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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35화 (235/575)

[235] 디 임팩트 10권 10화

도현은 2층으로 올라가 봤다. 리샤와 쿠린의 방은 텅 비어 있었고 급히 짐을 챙긴 듯한 흔적이 엿보였다.

“왜?”

2층을 내려온 도현은 자신의 방문을 서둘러 열어 봤다. 침대에 놓인 편지가 보였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못된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살기 위해 도망칩니다. 시장 광장에서 만난 디엘르 님이 대사제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시더니 저희들을 신전의 시녀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신전의 시녀가 되는 건, 곧 디엘르 님을 자주 만나게 된다는 뜻인데, 저희들은 디엘르 님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신전의 시녀가 되어 평생 신전에서 사는 것도 싫고요. 오래 섬기지 못해 죄송합니다, 주인님.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희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리샤와 쿠린 올림.

편지를 와락 움켜쥔 도현은 주방으로 가 물을 들이켰다. 취기가 싹 사라지고 정신이 다시 맑아졌다.

상황을 보니 리샤와 쿠린은 자신을 기다리다 신전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것 같았다.

‘어디로 갔을까?’

도현은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어 봤다. 편지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다크캐슬을 떠나 본토로 가려는 게 엿보였다.

그는 주방을 둘러봤다. 식긴 했지만 그를 위해 준비한 듯한 여러 저녁 음식들이 일찍 오지 않은 그를 원망하듯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현은 굳은 얼굴로 식은 수프를 몇 번 떠먹은 뒤 집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사람을 디엘르가 멋대로 부리려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도현은 어느 쪽을 먼저 방문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성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먼저 리샤와 쿠린을 찾아야 해.’

성내 건물의 지붕 위를 따라 바람처럼 이동하던 도현은 순식간에 성벽을 타고 넘어갔다. 성문으로 가는 대신 그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오래전 그날처럼 성벽을 넘은 것이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려면 돈이 필요하겠지. 리샤는 목걸이를 팔 가능성이 높아.’

몇 달 전 디엘르가 리샤의 팔을 베고 선심 쓰듯 준 황금 목걸이가 있었다. 성벽을 넘어 노스리어 구역에 도착한 도현은 그것을 떠올리며 늦은 시각에도 영업을 하고 있는 보석 상점을 찾아다녔다.

기부

고가의 보석이나 장신구를 취급하는 노스리어의 보석 상점들은 이중 삼중 철문과 철창으로 입구와 내부 시설을 보호했고 실력 좋은 경비들도 여러 명 존재했다.

또한 위협을 받을 상황에서는 호각을 불어 인근에 있는 사람들과 순찰 중인 스므차의 병사들에게 즉각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어서 여느 본토의 보석 상점들보다 안전한 편이었다.

이곳에선 다크캐슬에 준비 없이 온 도망자들로부터 고가의 귀금속을 본토보다 싸게 매입해 차익을 얻기도 하고 금화를 소지하기 편한 보석으로 교환해 주기도 한다.

“보석 박힌 황금 목걸이를 팔러 온 여자아이들이 있었냐고? 모르겠소. 알아도 말해 줄 수 없고.”

도현은 노스리어에 위치한 보석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리샤와 쿠린의 흔적을 찾았지만 상점의 주인들로부터는 정보를 얻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보석 상점에 고용된 경비에게 뒷돈을 건네며 정보를 수집하던 중 한 곳에 리샤와 쿠린이 들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안전하게 움직인 모양이군.’

도현은 성 밖에서의 경험이 거의 없는 리샤와 쿠린이 걱정됐다.

리샤와 쿠린이 다녀간 시간을 대충 확인한 그는 인근 여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누구?”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여관 사람에게 도현이 은화 한 개를 튕기듯 던져 주었다. 돈을 받은 사내는 그때서야 관심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여자들은 안 왔소.”

도현은 여러 여관을 돌며 리샤와 쿠린의 행방을 수소문해 봤지만 그녀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설마 빈민가의 여관에 갔을 리는 없고.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도현은 소녀 둘이 다크캐슬에서 꽤 떨어진 선착장까지 한밤중에 이동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엔 몬스터가 존재하진 않지만 사나운 맹수들이 가끔 출몰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런 정보라도 알고 있다면 리샤와 쿠린은 사람들과 같이 선착장으로 갈 것으로 예상됐다.

‘별일 없어야 하는데.’

도현은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노스리어의 술집과 상점 들을 둘러보다가 결국 마지막 장소에서 그녀들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자, 우리 숙녀님들, 어디에 돈을 거실 텐가?”

여관이 아닌 도박장에 온 리샤와 쿠린은 손에 든 은화를 꼼지락거리다가 세 번째 곤충에게 돈을 걸었다.

좁은 공간 안에서 경주를 하는 곤충들에게 돈을 거는 도박은 적은 돈을 걸고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돈을 걸자 곤충 경주 도박을 관리하는 도박장 사내가 곤충들을 출발시켰다. 그러자 테이블에 빙 둘러서 있는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자신들이 선택한 곤충이 1등으로 들어오기를 응원했다.

겉옷에 달린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서 있는 리샤와 쿠린은 세 번째 곤충이 1등으로 가다가 최후에는 꼴찌로 들어오자 아쉬움을 감추며 뒤돌아섰다.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해.”

리샤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도박장 벽 쪽에 길게 이어진 의자로 향했다.

“맞아. 세 번째 곤충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은 건 이상해. 도박장 관리인이 손을 썼을 거야.”

은화 다섯 개를 잃은 리샤와 쿠린은 의자에 앉아 도박장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들을 험상궂게 생긴 사내 두 명이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그들은 보석 상점에서 목걸이를 팔고 나오는 리샤와 쿠린의 뒤를 따라온 사람들이었다. 수상한 그들을 피해 그녀들은 여관이 아닌 눈앞에 보이는 도박장으로 뛰어들었고 그들도 도박장까지 따라 들어온 것이다.

“우리 돈을 노리는 것 같지?”

쿠린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 것 같아.”

“어쩌지?”

“걱정 마. 도박장에선 저들도 함부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할 테니까.”

“선착장을 가려면 도박장을 나가야 되잖아.”

쿠린이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리샤는 웃음을 보였다.

“이곳엔 우리를 위해 싸워 줄 사람들이 넘치니까, 그리 걱정 안 해도 돼.”

동이 틀 때까지 도박장에서 시간을 보낸 리샤와 쿠린이 도박장을 나서자, 잠시 한눈을 팔던 사내 두 명이 허겁지겁 쫓아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도박장 밖 거리에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리샤와 쿠린이 도박장에서 용병으로 고용한 다섯 명의 사내들이 무기를 들고 일렬로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도박장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로, 리샤가 준 금화 한 개씩을 받고 잠시 동안 용병이 되어 준 것이다.

“혼내 주세요!”

리샤의 지시에 용병들이 칼과 도끼를 꺼내 들고 달려들었고 강도들은 화들짝 놀라 도망치기 바빴다.

“호호호! 가자, 쿠린!”

자리를 피한 리샤와 쿠린은 아침 일찍 선착장으로 향하는 상단 무리를 발견하고는 은화 몇 개를 주고 재빨리 합류했다.

선착장이 보이는 언덕 위에서 도현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선착장이 웅장한 모습으로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듣던 것보다 더욱 규모가 있는데.’

바다처럼 넓은 블랙리버의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선착장엔 군선들 수십여 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수백 명의 병사들이 그 일대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수십여 척의 배들은 30여 년 전, 남부 대륙에서 올라온 스므차 일가의 병사들과 그를 따르는 주민들이 타고 온 것이다.

도현은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군선이 정박해 있는 선착장과 멀찍이 거리를 둔 곳에 상선 몇 척이 존재했다.

이곳을 통해 들어오는 상선들은 허리가 휠 정도로 비싼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상인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다크캐슬에 부족한 곡물이나 여러 물품 들을 비싸게 팔 수 있어서 이익이 남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날이 밝자마자 어제 도착한 상선에서 곡물이 옮겨졌다. 도현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다크캐슬에서 선착장으로 들어오는 마차 행렬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

그는 비호처럼 언덕을 내려와 선착장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을 거쳐 막 마차에서 내리는 리샤와 쿠린의 앞에 멈춰 섰다.

긴장 속에 선착장에 발을 디딘 그녀들은 눈앞에 도현이 서 있자 너무 놀라 둘 다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주, 주인님!”

“따라와.”

도현이 한적한 곳으로 걸어가자 리샤와 쿠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 뒤를 따라갔다.

“편지는 읽었다. 하지만 너희 살자고 뒤에 남은 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어. 너희들이 사라진 책임을 내게 물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니?”

도현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리샤와 쿠린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주인님.”

리샤가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이라면 뭐든지 하실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그저 제 생각만 했습니다. 쿠린을 설득해서 집을 나온 것도 저고요. 그러니 저만 벌해 주십시오.”

“아니에요, 주인님. 저도 리샤와 같은 마음이었어요.”

쿠린이 눈물을 흘리며 리샤 옆에 무릎을 꿇었다.

한동안 리샤와 쿠린을 내려다보던 도현은 털썩 주저앉았다.

“울지 마. 너희들이 우는 모습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니까.”

“네?”

“도망간 저희를 잡으려고 온 게 아니셨어요?”

리샤와 쿠린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도현을 쳐다봤다.

“내가? 천만에. 나도 디엘르가 싫단다.”

도현의 속삭임에 리샤와 쿠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미안하다. 내가 집을 오래 비우지만 않았어도 너희들이 이런 모험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 아니에요, 주인님.”

리샤와 쿠린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실은 너희들이 온 날, 우연히 2층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본토로 가고 싶다고 했지? 내게 검도 배우고?”

비밀스러운 음모를 들킨 사람들처럼 리샤와 쿠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도현은 근처에 있는 작은 돌 두 개를 주워 리샤와 쿠린의 앞에 놨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내가 두 가지 길을 제시하마. 하나는 저기 보이는 상선을 타고 이대로 다크캐슬을 떠나는 거야.”

“주인님.”

리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외롭고 힘은 들겠지만 세상을 보는 자유는 만끽할 수 있을 거다. 다른 하나는, 나와 함께 다크캐슬로 돌아가는 거야.”

리샤와 쿠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주인님, 성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니, 성 밖에 있는 내 제자의 집으로 간다.”

“주인님의 제자요?”

“그래. 내 제자의 가족도 다크캐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야. 며칠만 참았다가 그들과 함께 본토로 가면 되는 거지.”

“주인님, 무슨 차이가 있는 거죠?”

리샤가 물었다. 결국 다크캐슬을 떠나 본토로 가는 건 똑같아 보였다.

“어제 난 제자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너희들 얘기를 했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말이야.”

“저희들 얘기요?”

“난 집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 너희들이 본토로 가고 싶어 한다는 속내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너희들을 고향으로 가는 내 제자네 가족에게 떠넘기려고 계획을 세웠지.”

도현이 음침한 눈빛으로 말했지만 리샤와 쿠린은 전혀 겁먹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당황한 도현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허락을 했으니, 이제 너희만 원하면 그들과 함께 본토에서 살 수 있는 거야. 내 제자가 너희에게 검을 가르쳐 줄 수도 있고. 살다가 지겨워지면 나중엔 너희들이 가고 싶은 데로 떠나면 돼. 그들도 너희를 막지 않을 거고.”

“검을 배우다 크면 나중에 독립하라는 말씀이군요.”

리샤의 말에 도현이 빙그레 웃었다.

“핵심은 그거다. 자, 어느 길을 선택하겠니? 난 어느 쪽이든 너희들을 지지해 줄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선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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