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디 임팩트 10권 19화
로나가 짐브리오의 말을 받아서 나직하게 말했다.
“응, 그래.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거라고. 겸사겸사해서 아주 좋잖아. 몬스터도 있고 이계의 수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대장,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도현도 오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흠.”
어베인은 기침을 몇 번 하더니 허리를 곧게 폈다.
“생각 좀 해 보세. 다크캐슬에 다녀오려면 시간도 걸리고 막상 가서 도현을 못 찾을 경우도 고려해 봐야 하니까.”
“젠장, 그때 어떡하든 그 녀석을 꾀어서 여기로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짐브리오가 못내 아쉽다는 듯 투덜거렸다.
“이봐 로나, 네가 그때 그 녀석을 네 남자로 만들었어야지. 마음만 있으면 뭐해, 바보같이.”
“왜 또 그 얘기는 꺼내는 거예요?”
로나가 소매에서 단검을 꺼내자 짐브리오가 헛기침을 하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는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도현의 뒷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다.
“어?”
“왜 그래요?”
로나가 물었다.
“어, 아무것도 아니야.”
짐브리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도현을 본 것 같다고는 말해 주지 않았다. 확실치 않아서였다. 괜히 비슷한 사람을 보고 도현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가 아닌 게 밝혀지면 로나가 실망할 수도 있다.
“대장, 로나와 함께 먼저 집에 가십시오. 난 잠깐 어디에 들렀다 가겠습니다.”
“또 술집에 가는 거면 품에 있는 보석은 주고 가는 게 좋을 거예요.”
로나가 손을 내밀자 짐브리오는 순순히 고대의 지팡이를 팔고 받은 보석을 그녀에 손에 쥐여 준 뒤 도현이 사라진 방향으로 바삐 뛰어갔다.
복잡한 시장 거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도현을 찾아다니던 짐브리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잘못 봤나?”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뻥’ 하고 터진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찾아보자.”
불 켜진 상점 거리를 벗어나 뒷골목에 들어선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놀라 본능적으로 앞으로 몸을 굴렀다.
뒷골목 바닥을 구르는 그의 몸 위로 고드름처럼 생긴 얼음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더니 잠시 후 허공에서 폭발하며 사라졌다.
깜짝 놀란 짐브리오는 몸을 세우며 뒤를 확인했다.
로브 차림의 마법사 두 명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들은 영주 커딜과 이안이 보낸 추적자들이었다.
“에이, 빌어먹을 자식들.”
짐브리오는 인상을 쓰며 뒷골목 반대편으로 뛰었다.
“네가 도망갈 곳은 없다!”
그의 앞에도 로브 차림의 마법사가 나타났다.
마법사는 손에 든 물을 뿌리며 입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물들이 투명한 막을 형성하더니 급속도로 얼어 갔다.
쩌어엉.
짐브리오가 달려가는 앞에 얼음벽이 생겼다.
“그럼 안 도망가면 되지, 이 돼지 같은 마법사 자식아!”
짐브리오가 이를 악물고 단단한 얼음벽을 이마로 깨며 돌진해 왔다.
피가 툭툭 떨어지는 얼굴을 한 짐브리오는 놀란 마법사의 목을 팔로 휘감더니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커헉.”
목이 부러진 중년의 마법사가 눈을 뒤집으며 거구의 짐브리오의 품에 쓰러졌다.
“감히 네놈이 얼음탑 마법사를 죽이다니!”
남은 두 명의 마법사들이 얼음 화살을 연이어 날렸다.
“다 와, 이 썩을 것들아! 그만큼 네놈들 체면 세워 주고 피해 다녔으면 대충 마무리 짓고 돌아갔어야지! 끝까지 쫓아와!”
짐브리오는 죽은 마법사의 몸을 방패처럼 휘두르며 한 발 한 발 얼음탑 마법사들에게 접근했다.
“우리 뒤에는 얼음탑이 있다!”
“내 뒤에는 이게 있다!”
등 뒤에 차고 다니던 작은 비수가 그의 손에서 유성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파팍!
이마에 비수가 꽂힌 마법사들이 동시에 뒤로 넘어갔다.
“마법도 제일 시원찮은 것들이 말이야.”
짐브리오는 비수를 회수하며 죽은 자들을 둘러봤다. 마법사들로 구성된 추적자들 중 마지막으로 남은 세 명의 마법사들을 오늘 끝장내 버렸다.
뒷골목을 벗어난 짐브리오는 절뚝이며 거리를 걸었다. 얼음 화살이 스친 다리 부위가 점차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마비되고 있어.’
몸도 추웠다. 두 팔로 몸을 감싸며 그는 덜덜 떨었다.
“추운 게 제일 싫다니까, 빌어먹을.”
입에서는 하얀 서리가 나왔다. 얼음 화살에 스친 정도에 불과했지만 다리는 마비되고 온몸은 얼음 구덩이 속에 있는 것처럼 춥고 괴로웠다.
“흐흐흐, 짜식들이 마법은 제법 열심히 수련했네.”
짐브리오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는 단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고 거리 위에서 멈춰 있는 중이었다.
두 다리가 모두 마비된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따뜻한 날씨에 몸을 떨며 차가운 입김을 내뿜는 그를 사람들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지나쳐 가고 있었다.
“이봐, 돈을 줄 테니 날 좀 도와줘.”
짐브리오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거구의 짐브리오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인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의 주위를 피해 갔고 잠시 후 짐브리오는 혀도 마비돼서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인정머리 없는 새끼들. 조금만 더 견디자, 곧 마법이 풀릴 거야.’
그때 상점이 늘어선 거리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앞으로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사내는 짐브리오 손에 죽은 마법사들과 동행하며 이들이 돈을 받은 만큼 성실하게 추적자 임무를 수행하는지 감시하던 커딜의 부하였다.
“몸에 문제가 생겼나 보지?”
미소를 띤 그는 주변을 의식하며 품 안에서 칼을 꺼냈다.
“네놈을 내가 죽였다는 소식을 영주님께 전하면 큰 상을 내리실 거다.”
짐브리오는 속삭이는 매부리코 사내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는 단 한마디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흔들리는 짐브리오의 눈동자를 보며 매부리코 사내는 낮게 웃었다.
“심장에 천천히 들어가는 칼을 느껴 봐라. 고통스럽게.”
그는 포옹하는 척하며 날이 선 단검을 서서히 짐브리오의 가슴으로 밀어 넣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짐브리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매부리코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쾌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더 깊게.”
커딜에게 상을 받을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 그는 있는 힘껏 단검을 찔렀다.
그의 단검이 깊숙이 들어가려는 찰나, 옆에 유령처럼 나타난 도현이 손바닥으로 매부리코 사내의 가슴을 때렸다.
우저저적.
갈비뼈가 박살이 나고 심장이 파괴된 매부리코 사내가 피를 토하며 10여 미터 넘게 날아가다 거리 한쪽에 처박혔다. 미동도 않는 모습이 즉사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도현은 짐브리오의 가슴에 박힌 단검을 빼냈다. 피가 나긴 했지만 다행히 깊이 들어가지는 않아 치명상은 면한 것 같았다.
“와아, 정 많은 사람처럼 행동하더니 인정사정없구나?”
사람을 단번에 죽여 버린 도현의 과감한 행동에 리타가 장난치듯 말했다.
“따라와.”
커다란 체격의 짐브리오를 번쩍 안아 든 도현은 일단 현장에서 벗어났다.
‘치료사를 찾아야 돼.’
도현은 마네킹처럼 굳어 있는 짐브리오가 눈만 깜빡이며 말을 못 하자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서둘러 브링틱 성에 있는 치료사를 찾으려고 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치료사 위치를 물으려고 할 때 짐브리오가 꿈틀댔다.
“짐브리오!”
도현이 반가운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짐브리오가 피식 웃었다.
“아까 본 게 정말 너였군.”
“괜찮습니까?”
“좀 내려 줘.”
짐브리오는 땅 위에 서더니 온몸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이상은 없었다. 얼음 마법의 마비 현상이 시간이 흘러 자동적으로 풀린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마법에 당했어.”
짐브리오는 짤막하게 조금 전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었다.
“너 아니었으면 영락없이 시체가 될 뻔했다. 고맙다.”
“가슴의 상처는요?”
“이까짓 상처야 늘 몸에 달고 다니는 거고.”
“강한 척하기는.”
리타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이 버릇없는 여자애는 뭐냐?”
짐브리오가 옷을 찢어 가슴의 상처에 덧대며 물었다.
“동료입니다.”
“동료?”
짐브리오는 코웃음을 치며 리타를 내려다봤다.
“떽! 쪼끄만 한 게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 죽고 싶어!”
귀가 먹먹할 정도의 호통 소리에도 리타는 기가 죽지 않았다.
“죽기 직전이었던 건 바로 당신이었지. 덩칫값도 못하는 바보 같은 인간아.”
“도현, 얘 정말 뭐냐?”
짐브리오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가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자 어이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키가 좀 안 큰 것뿐이지, 어린아이는 아닙니다. 실제로 나이는 저보다 많습니다.”
“그래?”
짐브리오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리타의 위아래를 훑었다.
“어베인과 로나는요?”
“브링틱 성에 집을 하나 마련했거든. 거기에 있어. 가자, 널 보면 기뻐할 거다.”
리타가 따라오려 하자 짐브리오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넌 초대하지 않았다.”
“도현과 나는 동료니까 그가 가는 곳은 나도 갈 수 있어.”
리타의 대답에 짐브리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혼나기 전에 썩 꺼져.”
“당신, 비골에게 한번 죽어 볼래?”
“뭐? 비골? 그게 뭔데.”
“보여 줄게. 그러니 한번 싸워 봐.”
리타가 양손을 하늘로 추켜세우며 주문을 외우려 하자 도현이 그녀의 팔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사고 치지 않기로 했잖아.”
리타를 말린 도현은 짐브리오를 바라봤다.
“당분간 같이 다니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괜찮으시면 함께 갔으면 합니다.”
“대체 동료로 삼은 이유가 뭐야? 재주도 없어 보이는데.”
“리타, 말해도 되지?”
“응.”
“흑마법사입니다. 알레빙스 산맥에서 만났어요.”
“흑마법사?”
짐브리오는 살짝 놀라며 리타를 쳐다봤다.
“발굴 중인 고대 도시에 씨드가 정말 존재할까요?”
술잔을 내려놓으며 로나가 물었다.
“글쎄.”
어베인은 술병을 기울여 고대 도시에서 발굴된 청동 술잔에 술을 따랐다.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힘들지. 수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무덤에서 고대 도시는 먼 곳도 아니고.”
어베인은 청동 술잔을 눈높이에 올려 그 겉면을 감상하다가 천천히 입에 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나는 자신의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이 술잔 역시 짐브리오가 발굴 현장에 일꾼으로 들어가 몰래 가지고 나온 것이다.
“전설은 얼음산을 말했지, 고대 도시를 언급하지 않았어요.”
“얼음산이 고대 도시일 수도 있지.”
“고대 도시가 어떻게 얼음산이 되겠어요.”
로나가 말한 후 술을 한 모금 했다.
“고대 도시의 이름을 말하는 거야. 얼음산이라고 해서 꼭 진짜 얼음산이 등장할 필요는 없단 거지. 얼음산은 고대 도시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어.”
“많은 영주들과 대상인들이 대장처럼 생각하며 브링틱 원로들에게 땅을 사서 발굴을 하고 있죠. 씨드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요.”
“씨드가 없어도 고대 도시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충분히 가치가 높지.”
“그래도 대부분은 씨드를 노리고 있다고요, 아시잖아요.”
로나는 어베인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 줬다.
“로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나 때문에 씨드에 목숨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일찍 죽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어베인과 짐브리오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니라고 했잖아.”
“고대 도시 발굴 현장에 출몰하는 몬스터를 쫓아간 이유도 그것 때문이잖아요. 혹시 씨드와 관련이 있는가 싶어서요. 아니에요?”
“물론 그렇긴 한데, 로나 너 때문만이 아니야. 씨드는 나나 짐브리오도 무척 탐을 내는 물건이니까. 찾으면 다 함께 나누어 먹으려고 찾는 거지, 네 정해지지 않는 운명을 걱정해서가 아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로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남은 술을 마셨다.
그때 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로나! 로나!”
짐브리오의 목소리에 로나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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