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디 임팩트 10권 16화
리타는 자신의 가방을 메고는 짧은 두 다리로 동굴을 탈출하기 위해 뛰었다. 도현 역시 불타는 서재를 잠시 바라보다 그 뒤를 따랐다.
동굴 밖으로 나온 도현은 가방에서 수통을 꺼내 싸우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모엘의 몸에서 튄 피도 있지만, 그의 머리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대부분이었다. 모엘이 소환한 마물은 빠르고 강해서 머리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던 것이다.
“받아.”
리타가 금 조각이 가득 든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그걸 왜 주는 거지?”
가방에서 꺼낸 약을 상처 난 머리 부위에 바르던 도현이 물었다.
“줄 게 별로 없으니까. 모엘은 가난해서 돈이 될 만한 게 별로 없어. 금 조각이 전부야.”
도현은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해 보이는 리타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30년을 모엘과 함께 살았다고 했지?”
“응.”
“그건 나중에 네가 필요한 데 사용해. 난 그 금 없어도 되니까.”
30년간 부모를 죽인 원수 밑에서 자란 리타의 심정이 어떨지 도현은 가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소녀의 모습으로 성장이 멈춘 이유가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동정하는 거야?”
“아니. 다 큰 어른을 동정하는 사람은 없어.”
도현이 웃으며 가방을 멨다.
“어디로 가?”
“브링틱.”
“거기까지만 함께 가.”
도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길을 가는 동안은 내 말을 들어야 해.”
“응.”
도현은 동굴이 있는 산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동굴로 오며 원래 가려는 경로에서 많이 벗어났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쪽이 시간을 가장 단축시키는 길이었다.
리타는 소녀의 외모와 달리 체력이 아주 좋아서 산도 잘 탔고 높은 곳에서도 훌쩍 잘 뛰어내렸다. 마주친 늑대도 발길질로 허리를 부러트릴 정도였다.
“누구에게 훈련이라도 받은 거야?”
도현이 암벽을 타고 내려가며 물었다.
“아니, 난 태어날 때부터 몸이 튼튼했어. 쉽게 지치지도 않고.”
리타는 암벽을 타고 내려가는 도현의 흉내를 내며 조금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높은 암벽을 타고 내려온 둘은 해가 질 때까지 빠른 속도로 이동하다 숲에서 야영할 준비를 했다.
“자아, 먹어.”
리타는 모닥불에 구워진 멧돼지 고기를 넓은 잎사귀에 담아 도현에게 건넸다. 향긋한 냄새에 도현은 군침을 삼키며 맛을 봤다.
‘질기지도 않고 고기에서 단맛이 난다.’
소금만 쳐서 먹던 누린내 나는 멧돼지 맛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주 맛있네. 무슨 양념을 친 거야?”
“비밀.”
리타는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양념 통 두 개를 얼른 가방에 숨겼다.
“나중에 도시에서 그런 향신료만 팔아도 돈을 많이 벌겠어.”
“고마워.”
“근데 말이야, 리타. 너도 흑마법을 배우긴 한 거지?”
모엘의 부활을 막기 위해 보인 리타의 행동을 떠올리며 도현이 물었다.
“응. 왜, 나도 해칠 거야?”
“아니, 그럴 거면 벌써 동굴 안에서 손을 썼겠지.”
도현은 고기를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켰다.
“그냥 궁금해서. 모든 사람들은 욕심이라는 게 있거든. 검을 배운 나도 모엘의 서재에 있는 마법서를 보고 순간 탐심이 일어났는데, 리타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야. 어찌 됐든 리타도 흑마법사잖아.”
“서재에 있던 흑마법서들은 다 기억하고 있어.”
“기억한다고?”
“30년간 그곳에 있었어. 모엘이 아끼는 그 마법서들을 몰래 볼 시간이 없었겠어? 마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불을 지른 거야.”
새침하게 말한 리타는 고기를 잘라 입에 넣었다.
“나는?”
“응? 뭘?”
도현이 자세를 잡으며 헛기침을 했다.
“넌 필요 없겠지만, 난 그때 마법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고 있었다고. 넌 내가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고 바로 불을 지른 거야.”
“필요하면 말해.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책으로 만들어서 줄게.”
무덤덤한 리타의 대답에 도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기억하는 것과 실제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리타가 마법을 알고 있다 해도 마법 솜씨는 모엘과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았다.
‘둘이 비슷했다면 리타의 손에 벌써 모엘이 죽었겠지.’
도현은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묵묵히 고기를 먹는 리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브링틱에 가면 뭘 할 거지?”
“용병.”
도현은 사레라도 들린 사람처럼 쿨럭거렸다.
“용병?”
“응, 30년간 동굴에서 살았더니 답답해. 브링틱에 가서 용병으로 행세하다가 나중에 더 넓은 곳으로 갈 거야. 얘기 들어 보니까 브링틱에 고대 도시가 발견됐다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이곳을 지나치는 용병들이 하는 얘기를 엿들었어. 그 때문에 브링틱에 용병 수요가 많다고.”
“리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 봐. 용병 중에 여자들은 드물어. 더구나 너처럼 어려 보이는 체형과 얼굴은 용병으로는 부담스럽지. 그러니 받아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난 마법사니까 괜찮아.”
“어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데?”
“보여 줄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리타가 주문을 외우며 손을 휘두르자 모닥불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 가던 멧돼지가 돌연 입을 벌리고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도현은 흠칫했지만 별 내색 없이 고기를 잘라 먹던 단검을 회전시켜 회오리바람을 만들어 냈다.
사사사사삭.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멧돼지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고 살은 도현의 잎사귀 접시와 맞은편 리타의 접시에 수북이 쌓였다.
“대단하다.”
장난을 친 리타는 도현의 놀라운 검술 실력에 박수를 몇 번 치고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세상을 구경하고 싶으면 용병이 아니어도 길이 많잖아. 용병은 포기해. 돈 받고 다른 사람 일을 해 주는 건 쉽지 않아. 위험하기도 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신이 나타나 모엘을 죽여 주기는 했는데……. 난 이제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침울한 표정으로 말한 리타는 숲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는 거야?”
“혼자 있고 싶어.”
리타는 숲으로 들어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20여 미터 정도 되는 나무의 꼭대기에 선 그녀는 달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잠 안 잘 건가? 내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서 출발할 건데.”
도현이 옆에 나타나 얄밉게 말했다.
“난 원래 잠이 적어.”
“어제부터 잠을 못 잤잖아. 오두막에서 자는 나를 기다려 주느라고.”
“도현,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재미도 없고. 동굴에 불을 지르고 나올 때만 해도 세상이 햇빛처럼 밝아 보였는데.”
“글쎄, 나 같아도 30년간 동굴에서 살았다면 똑같은 고민이 생겼을 거야.”
도현은 리타 옆에서 같이 달을 올려다봤다.
“내가 멋진 거 보여 주면 당분간 당신 따라다녀도 돼?”
“멋진 거?”
“응. 사실 말이야, 난 모엘보다 더 강한 마물을 소환할 수 있어. 그걸 보여 줄게.”
“믿기지 않는걸.”
도현은 리타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정말이야.”
“그럼 왜 모엘에게 부모님의 복수를 하지 않은 거지?”
“완벽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 내 흑마력이 높지 않아서 연속해서 사용할 수가 없거든.”
리타의 말속에서 진심을 느낀 도현은 호기심이 생겼다.
‘모엘이 불러낸 마물보다 더 강한 마물이라면 어느 정도 일까?’
모엘이 만든,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을 일삼는 인간형 마물들은 그의 머리에 화끈한 상처 하나를 남기고 소멸했다. 그것보다 강하다면 어느 정도일지 도현은 살짝 기대가 됐다. 사실 석실에서 모엘이 만든 소환물을 상대했을 때 그는 위협보다는 기분 좋은 긴장감 속에서 검을 사용했었다.
“자, 간다!”
도현이 가타부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리타는 나무 위에서 양손을 하늘을 향해 활짝 펼쳤다.
그녀의 입에서 한없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끈적끈적하고 음습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에 맞춰 그녀의 몸에서 칠흑처럼 어두운 기운이 한 가닥 빠져나와 달빛 가득한 허공을 강타했다.
번쩍이는 섬광과 동시에 허공이 갈라지며 망토를 휘날리는 위풍당당한 전사가 나타났다. 허공에서 생성된 그는 빠르게 밑으로 떨어졌다.
쿠우웅.
묵직한 진동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착지한 전사는 고개를 쳐들어 나무 위에 서 있는 리타를 올려다봤다. 마치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 마물의 이름은 뭐지?”
“비골. 어둠 속의 10대 전사 중 한 명이야. 멋지지? 저 바람에 휘날리는 망토와 붉은 눈빛을 봐. 당신이 석실에서 상대했던 율로커스들은 비골을 호위하는 하급 전사들일 뿐이야.”
3미터는 되어 보여 거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비골의 몸에서 검은 기운들이 끝없이 넘실거렸다. 그 검은 기운들은 그가 든 양손 도끼를 감싸면서 알 수 없는 차가움을 사방으로 퍼트리고 있었다.
‘강해 보인다.’
도현의 몸에서 투기가 흘러나왔다.
“리타, 비골에게 날 없애라고 지시해.”
“왜 싸우려고 하는데?”
“난 싸울수록 더 강해지니까.”
잠시 망설이던 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위험해도 난 몰라.”
리타가 마음으로 지시를 내리자 비골이 폭풍과 같은 기세로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오더니 도현의 머리 위에서 2미터가 넘는 거대한 도끼를 내리쳤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도현이 뒤늦게 검을 뽑아 위를 막았다.
채애엥.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고 도현은 도끼를 막은 상태로 밑으로 추락했다.
그의 두 발에 걸리는 나뭇가지들은 모조리 부러져 나갔고, 위에서 내리누르는 비골의 도끼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도현이 맥없이 땅바닥에 추락할 찰나, 그가 힘껏 검을 밀어냈다. 비골의 몸이 위로 살짝 튕겨져 올라갔고, 그 틈에 도현은 무사히 땅에 착지하며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좋다. 몸이 짜릿해.’
비골의 도끼를 통해 전해져 오는 묵직한 힘이 그의 전신을 관통했지만, 도현은 고통보다는 강한 실전 상대가 나타났다는 흥분감에 가슴이 뛰었다.
바위를 박살 내는 강한 일격을 도현이 막아 내자 비골은 양손 도끼를 번개처럼 휘저으며 더욱 강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그의 거대한 도끼에 맞은 아름드리나무들이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도현이 피한 자리엔 깊숙한 구덩이가 생성됐다.
방어 자세로 비골을 상대하던 도현은 수 미터나 치솟는 흙더미 속을 통과해 본격적으로 호검술을 펼쳤다.
그는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보다 더욱 노련하고도 무서운 도끼질을 해 대는 괴력의 전사를 맞아 싸우기 시작했다.
차차창. 채채챙챙.
도현의 검과 비골의 도끼가 부딪칠 때마다 어두운 숲이 환해질 정도로 밝은 섬광이 번뜩였고, 무시무시한 금속성이 숲의 모든 짐승들을 자극해 멀리 도망치게 만들었다.
밤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들을 힐끔 쳐다본 리타는 잔뜩 긴장된 시선으로 도현과 비골의 싸움을 계속 관전했다.
그들이 싸우는 숲 일대에는 멀쩡한 나무가 없었다. 전투 도중 비골의 도끼에 잘려 나간 게 태반이었고 나머지들은 도현의 무시무시한 검술에 여러 조각이 나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얏!”
도현이 검을 땅바닥에 박으며 황금 빛의 강렬한 검을 만들어 날렸다. 땅이 뒤집어졌고 그 위에 있던 나뭇조각들이 박살이 나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비골도 이에 질세라 거대한 도끼로 땅을 내리쳤다.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며 땅이 쫙쫙 갈라졌고, 도현이 검기를 뭉쳐 날린 황금 검은 도끼의 기운과 충돌하며 그대로 소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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