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디 임팩트 10권 23화
“이제 가서 그자를 데리고 오게. 호드리오스를 죽였다는 그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하군.”
“칼라치, 엘바를 복용했을 때 기분이 어떻던가?”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다크캐슬의 구역장 시절보다 살이 많이 빠진 헬구스가 물었다.
“뜨거운 불이 내 영혼까지 태우는 기분이었소.”
적발 거한 칼라치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풀을 뜯어 바람에 날렸다.
작은 풀잎은 바람을 타고 고대 도시 곳곳에 세워진 방벽으로 날아갔다.
그들이 앉아 있는 곳은 브링틱 원로들이 아직 팔지 않은 몇 안 되는 땅으로, 뒤에는 숲이 존재했고 그들 발 주변엔 갈대처럼 키 높은 풀들이 수북이 자라고 있었다.
근처에는 브링틱 병사들이 몰래 땅을 파는 자들은 없는지 감시하기 위해 빈번한 순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엘바를 복용해 자네처럼 강해졌으면 좋겠군.”
“헬구스, 왕실의 아들로 태어난 기분은 어떻소?”
“좋았지, 왕실 암투에 휘말려 내가 지옥에 있다는 걸 깨닫기 전에는.”
헬구스는 풀을 하나 뜯었다.
“왕실에서 태어나려면 적통으로 태어나는 게 좋아. 나처럼 서자로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심장 조이며 살지 않으려면.”
“창녀의 아들보다는 낫군.”
칼라치의 말에 헬구스는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 저기 오는군.”
헬구스가 이디언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돌로 경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남의 싸움에 괜히 끼어들어 봤자 좋을 게 없는데.”
“당신은 당신 갈 길 가세요. 따라온 건 당신이니까.”
이디언의 냉정한 말에 헬구스는 헛기침을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다크캐슬의 지하 감옥을 나온 후 그는 우연히 다크캐슬을 탈출하는 윌벤슨을 발견하고는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는 칼라치와 이디언 사이에 꼽사리 껴 움직이는 존재가 돼 버렸다.
“같이 좀 삽시다. 다크캐슬에서 함께 운명을 걸고 싸운 동료인데.”
“그럼 조용히 있어요.”
“알았소.”
헬구스는 얌전히 그녀 말을 들었다.
“이번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는 이득이 되는 상황이에요. 큰돈도 벌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베일 가문이 발굴지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요.”
이디언은 돈뿐만 아니라 베일 가문의 발굴 현장 상황을 염탐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어쩌면 씨드와 관련된 단서일 수도 있어요.”
칼라치는 이디언을 잠시 바라보다 헬구스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 좀 비워 주시오.”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한 헬구스가 저만치 멀어지자 칼라치가 이디언에게 물었다.
“이디언, 한 가지만 묻겠소. 왜 나를 계속 따라다니는 거요?”
“당신은 나를 위해 싸우다 한쪽 눈을 잃었어요.”
“도현이 만든 것이지, 당신 책임이 아니오.”
“보답을 하겠다고 이미 맹세했어요.”
“그 보답은 스므차에게 부상당해 길거리에서 죽어 가던 나를 구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스므차를 이기고 싶다고 했잖아요. 난 당신이 그 경지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떠날 거예요.”
“이디언.”
“그만 가요. 반돌로 경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독한 자식들. 오늘 밤에 조사하려고 했는데, 저녁 먹자마자 방벽 경비에 배치하다니.”
도현과 한조가 되어 서쪽 방벽 경비에 투입된 짐브리오는 예상 밖으로 신속하게 이뤄진 근무에 단단히 뿔이 나 있었다.
몰래 움직이려고 해도 세 개 용병단 소속의 선임 용병들이 방벽 위를 수시로 오가며 경비 상태를 확인했기 때문에 단 한 발도 정위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용병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상황이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우리들 뒤에 감시의 시선이 붙으면 움직이기가 어려워.”
“첫날만 그렇지 느슨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두고 보죠.”
“젠장. 정 안 되면 불이라도 질러 뒤에서 감시하는 녀석들을 바삐 움직이게 할 수밖에.”
“경비 근무 중 잡담하지 마시오.”
선임 용병이 다가와 경고를 했다. 아까부터 속닥거리는 도현과 짐브리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거, 말 몇 마디 한 거 가지고 너무 야박하게 뭐라 하시네.”
“뭐라고?”
선임 용병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거대 용병단에서만 용병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자유로움보다는 규율이 몸에 밴 사내였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도현이 나서서 고개를 숙이자 화를 내려던 선임 용병이 한발 물러났다.
“당신, 조심하는 게 좋아.”
“알았소. 조심하리다.”
선임 용병이 옆에서 경비 서는 다른 용병들에게 걸어가자 짐브리오는 지루한 표정으로 방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앞을 보고 말을 하면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줄 모를 거야, 흐흐흐.”
도현은 장난기 가득한 짐브리오의 행동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지겹긴 하군.’
아침까지 교대 없이 방벽에서 경비를 서야 한다는 생각에 도현도 답답함이 있긴 했다.
‘루드 가족은 지금쯤 고향에 도착했겠지?’
도현은 상선을 타고 자신보다 먼저 떠난 루드 가족과 리샤, 쿠린을 떠올렸다.
‘영주님과 리드만 사제님은 어떻게 지내실까? 남부 대륙까지 이곳의 소문이 퍼졌을 것 같은데.’
소문을 듣고 어쩌면 브링틱으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현은 달을 올려다봤다. 홍영의 얼굴이 달에 겹치며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은 흘러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이 열릴 때였다. 경비를 서는 모든 인력들이 지쳐 있을 즘 도현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가 경비를 서고 있는 서쪽 방벽을 향해 하늘 가득 불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근원지는 불과 1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서 있는 상대편 방벽 방향이었다.
천여 발에 가까울 것 같은 엄청난 불화살들이 소나기처럼 수백 미터 길이의 서쪽 방벽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기습이다.’
도현은 눈 뜨고 졸고 있는 짐브리오를 툭 쳤다.
“짐브리오! 위!”
짐브리오는 고개를 쳐들자마자 상황을 바로 인식하고 신속한 동작으로 떨어지는 불화살에 대비했다.
“이건 또 뭐야?”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불화살은 멀리서 보기에는 우아하지만 눈앞에 다가올 때는 사람의 생명을 끊어 가는 무서운 흉기로 돌변했다.
“으아아아악!”
“커헉!”
“살려 줘! 불이 붙었어!”
아침을 기다리며 마음이 풀어졌던 서쪽 방벽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하며 불길과 비명이 교차했다.
후두두둑.
도현과 짐브리오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불화살을 쳐 내고는 주위를 살폈다.
“제길. 벌써 싸움이 시작된 건가?”
짐브리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기는 어느 진영입니까?”
“피터롤 영주의 병사들이 있는 곳.”
“세 곳이 아니라 네 곳이 연합을 했군요.”
“그런 것 같아. 빌어먹을,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빨리 일이 터진 거야.”
도현은 정면을 쳐다봤다. 불화살로 공격을 시작한 저들이 방벽 위로 올라오고 있는지 인원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때 도현과 상당히 떨어져 있는 서쪽 방벽에 큰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확 치솟았다.
쿠콰쾅! 콰콰쾅쾅!
맞은편 적들이 어린아이 몸통만 한 커다란 기름병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으샤!”
거구의 적들이 좌우로 붙어 무거운 기름병을 내던지자, 불화살에 불이 붙은 베일 가문의 방벽과 충돌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퍼엉! 쾅쾅쾅! 화르르르.
기름불이 나무 방벽을 따라 밑으로 흘러내리며 빠르게 태우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하게 벌어진 일련의 공격은 그야말로 숨 몇 번 쉴 동안 벌어져서 방비할 틈이 없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이대로 몸을 피할지, 아니면 싸움에 참여할지.
“잠시만 생각 좀 해 보자.”
짐브리오도 아직 판단이 서질 않는 것 같았다.
“화살을 쏴! 기름병을 던지지 못하게 막아라!”
뒤늦게 방벽 아래서 올라온 베일 가문의 궁수들이 일제히 맞은편 방벽을 향해 화살 공격을 퍼부었지만, 상대는 철판 방패로 막으며 기름병 공격을 계속 감행했다.
그중 하나가 수십여 명이 밀집한 궁수들 자리에 떨어졌다.
“피해!”
“으아악.”
기름불에 휩싸인 궁수들이 처절한 비명 소리를 내며 방벽 아래로 연이어 추락했다.
이윽고 도현의 맞은편 방벽에도 거구의 사내들이 여러 명 나타났다.
“으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거나 쳐 내며 짐브리오의 결정을 기다리던 도현은 커다란 기름병이 날아오자 할 수 없다는 듯 부드럽게 받아 낸 후, 몸을 회전시키며 투포환을 던지듯 돌려보냈다.
“어?”
기름병을 던진 거구의 사내들은 되돌아오는 기름병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방벽 위에 마련된 화로에 기름병이 적중하며 큰 폭발이 일어났다.
쿠우우웅!
“아아악.”
“피해라!”
반경 10여 미터 정도가 불바다가 되었고, 적들은 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서둘러 몸을 피했다.
검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올라가고 있었다.
“잘했다. 저놈들도 뜨거운 맛을 봐야지.”
도현의 활약을 잠시 지켜보던 짐브리오는 서쪽 방벽을 지원하기 위해 몰려드는 베일 가문의 병력들을 둘러봤다.
적의 기습 공격으로 서쪽 방벽 일부가 불에 타고는 있었지만, 아직 전황은 모르는 것이다.
“에잇, 어쩔 수 없지. 일단 싸우면서 상황을 지켜보자고. 내부 구조도 파악 못 했는데 당장 조사를 할 수도 없고, 싸우다 정 안 되면 그때 몸을 빼면 되니까.”
“싸우자는 뜻이죠?”
도현이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며 대꾸했다.
“몸 사리면서 살살 하자고.”
짐브리오가 말을 하는 순간 화살 하나가 그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귀의 살점이 약간 떨어져 나간 짐브리오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해 갔다.
“이런 개자식들이!”
화가 난 짐브리오는 보급품으로 지급된 활을 집어 들어 자신에게 활을 쏜 자들은 물론 그 인근 주변에서 같이 활을 쏘던 자들까지 연이어 맞혔다.
화살 열두 발을 모두 다 사용한 짐브리오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잡자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밤새 그를 괴롭혔던 선임 용병이 감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가 잘못 봤군. 어제 하급 용병이라고 내가 무시한 점, 사과하겠소. 당신은 진정한 용병이오.”
“아, 예……. 돈을 받았으니까 싸워야죠.”
“최선을 다해 주시오.”
선임 용병은 짐브리오를 칭찬한 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좋으시겠습니다, 칭찬도 받으시고.”
“험, 쑥스럽게.”
도현은 맞은편 방벽을 봤다. 적들이 몇 명 보이지 않았다. 그가 던진 기름병이 만든 불길이 방벽 위를 넓게 차지하며 타올라서 적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있고, 그나마 있던 적들은 짐브리오가 쏜 화살에 죽거나 부상을 당해 자리를 피한 것이다.
하지만 근처에서는 여전히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도현처럼 기름병을 제대로 막는 사람은 거의 없어서 베일 가문의 서쪽 방벽은 여러 곳이 불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불이 붙은 서쪽 방벽은 적들의 표적이 되어 공세가 집중되었다.
“어느 한 곳이라도 방벽이 무너지기를 원하는 거군요.”
도현은 방벽 난간의 꼭대기에 대담하게 올라서서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100미터쯤 떨어진 서쪽 방벽 전투 상황을 지켜봤다.
적들은 여전히 기름병을 불이 타오른 방벽에 끊임없이 집어 던지고 있었다. 아군의 궁수들 수백 명이 방벽에서 직선으로 쏘고, 또 다른 궁수들은 지상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적의 진영으로 화살을 마구 날리고 있지만, 적들에 견고한 방패 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었다.
쿠우웅. 콰콰쾅쾅.
다섯 개나 되는 거대한 기름병이 거의 동시에 폭발하며 도현이 있는 곳까지 진동이 전달됐다.
‘기름병에 화약 성분이라도 들어 있는 건가?’
수류탄과 같은 위력을 보이는 기름병은 도현도 쉽게 볼 만한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뚫리겠습니다.”
조금 전 다섯 개의 거대한 기름병이 폭발한 나무 방벽은 불이 활활 타올라 인근에서 불을 끄려고 노력하던 아군 병사들까지 집어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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