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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37화 (237/575)

[237] 디 임팩트 10권 12화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성주님이 어머님과 극단적으로 싸우면서까지 그녀들을 지키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부성주님이 리샤와 쿠린을 제게 보낼 때 디엘르 님의 사전 동의를 얻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아마도 부성주님은 화난 디엘르 님의 입장을 고려해 제게는 이해하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포기하라고요.”

“사람 무안하게 정곡을 찌르고 있군.”

나담이 겸연쩍어하며 문 앞에 서 있는 도현에게 걸어갔다.

“다크캐슬을 떠날 때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는 못할 걸세. 어머님이 요즘 몸이 많이 편찮으셔. 내가 연로한 그분을 자극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리샤와 쿠린을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나담의 경고에 도현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다행히 일곱 신은 제 편이시더군요.”

“어머님이 마음을 바꾸셨다는 뜻인가?”

“조금 전 올라올 때 복도에서 디엘르 님과 마주쳤습니다. 신탁이 내려왔는데, 리샤와 쿠린은 신전의 시녀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놀랍군. 그런 신탁이 내려왔다고?”

“기부를 많이 하면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게 세상 이치인 것 같습니다.”

도현의 대답에 나담이 크게 웃었다.

“알겠네. 어머님이 마음을 바꾸셨다니 정말 다행이군. 그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도 좋네.”

“건강하십시오.”

정중히 인사를 한 도현은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융트

하늘은 맑고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다. 중무장한 많은 병사들이 선착장 곳곳을 경비하는 가운데 도현은 정박한 상선에 오르기 직전인 루드 가족과 리샤, 쿠린을 앞에 두고 미소를 보였다.

“왜 울고 그래.”

“이렇게 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푸른 눈의 리샤와 쿠린은 루드 가족과 며칠간 함께 지내며 금방 정이 붙었고 본토로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그날이 오자, 도현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들을 힘들게 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들을 진심으로 돕고 있는 도현의 행동에 그녀들은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는 건 비단 리샤와 쿠린만이 아니었다. 루드와 앤, 에드, 토밀 역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도현과의 이별에 다크캐슬을 떠난다는 기쁨보다 헤어짐의 슬픔이 커서 밝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도현은 눈물을 보이고 있는 리샤와 쿠린을 다독인 뒤 이를 악물고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토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토밀, 말썽 부리지 말고 고향에서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도록 해.”

“알겠습니다, 스승님!”

토밀은 당차게 대답하다가 지난 몇 달간 쌓인 도현과의 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스승님, 우리랑 함께 고향에 가요. 네?”

“토밀, 스승님 난처해하시잖아.”

동생을 말린 에드는 나이답지 않은 듬직한 목소리로 도현에게 말했다.

“스승님, 걱정 마세요. 제가 가족을 잘 보호해서 고향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리샤와 쿠린에게도 검을 전수해 주고요. 그리고 열심히 수련해서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도현은 눈빛이 맑은 에드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한번 찾아와 주시오. 고향에서만 나는 과일을 대접할 테니까.”

루드는 도현에게 자신의 고향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여러 번 설명해 주었고, 도현은 머릿속에 단단히 기억했다.

“기회가 되면 방문하죠.”

“어서 배에 오르시오!”

배 갑판장의 우렁찬 목소리에 도현은 움직이지 않는 루드 가족들을 봤다.

“비싼 승선비를 줬는데 이대로 배를 떠나보낼 생각은 아니겠지요?”

도현의 농담 섞인 말에 루드가 껄껄 웃었다.

“또 봅시다.”

루드 가족과 리샤, 쿠린이 상선을 타자, 잠시 후 배는 도현이 보는 가운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인님, 꼭 다시 만나요!”

멀어지는 배 위에서 양팔을 흔들며 외치는 리샤의 목소리가 강물을 타고 선착장에 서 있는 도현에게 전달됐다.

묵묵히 강 저편으로 사라지는 배를 응시하던 도현은 천천히 몸을 틀어 또 다른 상선을 향해 걸어갔다. 브링틱으로 한 번에 가는 상선이 없는 관계로 그는 일단 다크캐슬을 벗어난 뒤, 배가 멈추는 항구에서 브링틱으로 가는 또 다른 배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도현이 탄 상선은 바다라고 해도 무방할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하루를 꼬박 이동한 후, 뱃머리를 틀어 물결이 잔잔한 강변으로 접근해 갔다.

선착장 시설을 갖춘 항구도시가 나타났다. 배가 정박하자, 도현처럼 다크캐슬에서 배를 탄 여러 사람들이 재빨리 항구도시 곳곳으로 몸을 감췄다. 다크캐슬과 오가는 상선들이 들어오는 날에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파리처럼 꼬인다는 걸 그들도 아는 것 같았다.

‘나도 몸을 숨겨야 하나?’

영주 커딜과 이안이 보낸 추적자들을 떠올렸지만 도현은 굳이 몸을 숨기지 않았다.

도현은 브링틱으로 가는 여객선이나 상선 들이 있는지 항구 일대를 돌아다니며 조사하다가 새로운 사실을 접했다.

“회오리바람요?”

“그렇소. 매년 이맘때면 브링틱으로 가는 강 상류 부근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생성되지.”

도현이 타고 온 상선의 뱃사람들은 도현에게 그런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저 항구도시에서 알아보라는 말만 했을 뿐.

“그럼 브링틱으로 가는 배는 없습니까?”

“없소. 강 위에서 회오리바람을 어떻게 피한단 말이오? 거대한 배도 두 동강이 나고 회오리바람에 빨려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데.”

어선에서 일하는 나이 지긋한 어부는 생선이 든 상자를 들고 도현을 스쳐 지나갔다. 도현은 그 어부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회오리바람은 언제까지 생기는 겁니까?”

“앞으로 두어 달은 더 지속될 거요. 그 기간 동안은 브링틱에서 내려오는 배도, 위로 올라가는 배도 절대 블랙리버의 상류 지역을 통과할 수가 없지.”

두 달이면 너무 길었다.

“브링틱과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를 아십니까? 회오리바람의 영향이 없는 도시 말입니다.”

도현은 그곳까지라도 배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무거운 생선을 들고 가는데 자꾸 그렇게 말을 시킬 거요? 말을 시킬 거면 도와주든가.”

나이 든 어부의 핀잔에 도현은 서둘러 어부가 든 네모난 나무 상자를 대신 들어 줬다. 상자 안에는 아직 죽지 않은 생선들이 파닥거리고 있었다.

어부는 항구에 있는 작은 여관으로 가며 도현이 궁금해하는 사항을 척척 얘기해 주었다.

“영주 카비엘료가 다스리는 융트라는 항구도시가 있소. 그곳이 지금 그나마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브링틱과 가장 가까운 장소요.”

“여기서 떠나는 배가 있습니까?”

“3일에 한 번씩 떠나는 배가 있지. 아마 내일일 거요. 승선권은 저기 사람이 나오는 건물에서 사면 되고.”

생선 상자를 든 도현의 시선이 거리 양옆으로 늘어선 석조 건축물 중 한 곳으로 향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디서 주무실 거요?”

“예?”

“아니, 내 아들이 여관을 운영해서 말이오. 딱 보니 이 지역 출신은 아닌 것 같고. 내일 배를 타려면 주무실 곳이 필요할 것 같아서.”

“방은 깨끗합니까? 음식은 맛있고요?”

“방은 낡았지만, 우리 집 생선구이는 일품이지. 아마 맛보면 놀랄 거요.”

“손님에게 이런 걸 들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현의 넉살에 늙은 어부가 과장된 동작으로 생선 상자를 다시 들었다.

“한번 봐주시오.”

생선 상자를 들고 웃는 늙은 어부의 모습이 꼭 하회탈을 닮아서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부의 아들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하루를 묵은 도현은 다음 날, 융트로 가는 배를 탔다.

그리 크지 않은 여객선의 승객들 대부분은 무장을 한 용병들이었는데,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브링틱에 용병의 수요가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위험해도 보수가 크니 안 갈 수가 없잖아.”

“그럼. 막말로 도적들을 막는 상단 임무도 위험하긴 매한가지 아닌가? 이럴 땐 사람들 많은 곳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며 높은 보수를 받는 게 제일이지.”

“자네 뭘 좀 아는군, 크하하하.”

갑판 이곳저곳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는 용병들을 바라보던 도현은 선미에서 들리는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함선 세 척이 위풍당당하게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작은 여객선 정도는 그대로 파괴하고 지나갈 수 있는 위용이었다.

“베일 가문의 배다!”

함선에 나부끼는 깃발을 확인한 누군가가 외쳤다.

베일 가문이라는 말에 도현은 사막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릴리아.’

그가 용병으로서 호위하던 릴리아를 쫓던 곳이 바로 베일 가문이었다.

‘노인의 이름이 케일이었지?’

도현은 이디언의 낙타 강화 마법을 파괴하려 할 때 자신을 막아섰던 검은 수염의 노인이 생각났다.

검술도 뛰어났고 마나도 가지고 있어서 힘이 굉장했다. 한석호와 비슷할 정도로 강해서 인상이 깊었다.

‘베일 가문의 배가 여긴 왜 나타났을까? 혹시 브링틱 주변에서 발견됐다는 고대 도시 때문인가?’

도현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베일 가문의 거대한 함선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함선에 탄 수많은 병사들이 보였다.

쉬이이이익.

거대한 돛대에 바람을 한가득 안은 거대한 함선 세 척은 거센 물살을 만들며 여객선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고 그 영향으로 작은 여객선이 좌우로 요동쳤다.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도현은 점점 멀어지는 베일 가문의 배를 응시했다.

도현이 베일 가문의 배를 다시 목격한 곳은 다름 아닌 항구도시 융트였다.

함선 안의 병사들은 항구에 발을 디디지 않고 명령을 기다리듯 배 안에 머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도현은 여객선이 정박하자 배 옆으로 내려진 하선용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배에서 내리며 보니 멀리 언덕 위에 요새 같은 성이 눈에 띄었다. 높이 올라온 첨탑과 거대한 흰색 성벽이 난공불락의 위세를 뽐내는 듯했다.

‘저곳이 영주 카비엘료의 성인가 보군.’

배에서 내린 도현은 선착장을 벗어나기 전,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로 무장한 수백 명의 병사들 사이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 끝에는 3미터 정도 되는 동상이 서 있었는데, 배를 통해 융트로 들어오는 모든 여행객들은 그 동상에 입을 맞춰야지만 비로소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저 동상은 누구입니까?”

도현의 물음에 옆에서 걷던 용병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영주 카비엘료의 동상이오.”

“그렇군요.”

도현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좌우를 살폈다. 길게 도열한 수백 명의 병사들은 영주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액세서리 같은 존재들 같았다.

도현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앞으로 몸을 숙여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맞춘 동상의 발 부위에 입을 가볍게 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을 맞췄는지 발톱 부위가 반들반들했다.

‘대체 이 지역의 영주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짓을 시키는 거지?’

넓은 선착장을 벗어난 도현은 도시 내부로 들어가며 멀리 보이는 언덕 위의 성을 쳐다봤다.

“영주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러자 높은 단 위의 황금 의자에 앉아 있던 영주 카비엘료가 표정 없이 말했다.

“그대가 베일 가문에서 뛰어난 검술 솜씨로 유명한 케일 경인가?”

“과찬이십니다.”

“내 귀에 그대의 소문이 들릴 정도면 사실이겠지.”

중년의 카비엘료는 턱수염을 훑으며 물었다.

“한데 여긴 무슨 일로 온 건가?”

“대공께서 영주님께 전해 드리라는 전언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케일 경이 품에서 봉인된 서신을 꺼내자 시립해 있던 영주의 신하가 다가와 그 서신을 받아 카비엘료에게 두 손으로 바쳤다.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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