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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38화 (238/575)

[238] 디 임팩트 10권 13화

서신을 읽은 카비엘료가 케일 경을 한동안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데리고 온 병력이 몇이지?”

“천여 명입니다.”

“앞으로 더 올 병력은?”

“그때도 천여 명 정도 됩니다.”

“모두 합해 2천이군. 적은 수가 아니야. 용맹하기로 소문난 베일 가문의 병사들이 그렇게 한 번에 많이 들어오면 내 영지의 사람들이 불안해할 거야.”

카비엘료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케일 경이 차분히 말했다.

“신속히 영주님의 영지를 통과해 브링틱으로 가겠습니다.”

카비엘료는 서신을 손가락에 끼워 팔걸이에 톡톡 때렸다.

“그런데 말이지, 조금 불쾌해. 그대 말을 들어 보면 내가 반드시 허락을 할 거라는 투로군.”

“그렇지 않습니다, 영주님.”

“아니야. 그대의 주인이 보낸 이 서신도 그래. 재작년 내 장남의 결혼식에 내가 정중히 초청장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 한 명 보내지 않았지. 그렇다면 그에 대한 사과가 먼저 이 서신에 쓰여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인가?”

케일 경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것은…….”

“아직 내 말 끝나지 않았네.”

카비엘료가 케일 경의 말을 막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단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황금 실로 수놓은 풍성한 카비엘료의 옷들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대가 타고 온 함선 세 척은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여도 당장 불길에 휩싸일 걸세.”

“영주님.”

“황금이면 얼마든지 내 영지를 마음대로 통과하게 해 줄 줄 알았나? 그렇다면 잘못 생각한 거야. 내가 이 지역에서는 왕이야!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말이지!”

케일 경 눈앞에서 카비엘료는 베일 가문의 수장이 보낸 서신을 거칠게 흔들었다.

“제아무리 강한 베일 가문이라도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는 아무 힘도 없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를 왕처럼 존중하고 예우해 줘야 해. 그러지 않으면 너희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도 얻지 못할 테니까!”

격한 몸짓으로 힘주어 말한 카비엘료는 케일 경의 귀에 입을 바짝 붙이며 소리쳤다.

“내 말 이해했는가!”

“……네.”

“좋아! 그렇다면 내 조건을 얘기하지.”

단 위의 황금 의자에 착석한 카비엘료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차분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베일 가문의 병력이 내 영지를 통과해 브링틱으로 가기를 원한다면, 베일 가문은 네 개 항을 약속해야 한다. 첫째, 통과 대가로 지불할 황금은 이 서신에 적힌 것의 두 배로 할 것. 둘째, 내 영지에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싸움을 벌이지 말 것. 셋째, 브링틱 인근에서 발견된 고대 도시를 탐사하고 있는 내 부하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말 것. 넷째, 베일 가문이 보호하고 있는 내 사촌 동생을 즉시 참수해 보낼 것.”

물 흐르듯 말하는 카비엘료의 조건을 다 들은 검은 수염의 노인 케일 경이 정중한 태도로 답했다.

“사촌 동생분의 목은 이미 참수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저희 함선 안에 보관 중입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황금은 두 배가 아닌 세 배의 양을 이미 가지고 왔습니다. 그 또한 함선 안에 보관 중입니다.”

“서신에는 그런 내용이 없던데.”

“좋은 내용은 뒤에 알릴수록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베일 가문은 이미 카비엘료의 예상되는 반응을 다 계산해서 온 듯했다.

“영주님의 영지를 통과하는 동안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없을 것을 병력을 책임진 제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또한 브링틱에서 영주님의 세력과 부딪치지 않겠다는 부분은 대공께서 보낸 서신에 적혀 있을 것입니다.”

“경의 말이 맞소.”

카비엘료는 자신과 맞서다 도망간 사촌 동생의 목을 가지고 왔다는 케일 경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오랜 항해로 배 위의 병사들이 지쳐 있습니다. 하선해도 되겠습니까?”

케일 경의 말에 카비엘료는 좌우에 시립해 있는 여러 신하들을 보며 말했다.

“베일 가문의 손님들이 왔으니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라!”

융트의 상점에서 지도를 산 도현은 거리로 나왔다.

붉은 석양이 도현의 머리 위를 거쳐 그가 보는 지도 위에 쏟아졌다.

브링틱으로 가는 길이 표시된 지도는 육로로 갈 계획인 도현에게는 필수적인 준비물이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제법 걸리겠는데.”

융트에서 브링틱으로 가기 위해서는 험악한 자연지형을 통과해야만 했다. 높은 산맥과 거대한 늪지대, 때때로 보이는 몬스터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브링틱으로 오가는 이유가 단순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브링틱으로 가는 육로가 그만큼 험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도현은 물에 젖어도 그림이 번지지 않는 지도를 둘둘 말아 가방 안에 넣었다.

거리엔 외지에서 온 용병들로 넘쳐 났고 순찰을 도는 병사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회오리바람 영향으로 브링틱으로 가는 뱃길이 끊기면서 용병들이 융트에 몰려든 것이다.

‘여기서 하룻밤 묵고 내일은 말을 사서 이동을 해야겠어.’

여관을 찾아 거리를 걷던 도현의 시선에 사자 깃발을 휘날리며 행군하듯 다가오는 베일 가문의 병사들이 보였다.

‘저 사람들도 영주의 동상에 입을 맞췄을까?’

엉뚱한 상상을 하며 병사들을 구경하던 도현은 선두에서 걸어오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과 우연히 시선이 교차했다.

‘이런!’

도현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사막에서 검을 겨룬 케일 경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날 알아본 걸까?’

그가 케일 경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는 것처럼, 케일 경도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지?’

사막에서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싸운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릴리아의 용병으로서 활약했던 것뿐이다. 지금은 그저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케일 경이 얼마나 고려할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물론 싸움이 벌어져도 두렵지는 않았다.

‘이디언은 내게 원한을 품고 다크캐슬까지 쫓아왔다. 그도 내게 감정이 좋을 리는 없겠지.’

케일 경의 시선을 회피했던 도현은 돌렸던 고개를 천천히 원위치해서 병사들의 선두에 있는 케일 경을 다시 응시했다.

생각해 보니 뒤늦게 그의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알아봤다면 시선을 회피하는 행동이 겁쟁이처럼 보였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자연스레 그를 지나치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싸움이 벌어져도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결국 도현은 피하지 말고 전면을 봐야 하는 것이다.

도현을 발견하고 계속 주시하고 있던 케일 경은 도현이 다시 자신을 보자 옆에 서 있는 부대장에게 지시했다.

“병사들을 도시 밖에 주둔시키게.”

“예!”

케일 경은 행군하는 병사들의 행렬에서 벗어나 홀로 도현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만 보고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누군가. 우리 아는 사이지?”

“안녕하셨습니까?”

“사막에서 자네 때문에 내가 꽤 힘들었어.”

“용병으로서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악의는 없었습니다.”

도현은 절제된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아, 도망쳤던 릴리아는 결국 내가 사로잡았으니까.”

“그녀가 잡혔습니까?”

도현은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약간 놀라워하며 물었다. 상황상 빠른 낙타를 타고 도주하던 그녀를 낙타가 전멸한 케일 경 일행이 잡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릴리아가 무사히 사막을 통과해 안개 도시로 간 줄 알았다.

“아무리 빠른 낙타도 걷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법이지.”

릴리아의 낙타에 문제가 발생했었나 보다.

“그렇군요.”

도현은 릴리아의 생사에 관해 묻지는 않았다. 이미 그가 관심을 기울일 만한 시기도 상황도 아니었다. 모든 건 반년 전, 그때에 끝이 났다.

“그녀 입을 통해서 자네가 사막 도시에서 구한 용병이란 사실을 들었지. 난 자네가 그녀의 부친인 안개 도시의 성주가 특별히 보낸 자인 줄 알았거든. 용병이라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나? 고작 금화 몇 개에 고용한 용병이 베일 가문의 마법사에게 부상 입히고 내 얼굴에 모래를 뿌리고 달아났으니 말일세.”

케일 경은 씁쓸하게 웃으며 행군하는 베일 가문의 병사들을 한동안 바라봤다.

“이곳엔 웬일인가? 누구에게 고용되어 온 건가?”

“아닙니다.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겁니다.”

“흠, 자네도 다른 용병들처럼 브링틱으로 가는가 보군.”

도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자네 정도 실력이면 어느 영주라도 탐을 낼 만해. 난 젊었을 때 자네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

케일 경의 칭찬에 한바탕 싸움을 각오했던 도현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분위기가 그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제게 무척 화가 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도망가는 제 뒤에서 욕도 하시고 말입니다.”

“그랬지. 자네 같으면 화가 안 나겠나? 그 상황에서.”

“지금은 어떻습니까? 저와 풀어야 할 은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이군.”

케일 경은 낮게 웃으며 꼬리를 보이는 베일 가문의 행군에서 시선을 뗐다.

“아무리 그래도 난 베일 가문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일세. 자네는 일개 용병이고. 내가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 해서 나에 대한 존중을 잊어선 곤란해. 난 언제든 사막에서의 일로 자넬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렇습니까? 제 질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도현은 정중한 말투로 케일 경에게 말했다.

“도시 밖에서 야영을 할 걸세. 오늘 밤, 나를 찾아오게.”

“무슨 일 때문이신지?”

“그때 얘기하지. 길거리에서 말할 일이 아니니. 아무튼 함정은 아니니까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지 않아도 되네. 아! 오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집요하게 자넬 추적할지 기대하게.”

케일 경은 뒤끝 있는 한마디를 남겨 두고는 앞서간 병사들을 따라 도현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무슨 일일까?”

도현은 자신을 보자마자 칼을 뽑아 달려들 줄 알았던 케일 경이 말만 하고 사라지자 그의 의도가 무척 궁금해졌다.

늦은 밤, 도시 밖 들판에 펼쳐진 베일 가문의 군영에 도현이 도착했다.

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군막에는 편지를 작성하는 케일 경이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늦게 왔군. 앉게.”

누런 종이에 글을 쓰던 케일 경이 탁자 맞은편 의자를 권했다.

융트에서 공수해 온 것으로 보이는 의자에 앉은 도현에게 케일 경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거의 다 됐으니까.”

한 자 한 자 고심하며 편지의 글을 작성하는 듯한 케일 경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은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군막 한쪽에는 거대한 지도가 세워져 있었는데, 카비엘료의 영지를 벗어나 브링틱으로 갈 병사들의 이동로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저 방향으로 가도 되나?’

케일 경의 군막에 세워진 지도는 도현이 상점에서 구입한 지도보다 훨씬 세밀하고 자세히, 지역과 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필요하면 베껴 가게.”

케일 경의 말에 지도를 살피던 도현은 무안한 얼굴로 지도에서 시선을 뗐다.

“다 됐군.”

편지를 작성한 케일 경은 밀봉을 한 후 겉에 자신의 인장을 찍어 밖에 대기 중이던 전령에게 서신을 건넸다.

“실수 없이 전하도록.”

“예!”

전령이 나가자 케일 경은 은색 잔에 술을 따라 도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마시게. 카비엘료의 연회장에서 가지고 온 술이야. 맛이 괜찮더군.”

도현에게 술잔을 건넨 뒤 케일 경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원정군을 이끌고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술을 한 모금하는 케일 경의 얼굴엔 피곤함이 엿보였다.

“자네, 고향이 어딘가?”

“고향이라고 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도현은 술잔에서 입을 떼며 답했다.

“그런가? 혹시 몰락한 어느 영주 가문의 사람은 아니고? 사막에서 날 상대하던 검술을 보면 막 배운 솜씨는 아니던데. 깊이가 있고 전통이 있어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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