리에 주성하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료쿄와 헤어져 한국으로 돌아온 도현은 이계로 갈 마음의 준비를 하며 홍영과 함께 며칠간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연락이 없어 용주를 불안케 했던 조 박사로부터 잘 있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현재 터키에서 뉴질랜드의 사무엘 박사와 팀을 이뤄 뭔가를 공동 조사 중이라고 했다.
용주는 조 박사에게 도현이 스톤의 에너지를 흡수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왜 말 안 했어?”
도현의 물음에 용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깜빡했네. 나중에 귀국하시면 그때 말씀드리지 뭐. 그나저나 김탁훈이, 운이 좋네.”
이계로 가기 전 도현과 용주는 김탁훈을 혼내 주려고 했지만 운이 좋은 건지, 김탁훈이 미국으로 출장을 가는 바람에 일을 뒤로 미뤄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현이 이계로 진입하는 날이 다가왔다.
이계의 복장을 갖춘 도현을 보며 용주가 확인하듯 물었다.
“루비는 챙겼어?”
“그래.”
“다음에 올 때는 반짝반짝하는 황금으로 바꿔 가지고 와라. 그쪽 세계의 루비는 영 품질이 안 좋아서 손해야.”
“알았어.”
“도현 씨, 무사히 돌아와요.”
홍영은 밝은 미소로 이계로 가는 도현을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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