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디 임팩트 10권 11화
리샤는 쿠린과 시선을 교환하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 주인님, 저희들이 사라지면 디엘르 님의 화를 어떻게 막으실 거예요? 주인님도 다크캐슬을 떠나실 거예요?”
“요 녀석들, 머리를 쓰는구나. 난 너희들과 함께 오늘 다크캐슬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험하시잖아요.”
“내가 디엘르를 무서워할 것 같니?”
도현의 여유로운 태도에 리샤는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전혀요. 주인님은 강하시니까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들 걱정이나 해.”
도현은 일어나 자리를 피해 줬다. 리샤와 쿠린이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눌 시간을 준 것이다.
“주인님, 결정했어요!”
강 위에 떠 있는 배들을 구경하는 도현의 등 뒤로 리샤와 쿠린이 다가왔다.
“저희를 벌주시지 않고 오히려 좋은 기회를 주신 점 고맙습니다. 저희는 주인님이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제자분의 가족과 지내겠습니다.”
도현은 리샤와 쿠린이 루드 가족과 틈이 벌어지지 않고 잘 지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제자의 이름은 에드고 나이는 열여덟이다. 너희들에게는 오빠가 되니까 잘 지내도록 해.”
루드와 앤, 토밀도 설명해 준 도현은 선착장에서 다크캐슬로 가는 마차를 세워 아이들과 함께 탔다.
흔들거리는 마차에서 도현은 리샤와 쿠린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지난밤에는 어디에서 지낸 거지? 여관을 다 찾아봐도 없던데.”
“도박장요.”
“응? 도박장?”
생각지 못한 장소에 도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거친 사내들로 붐비는 도박장에 10대 중반의 소녀들이 대담하게 들어갔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너희들을 다시 봐야겠구나.”
도현의 놀람 섞인 목소리에 리샤와 쿠린은 미소를 보였다.
사제 둘을 대동하고 신전을 나선 대사제 휴고스는 임종을 앞둔 신자의 집을 방문해 기도를 해 주고 돈을 기부받았다.
“다음 집이 어디지?”
사제의 안내를 받아 골목길로 들어선 휴고스는 아이를 낳은 집으로 들어가 일곱 신의 축복을 아이에게 내려 주며 역시 돈을 받아 챙겼다.
누런 이가 몇 개 남지 않은 나이 많은 휴고스는 말을 타고 가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고삐를 잡고 앞서가는 사제를 불러 세웠다.
“어제 시장 광장에서 만났던 그 여자아이들 집이 어디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대사제님.”
리샤와 쿠린이 사는 집을 파악해 둔 젊은 사제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쪽으로 가자. 어린것들이 신전의 시녀로 정해졌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 일찍 와야지, 감히 오지를 않아?”
말 등에 앉아 화를 내는 대사제의 모습에 두 사제는 급히 도현의 집 방향으로 말을 이끌었다.
얼마 후 도현의 집에 도착한 휴고스는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옷가지도 없다는 건 도망간 것을 의미했다.
“요 어린것들이 감히 일곱 신을 향해 반기를 들다니. 이 집의 주인이 누구냐!”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사제님.”
“내 이대로 디엘르 님을 찾아가 이 집의 주인과 그 어린것들에게 엄한 벌을 내리도록 하겠다!”
대사제 휴고스는 딘이 엉망으로 만든 신전 바닥을 원상 복구 해 놓느라 최근까지 신경을 이만저만 쓴 게 아니었다. 신전의 시녀들로 내정된 여자들이 사라진 사건은 예민해져 있는 그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휴고스는 자신의 말을 몰아 대저택이 있는 숲으로 향했다. 말이 없는 두 명의 사제들과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본보기를 보여야 되겠어. 성내의 사람들에게 이 휴고스의 힘을 보여 줘야 해.”
흰 사제복을 바람에 펄럭이며 한동안 말을 빨리 몰던 휴고스는 숲으로 난 길에 접어들었고 잠시 속도를 줄였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격렬한 말의 움직임을 오랫동안 버틸 수 없었다.
말을 느리게 몰며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전방에 도현이 불쑥 나타나자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안녕하셨습니까, 대사제님.”
“도둑놈이 여긴 웬일이냐? 감옥에서 풀려났으면 조용히 떠날 것이지.”
도현을 보고 움찔한 휴고스가 아랫배에 가득 힘을 모으고 말했다.
“모르셨습니까? 전 성내에 살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모르셨군요. 다행입니다. 전 혹시 알고서 제 사람을 건드린 줄 알고 실망했었거든요.”
“이놈! 무슨 소리냐!”
가까이 다가오는 도현을 경계하던 휴고스가 냅다 말을 몰아 그를 깔아뭉개려 했다. 좋은 사이도 아닌 도현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웠고 겁도 난 것이다.
달려오는 말을 피해 허공으로 살짝 뛰어오른 도현의 발등이 대사제 휴고스의 얼굴에 적중했다. 강한 충격에 의식을 잃은 휴고스가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고 주인을 잃은 말은 잠시 달리다 멈춰 섰다.
말을 끌고 온 도현은 휴고스를 어깨에 걸치고 숲 안쪽으로 말과 함께 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휴고스는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곁에 도현이 앉아 있었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휴고스는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안면이 얼얼한 게 통증이 심했다.
“네놈이 나를 때리다니! 일곱 신이 네놈의 육체를 조각조각 내서 저 지옥의 바다에 뿌릴 것이다!”
“먼저 말을 몰고 온 건 대사제님이십니다. 맞을 짓을 하셨지요.”
“이놈! 감히 천한 도둑놈 주제에 신성한 사제에게 맞을 짓을 했다니!”
그 순간 도현의 주먹이 날아왔다. 깜짝 놀란 휴고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천한 도둑놈에게 맞기 싫으시면 진정 좀 하십시오.”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춘 도현의 주먹을 쳐다보며 휴고스는 입을 다물었다.
“대화 좀 나누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오해 마십시오.”
“대화라니?”
좀 전보다는 누그러진 태도로 휴고스가 대꾸했다.
“어제 시장 광장에서 두 소녀를 신전의 시녀로 삼았는데, 그건 누구의 뜻입니까? 대사제님입니까, 아니면 디엘르 님입니까?”
“그걸 왜 묻는 것이냐.”
“두 소녀는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도현의 대답에 휴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네 사람이라고?”
“그녀들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휴고스는 어제 본 리샤와 쿠린을 떠올려 봤다.
“그래,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대저택의 시녀들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한데 그녀들이 왜 자네와 같이 살고 있는 거지?”
“부성주님이 제 시중을 들라고 보낸 아이들입니다. 영원히요.”
“영원히? 그 말은 대저택 사람이 아니란 뜻인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대답을 좀 해 주십시오. 어제 일은 누구 생각입니까?”
“당연히 디엘르 님의 생각이시지! 내게 성내 사람을 마음대로 신전의 시녀로 삼을 권한이 있는 줄 아는가?”
“조금 더 자세히요.”
도현의 손짓에 휴고스는 멍이 든 얼굴을 찡그리며 어제 일을 설명해 주었다.
“신전을 찾아온 디엘르 님과 함께 시장 광장으로 나갔네. 그런데 갑자기 두 소녀를 본 디엘르 님이 내게 사람이 더 필요하지 않느냐고 하셔서, 지난 몇 달간 신전을 복구하느라 사제들이 지쳤으니 허드렛일을 할 일꾼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갑자기 그분이 독단적으로 두 소녀를 신전의 시녀로 지목하신 거야. 그게 어제 일의 전부네. 난 그녀들이 자네의 사람인 줄도 몰랐고, 부성주님이 내린 선물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고.”
휴고스는 부성주 나담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스므차 성주가 없는 상황이라 모든 실권을 그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디엘르의 위상이 아무리 높아도 성주를 대신하는 부성주의 입김보다는 셀 수는 없다. 당연히 그는 이번 일로 부성주와 척을 지기 싫었다.
“그랬군요. 잘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말을 끌고 와 휴고스 앞에 세웠다.
“타십시오. 대저택으로 가서 디엘르 님을 설득해 어제 일을 없던 걸로 만드십시오.”
“내가 말인가? 터무니없는 소리 말게. 자네가 부성주님에게 청을 넣어서 없던 일로 하게.”
휴고스는 괜한 일에 끼어들어서 가장 강력한 지지자인 디엘르의 신임을 잃기 싫었다. 상황을 보니 사제를 사칭한 도현에게 대저택의 시녀들을 내린 부성주의 행동이 마땅치 않았던 디엘르가 일부러 그녀들을 신전의 시녀로 만든 것 같았다.
‘어림도 없지. 절대 안 돼.’
마음을 다잡는 그의 앞에 금화가 후두둑 떨어졌다. 수십 개에 금화가 숲을 투과한 햇빛을 받아 이리저리 황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신전에 기부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일곱 신의 지지를 받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일은 직접 나서야 될 때가 있고 사람을 동원해 해결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도현은 디엘르를 휴고스에게 맡겨 봤다. 그게 안 된다면 차후엔 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숲에서 휴고스를 기다리며 명상에 잠겨 있던 도현은 인기척이 들리자 조용히 눈을 떴다. 휴고스가 말을 끌고 숲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아주 힘이 들었네, 디엘르 님에게 신탁이 내려왔다는 말을 하기가 말이야.”
“그래도 하셨겠지요.”
“당연히 했지. 일곱 신께서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당신의 말씀을 전하길 즐기시는 분이니까. 오늘은 바로 자네의 입을 통해서 강림하신 거지.”
휴고스는 점잖은 얼굴로 소리 내어 웃었다.
“더는 두 소녀 문제로 자네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걸세.”
“수고하셨습니다.”
“신전에 자주 기부를 했으면 좋겠구먼. 그럼 우리 둘 사이가 오늘처럼 계속 좋을 텐데 말이야. 또 보세.”
도현은 대답 없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 그런데 리드만 사제는 어디로 갔나?”
휴고스는 숲을 나가려다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남부 대륙으로 가셨습니다.”
“허허,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몰라. 나처럼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멀어져 가는 휴고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신법을 발휘해 대저택으로 향했다.
한동안 기다렸다 집무실에서 부성주 나담을 만난 도현은 다크캐슬을 떠날 거라는 말을 꺼냈다.
“벌써? 내가 준 시녀들과 함께 산 지 며칠 되지 않았잖은가?”
“죄송합니다, 부성주님.”
“어디로 갈 건가?”
“브링틱으로 가려고 합니다.”
“브링틱?”
나담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거기라면 요즘 상당히 시끄러운 곳인데, 왜 가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고대 도시가 발견됐다고 들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전 이계의 수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자네가 사제로 변신해서 이곳에 온 이유도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니까. 하지만 아버지께선 이계의 수정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네.”
“스므차 성주님도 새로운 고대 도시가 발견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셨습니다. 이계 수정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담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 있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틀리지 않은 말이야. 하지만 내가 들은 정보에 따르면 그곳은 아주 혼란스러워. 독특하고 강한 몬스터들이 고대 도시 발굴 현장에 출몰해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기도 하고, 고대 도시 유적에서 발견된 보물을 두고 사람들끼리 다투기도 한다더군. 조심해야 할 걸세.”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현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나담이 물었다.
“아버지와 겨뤄 보겠다는 생각은 여전한가?”
“네. 다만 여기서 그분만 기다릴 상황이 아니라서요. 기회가 되면 또 찾아오겠습니다.”
“어머님이 리샤와 쿠린을 신전의 시녀로 삼았다고 들었네. 자네 성격을 생각하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는데,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지?”
문을 열고 나가려던 도현이 멈칫하며 뒤돌아섰다.
“알고 계셨습니까?”
“어머님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다 내 사람들이네. 모를 수가 없지.”
잠시 망설이던 도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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