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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40화 (240/575)

[240] 디 임팩트 10권 15화

오두막집의 화롯불이 많이 약해져 있을 무렵, 도현은 눈을 번쩍 떴다. 누군가 문을 조용히 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찾은 도현은 문을 연 상대를 확인하고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소녀가 문 앞에서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서 있었던 것이다.

“모두 자고 있네.”

가죽으로 만든 상의에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은 소녀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만 빼고.”

도현을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킨 소녀는 손을 내리고 저벅저벅 화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일어나, 다들 일어나.”

긴 장화로 자고 있는 용병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깨운 소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금 조각들을 꺼내 바닥에 뿌렸다.

“날 도와줘. 그럼 그만큼 더 줄게.”

자다 일어난 용병들은 처음엔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해 황당해하다가 나중에서야 바닥에 있는 적지 않은 금 조각에 욕심이 생겼다.

“넌 누구냐?”

용병대 대장이 대원들에게 금 조각을 챙기라고 눈짓을 주며 소녀에게 물었다.

“약초꾼 딸.”

“이 근방에 사냐?”

“응.”

소녀는 아름답지만 어딘지 말투가 굉장히 딱딱했다.

“대장, 여자애가 좀 이상해 보이는데요?”

“머리가 떨어져 보이기도 해.”

“조용히 못 해!”

대장이 대원들의 입을 단속하며 소녀에게 미소를 보였다.

“뭘 도와 달라는 거지?”

“우리 집 근처에 몬스터가 살아. 가서 잡아 줘.”

“몬스터?”

“응.

“어떤 몬스턴데?”

“몰라, 늑대처럼 생겼어.”

“대장 하급 몬스터가 아닐까요? 센 몬스터면 이 여자아이는 벌써 죽었겠지요.”

용병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소녀가 어딘지 수상쩍었지만 금을 더 준다는 말에 혹했다.

“요년, 만약에 우리를 유인하는 거라면 가만 안 둘 테다!”

용병대 대장이 도끼를 뽑아 소녀의 발밑에 내려찍었다. 나무 바닥에 깊숙이 박힌 도끼가 은은한 화로의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가자.”

보라색 머리칼의 소녀는 문으로 향했고, 여섯 명의 용병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결국 무기를 챙겨 들고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당신은 안 와?”

소녀가 문밖에서 도현에게 물었다.

도현은 소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정상인 듯 보이기도 하고 비정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 몬스터 퇴치 때문에 찾아온 건가? 너무 이상하잖아.’

도현은 비를 맞고 서 있는 용병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정말 이 소녀를 따라갈 겁니까?”

“그렇소.”

“어느 부모가 밤 깊은 이 시각에 딸을 혼자 보내서 용병들을 구해 오게 한단 말입니까.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도현의 지적에 용병들이 껄껄 웃었다.

“그럼 이 소녀가 도적이라도 된단 말이오?”

“신중할 필요는 있지요.”

“관두시오. 소녀 부모가 몸이 아플 수도 있는 거 아니오.”

소녀는 도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가자.”

용병들을 데리고 빗속으로 사라지는 소녀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도현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사람을 단번에 홀려서 데리고 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소녀의 등장은 그만큼 기이했다.

소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따라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도현은 유혹을 참고 화로 옆에 누웠다.

화로 옆에서 푹 잠을 잔 도현은 떠날 준비를 했다. 용병들이 없는 걸 보니 간밤에 소녀의 일은 꿈이 아닌 게 분명했다.

오두막집 문을 열고 나온 도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비는 멈췄고 아침 안개가 뿌옇게 오두막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안개가 심해서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안개를 헤치며 걷던 도현은 그 자리에서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멈춰 섰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기른 소녀가 높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가?”

소녀가 물었다.

“브링틱에. 넌 누구지?”

“나? 난 약초꾼 딸.”

“장난은 이제 그만 치는 게 좋아.”

도현이 몸을 날려 소녀가 앉아 있는 바로 옆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 도현의 몸무게를 버티지 못한 나뭇가지가 부러질 듯 휘어졌다.

“그 사람들 어디 있지?”

“우리 집에. 당신도 가자. 아빠가 당신 안 데리고 왔다고 막 혼냈어.”

“나를?”

“응, 일곱 명 중에 한 사람은 놔두고 왔다고 많이 혼났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소녀는 말을 한 후, 수 미터가 넘는 공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뛰어내렸다. 소녀의 긴 장화가 땅 위에 작은 소리를 냈을 뿐이다.

‘역시 평범한 소녀가 아니야.’

도현은 땅으로 내려와 소녀 옆에 섰다. 소녀의 키는 그의 어깨 어름까지 왔다.

“빨리 가야 돼. 당신 잠자는 거 기다려 주느라고 많이 늦었어.”

“왜 안 깨웠지?”

“그냥. 이제 가.”

소녀가 안개를 헤치며 앞서가자 도현은 잠시 고민을 하다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소녀의 정체가 궁금해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골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소녀를 따라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 도현은 무성한 수풀로 교묘히 가려진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여기야, 우리 집.”

“동굴에서 산다고?”

“응.”

도현은 주변 일대를 날카롭게 둘러보았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누가 소녀를 이용해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만드는 걸까? 정말 그녀 아버지일까?’

몬스터 퇴치로 용병들을 구한 건 핑계임이 분명했다.

소녀의 기이한 행동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온 도현은 동굴 속 기습을 경계하며 소녀가 들어간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는 어두웠지만 몇 미터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자 횃불이 듬성듬성 빛을 내는 긴 통로가 나왔다.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동굴이다.’

바닥은 매끄러울 정도로 평평했고 천장과 벽은 사각 모양을 이뤘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만들 수 있는 산속 동굴 구조에 도현의 눈빛은 신중함이 더해 갔다.

“동굴엔 독거미가 살아.”

소녀는 어깨에 내려온 독거미를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그녀가 손등으로 친 독거미는 공교롭게도 바로 뒤에 따라오는 도현의 얼굴로 날아갔다.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히 날아오는 독거미를 도현은 슬쩍 피했다.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뭐가?”

소녀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도현은 됐다는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어서 너희 집으로 가자.”

바닥에 누워 있는 여섯 명의 용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음침하게 생긴 늙은 흑마법사 모엘은 그럴수록 더욱 양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들은 용병들의 코와 입으로 스며들어 그들의 생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석실 바닥에서 발버둥 치던 용병들은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변해 가다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나쁘지 않군.”

모엘은 사람을 제물로 바쳐 흑마력을 높이는 비술을 최근에 터득했고 오늘 처음으로 그 비술을 발휘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앞으로도 꾸준히 사람을 잡아 와 흑마력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오두막집에 있는 사람 데리고 왔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엘은 흠칫하며 돌아봤다. 석실 안으로 리타와 젊은 용병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녀석은 왜 정신이 멀쩡하지?”

“몰라, 독거미가 안 물어.”

“넌 나가서 지나가는 용병들이 더 있나 찾아봐.”

“응.”

소녀는 죽은 용병들에게 다가가는 도현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석실을 나갔다.

“간이 큰 녀석이구나, 대충 상황을 눈치챘을 텐데 태연하게 서 있다니.”

모엘이 둥근 고리를 잡아당기자 소녀가 나간 석실의 문이 닫혔다. 도현이 도주하지 못하게 퇴로를 막은 것이다.

“아니, 아직 모르겠어. 이 사람들을 왜 죽인 거지?”

도현은 앙상하게 말라 죽은 용병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 어차피 여기서 네놈도 같은 신세가 될 테니 알려 주지. 그 녀석들은 위대한 흑마법사로 거듭날 모엘 님을 위해 죽은 것이다.”

“흑마법사?”

“놀랐나? 으흐흐흐. 하긴 흑마법사란 말만 들어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지. 네놈은 운이 없다. 독거미에 물렸다면 정신이 몽롱해져서 고통을 덜 받았을 텐데 말이야.”

“네 딸을 이용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다니, 부끄럽지 않나?”

“딸은 무슨. 그년은 그저 내 시종에 불과하다. 그러려고 주워 온 년이고.”

차갑게 말한 모엘의 발밑으로 검은 기운이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다.

도현은 목을 한 바퀴 돌리며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한 가지만 묻자. 그 고리를 다시 당기면 이 석실의 문은 열리는 거지?”

소녀는 석실 밖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등 뒤의 석문이 들썩일 정도로 안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캬아아아아!

모엘이 소환한 마물이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다.

“율로커스로는 못 이길 텐데.”

잠시 후 마물이 소멸되는 소리가 났다.

“비골은 불러내야 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있어.”

흑마법사 모엘이 가지고 있는 붉은 흑마법서 열두 권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있는 소녀는 석문이 열리는 소리에 천천히 뒤돌아섰다. 모엘은 놀란 눈으로 입을 크게 벌린 채 심장과 이마에 구멍이 나 죽어 있었고 도현은 피 묻은 얼굴로 당당히 서 있었다.

도현을 지나친 소녀는 모엘의 시신을 향해 걸어갔다.

“그 사람은 네 아버지가 아니다.”

“응.”

“알고 있었구나.”

“응.”

소녀는 대꾸를 하며 죽은 모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가락에 찍어 주문을 외웠다.

“뭐 하는 거지?”

“이 사람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야. 이대로 두면 부활해.”

소녀가 주문을 외우자 흑마법사 모엘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괴로운 비명을 질러 됐다.

-이년! 리타, 감히 네년이!

“30년간 길러 준 거 고마워. 그런데 넌 내 부모를 죽였잖아. 그동안 참고 있느라 힘들었어. 잘 가.”

-크아아아아!

허공에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던 모엘의 검은 영혼이 불길에 휩싸여 사라져 갔다.

도현은 부활을 할 모엘을 완전히 소멸시킨 리타의 행동보다 그녀가 한 말이 더욱 놀라웠다.

“흑마법사와 30년을 살았다고?”

“응, 근데 넌 이름이 뭐야?”

리타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모엘이 죽은 석실 뒤로 작은 방 두 개가 더 있었다. 한 곳은 리타가 생활하던 공간이었고 다른 한 곳은 모엘의 침실 겸 서재였다.

“이 동굴은 누가 만든 거지?”

책장에 꽂혀 있는 모엘의 책들을 둘러보던 도현이 약간 소리 높여 물었다.

“뭐라고?”

옆방에서 자신의 물건을 챙기던 리타가 외쳤다.

“이 동굴을 누가 만든 거냐고.”

도현은 흉측한 삽화가 그려진 책 한 권을 들여다보며 다시 물었다.

“몰라 나도.”

자신의 짐을 챙겨 가방에 담아 온 리타가 도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모엘은 흑마법을 연구하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곳을 찾다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다고 했어.”

“이게 다 흑마법과 관련된 책인가?”

책장에 꽂힌 수백 권의 책들을 둘러보며 도현이 물었다.

“아니, 당신 앞에 보이는 책장의 것만. 뒤에는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일반 책들이야.”

“모엘은 왜 이렇게 많은 책들을 모은 거지?”

“많은 지식은 높은 마법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니까.”

“검을 수련하듯 지식으로 수련한다는 건가?”

도현은 손에 든 흑마법서를 책장에 원래대로 꽂아 놓았다.

‘이 흑마법서를 어떻게 하지?’

도현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옆에서 기름 냄새가 확 올라왔다.

“뭐 하는 거야?”

“여길 태우려고.”

리타는 기름통을 기울여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에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마법서인데 아깝지 않아?”

도현이 리타를 시험하듯이 물어봤다.

“난 필요 없어. 그리고 당신도 이게 필요 없을 테고.”

리타는 도현이 말릴 틈도 주지 않고 촛불을 기름 위에 내던졌다.

화르르르.

순식간에 모엘의 서재에 불이 올라왔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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