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39화 (239/575)

[239] 디 임팩트 10권 14화

케일 경은 어느 방향에서든 자신의 검을 막아 내고 반격하던 도현의 놀라운 검술을 잠시 떠올리다가 술잔을 비웠다.

“뭐 아무래도 좋네. 그걸 따지자고 물어본 건 아니니까. 지금이 중요한 것이지.”

케일 경은 의자에 기댔던 등을 꼿꼿하게 세우며 앞에 앉은 도현의 눈을 봤다.

“내가 자네를 보자고 한 건, 기회를 주기 위해서네.”

“기회요?”

“내 사람이 되어 보겠나? 내게 충성을 맹세하면 내가 자네의 후견인이 되어 주지.”

도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애써 숨기며 술잔을 내려놨다. 자신을 영입하려는 말이 케일 경의 입에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난 영지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지만 베일 가문 내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네. 더구나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아 자식도 없어. 내가 죽으면 나의 모든 것을 자네가 물려받을 수도 있지. 어떤가?”

“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오래 본 사이도 아닌데요.”

“그럼 내가 누구에게 제안을 할까? 실력은 개뿔도 없는 녀석들에게 말을 할까? 난 가는 시간이 아까운 나이일세. 주변을 둘러봐도 당장 자네만 한 사람이 없어.”

허심탄회하게 말을 한 케일 경은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계속했다.

“살아오며 내 사람을 만들어 놓지 않았더니 나이가 드니 피곤해. 가문 내에서 날 공격하는 자들도 적지 않고. 자네가 내 사람이 되어 준다면 내 시름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아서야.”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렵겠습니다.”

“떠돌이 용병보다는 나와 같이 다니는 게 좋을 텐데.”

“자유로운 게 좋습니다, 구속되지 않은.”

“자유라.”

케일 경이 피식 웃으며 술을 길게 마셨다.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면 그 자유란 것도 별 게 아니지. 내게 오게. 내가 죽기 전 자네를 영주로 만들어 주지. 무슨 수를 쓰든.”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도현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싫은가 보군.”

말없이 술잔을 바라보는 도현의 행동에 케일 경이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케일 경.”

“브링틱으로 간다고 했지?”

“예.”

“나도 브링틱으로 가네. 그곳에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야. 생각이 바뀌면 날 찾아오게.”

“그러죠. 술 잘 마셨습니다.”

도현은 술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이디언과 제 얘기를 아십니까?”

“이디언? 자네와 무슨 일이 있었나? 그녀는 사막에서 나와 헤어졌네.”

“사막에서의 일 때문에 저와 몇 달 전 부딪친 적이 있습니다.”

“콧대 높은 여마법사라 사막에서의 일로 자네에게 원한이 깊었나 보군.”

케일 경은 보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한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베일 가문의 사람이 아니네. 자네와 그녀 사이의 일엔 개입하지 않을 걸세.”

“그렇군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군막 밖으로 나가는 도현의 등을 보며 케일 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브링틱에 가게 되면 인근에서 발견된 고대 도시 때문에 용병들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걸세. 물론, 자네도 그걸 알기에 가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베일 가문과 적이 되지 말게.”

“또 뵙죠.”

도현은 담담한 눈빛으로 군막을 나섰다.

항구도시 융트를 떠난 도현은 며칠 후 구름이 쉬어 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알레빙스 산맥에 도착했다.

동서로 가로지르는 알레빙스 산맥은 영주 카비엘료의 땅과 브링틱을 나누는 주요 경계 지점이기도 했다. 창날처럼 뾰족한 봉우리를 갖춘 수많은 험산들이 버티고 서 있는 이 산맥은 무성한 수림과 깊은 협곡으로도 유명했다.

우우우우. 후우우웅.

깊은 협곡을 따라 걷는 도현의 귓속으로 여인네의 흐느낌 같은 괴이한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협곡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가 오싹하구나.’

도현은 좌우로 솟은 협곡을 올려다봤다. 산 중앙을 반으로 잘라 길을 낸 것처럼 높기 그지없었다.

바람은 온화한데 귀곡성과 같은 협곡의 바람 소리와 분위기는 길을 지나는 여행자들의 몸을 차갑게 만들기 충분했다.

‘빨리 통과하자.’

지금까지 길 위에서의 시간을 되도록 절약하며 온 도현은 이번에도 신법을 발휘해 협곡을 순식간에 벗어나 버렸다.

협곡을 벗어나자 빽빽한 수림과 함께 높은 산들이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앞서가는 용병들도 보였다.

도현은 높은 나무의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를 밟으며 앞서가는 용병들을 추월했다.

“이봐, 금방 위로 뭔가 지나간 것 같지 않아?”

“글쎄, 난 못 봤는데?”

도현은 부러지기 쉬운 얇은 나뭇가지도 가볍게 툭툭 차며 위로 올라갔고 산을 넘어가는 용병들과의 격차는 늘어만 갔다.

얼마 뒤 산 중턱에서 또 한 무리의 용병들과 조우한 도현은 그들마저도 추월한 뒤, 나중에는 길게 이어진 넝쿨을 잡고 100여 미터가 넘는 암벽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가기도 했다.

수통의 물을 마시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 도현은 점점 기세를 더해 가는 높은 산으로 다시 뛰어들어 갔다.

그는 일주일은 걸린다는 산맥 통과 시간을 3일로 줄일 생각이었다.

콰쾅!

천둥 벼락과 함께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절벽에 난 길을 통과하던 도현은 빗물에 미끄러지던 발의 중심을 잡다가 휘몰아치는 강풍에 하마터면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방심했어.’

비와 강풍을 우습게 보고 걷던 도현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절벽의 길을 어렵게 통과한 도현은 산 아래로 내려와 길게 이어진 평평한 숲으로 들어갔다.

오전부터 내린 비는 도저히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시커멓게 변해서 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밤처럼 어두웠다.

콰콰쾅! 쿵쿵!

하늘에선 연신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나무 아래서 겨우 비를 조금 피하며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지도를 꺼냈다.

‘오른쪽이란 말이지.’

도현은 숲의 배후에 시커멓게 서 있는 또 하나의 산을 보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쏴아아아아.

폭우는 세상을 다 뒤덮을 듯 쏟아졌다. 그것은 산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집채만 한 바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어두운 산속에서 쉴 만한 곳을 찾던 도현을 향해 바위가 굴러떨어진 것이다.

쿠쿠쿵쿵쿵.

폭우 소리에 감춰졌던 바위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란 도현은 피하기에는 늦었다 판단을 내렸는지 양손에 순간적으로 막대한 내공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회전하는 바위와 도현의 손바닥 사이에서 큰 충돌음이 연이어 났다.

산 위에서 굴러온 집채만 한 바위가 가진 힘과 파괴력이란 실로 대단해서 도현은 계속 뒤로 밀려 나갔고, 이를 악문 그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으으으.”

단전의 활화산 같은 내공의 힘도 거대한 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치이이이.

도현의 손과 바위 사이에서 뜨거운 것을 식히는 소리가 나며 순간적으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강한 내공이 바위의 회전력을 죽이며 발생하는 마찰에 따른 열기가 빗물에 식는 소리였다.

‘손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둥근 모양의 바위는 얼마나 큰지 도현을 산 밑으로 밀어내면서도 인근 나무들을 연이어 부러트리고 있었다.

쿠쾅쾅쾅.

수십여 미터를 밀려 내려가던 도현은 불현듯 손목에 차고 다니던 투명한 손목 보호대가 떠올랐다. 다크캐슬의 역대 성주들이 잠들어 있던 고대 지하 유적에서 얻은 것으로, 칼날도 버티는 강도를 지녔다.

‘한번 사용해 볼까?’

호흡을 가다듬던 도현은 찰나의 순간에 양손을 뗀 후, 오른쪽 손목 보호대를 바위에 밀착시켰다.

까까캉캉캉.

바위의 거친 면들이 손목 보호대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온몸의 힘과 내력을 오른쪽 팔에 집중한 도현은 손목 보호대를 방패처럼 이용해 바위의 힘에 대항했다.

‘힘이 현저히 줄어들었어.’

집채만 한 바위가 내는 압도적인 힘도 도현이 폭발적으로 뿜어내는 막대한 내공의 힘과 나무들의 희생에 점차 시들해져 갔다.

그러나 도현의 바로 뒤에는 벼랑이었다. 더 이상 밀려선 곤란했다.

“이야야야!”

도현은 처음으로 단전의 모든 힘을 개방했다. 쌍둥이 폭포에서 슈빅타이런을 잡으며 쌓은 내공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전력을 다한 행동이었다. 그 기세에 도현의 갑옷이 찢어지고 짐 가방은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벼랑으로 밀려나던 도현의 몸이 벼랑 끝 앞에서 더 이상 밀려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버텼다.

“이야!”

맹호의 울음소리 같은 도현의 기합 소리가 폭우를 뚫고 사방으로 퍼져 갔다.

집채만 한 바위가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인간의 힘이라고 믿기지 않는 거력으로 집채만 한 바위를 조금씩 경사진 산 위로 밀어내던 도현은 순간적으로 뒤로 몸을 뺐다가 옆으로 굴렀다. 멈췄던 바위가 도현이 서 있던 자리를 지나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쿠우우웅.

묵직한 울림이 전달되었고 도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가 쏟아지는 산에 드러누웠다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전신의 모든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바닥난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도현은 호심공을 발휘하며 빗속에서 움직이다가 작은 오두막집을 발견했다. 산맥을 돌아다니는 약초꾼들이 있다던데, 그들이 쉼터로 사용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불이 켜져 있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 안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대여섯 명의 용병들이 무기를 잡고 경계했다. 그들도 도현처럼 브링틱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중간에 비가 너무 오자 원래 길에서 조금 벗어나 근처에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다가 이 오두막집을 발견한 것이다.

“브링틱으로 가는 용병입니다. 저도 좀 쉴 수 있을까요?”

경계심을 품고서 바라보던 용병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무기를 내려놨다.

“혼자서 가는 길이오?”

일행의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육포를 씹으며 물었다.

“네.”

도현은 대답을 하며 오두막집 내부를 가볍게 둘러봤다. 살림살이 하나 없는 빈집이 분명했다. 다만, 화로가 하나 비치되 있어 먼저 온 용병들이 화로에 불을 피운 것 같았다.

‘화로는 약초꾼들이 준비해 둔 걸까?’

도현의 시선이 화로 곁에 수북이 쌓여 있는 마른 장작으로 향했다.

“비가 와서 마른 나무를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도현이 짐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우리가 구한 게 아니요. 이 빈집에 있었던 거지.”

여섯 명으로 이뤄진 용병대 대장이 답했다.

“그렇군요.”

화로를 준비한 사람이 나무도 미리 마련해 놓은 것 같았다.

도현은 벽에 기대어 앉아 가방에서 약통을 꺼냈다. 융트에서 꽤 비싸게 구입한 것으로, 상처에 바르면 좋은 연고 형태의 약이었다.

바위를 막으며 생겨난 손바닥 상처에 황갈색 약을 바르는 도현에게 중년의 용병대 대장이 물었다.

“몬스터에게 습격이라도 받았소?”

갑옷 곳곳이 찢어진 도현의 행색이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아닙니다. 바위를 막다가 조금 다쳤습니다.”

도현의 대답에 용병들이 비웃었다. 어딘지 말이 안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산짐승이라도 만나서 도망가다 산에서 구른 모양이군.”

“그러게 말이야. 난 또 혼자서 산맥을 넘는다기에 한가락 하는 용병인 줄 알았지.”

자기들끼리 속닥이는 대화였지만 도현이 뻔히 들을 줄 알면서도 하는 얘기였다.

도현은 못 들은 척하며 가방에서 마른 육포를 꺼내 입에 넣었다.

화로에 가서 옷을 좀 말리고 싶었지만 여섯 명이 빙 둘러앉아 그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으니 도현은 불만이 없었다. 작은 일로 다툼을 만들기도 싫었고.

‘날이 밝으면 바로 출발하자. 그때까지는 비가 그치겠지?’

도현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밤은 깊어 갔고 오두막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는 계속됐다. 화로에 둘러앉은 용병들은 음담패설을 나누다가 하나둘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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