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49화 (249/575)

[249] 디 임팩트 10권 24화

“어차피 방벽은 뚫리게 되어 있었어. 나무로 된 게 얼마나 버티겠냐고.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이제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가는 거지.”

짐브리오는 근처에서 죽은 용병들이 착용하고 있던 무기란 무기는 죄다 몸에 걸쳤다.

“준비해, 곧 집단전이 벌어질 테니까.”

도현은 방벽 난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짐브리오, 살살 하자면서요.”

“이게 살살이야. 남을 속이려면 먼저 나 자신을 속여야 한다고. 내가 보기엔 지금 베일 가문에서 뭔가를 단단히 준비해 놓은 것 같아.”

도현은 방벽 내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부산했던 움직임은 어느새 사라졌고, 은색 철갑으로 무장한 수많은 병력들이 곧 불타 허물어질 방벽 일대에 길게 포진해 있었다.

“저게 황소 진형이거든. 무리 중 가장 강력한 황소가 적의 기선을 제압하면, 나머지 무리들이 뒤를 따르며 모든 걸 파괴하는 거야. 내가 알기론 베일 가문의 반돌로나 세 용병단장이 강하기는 하지만 우두머리 황소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연합 쪽도 그만한 인물들이 존재하니까.”

“그 말씀은?”

“그래, 우리가 알지 못하는 황소가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야.”

짐브리오는 밝아 오는 아침을 보며 말했다.

“아까는 확신하지 못했는데, 첫 번째 싸움은 베일 가문이 이길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우리도 살살 싸우면서 저들의 품 안으로 깊이 들어가 보자고. 그래야 남은 시간 동안 정보를 모으고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테니까.”

“황소.”

도현이 혼잣말로 되뇌는 순간, 큰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아!”

방벽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도현은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길을 따라 뤼호른 가문의 깃발을 든 수많은 병사들과 용병들이 용감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벨피타와 콘로도 깃발을 든 병력들이 합세해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서쪽 방벽이 뚫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다렸다가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 방벽 아래서 위로 지시가 전해졌다.

“방벽 위의 모든 용병들은 내려와 근접전을 준비하라!”

지시를 들은 용병들은 일제히 방벽을 내려갔는데, 그중에는 도현과 짐브리오도 있었다.

“널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는군. 커딜의 병사로 위장해 있던 내 앞에 나타나 어리바리한 모습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었는데 말이야.”

짐브리오가 언급하는 때는 도현이 첫 차원 이동을 통해 이계로 와서 당황하던 순간이었다.

도현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피식 웃었다.

“자아, 이제 어떤 녀석이 황소 노릇을 하려고 왔는지 지켜볼까?”

짐브리오와 도현은 용병들 틈에 서서 오른쪽에 도열해 있는 사내들을 바라봤다.

은색 갑옷을 입은 자들은 세 용병단 중에서도 수십 년의 전투 경력과 노련함을 갖춘 일급 용병 이상들로, 모두 5백 명 가까이 됐다. 또 다른 은색 갑옷, 베일 가문의 문장이 찍힌 은색 사자 갑옷을 입은 2백 명은 베일 가문에서 만일을 대비해 보낸 정예 전사들이었다.

도합 7백 명의 은색 갑옷 용병과 전사 들은 강철 장갑을 낀 손목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기름불에 타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폭 20미터 가까운 서쪽 방벽을 지그시 노려보는 중이었다.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이야.’

7백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갈 황소를 찾던 도현의 시선이 어느 순간 짧게 흔들렸다.

‘칼라치!’

황소

“저자를 정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용병단장 중 한 사람이 은색 갑옷 전사들 앞에 선 적발 거한 칼라치를 미덥지 못하게 보며 물었다.

말은 그 혼자 했지만, 다른 용병단장들도 같은 마음인 듯 푸른 사자 갑옷을 입은 반돌로를 응시했다.

“내가 간밤에 그의 실력을 확인해 봤소. 믿어도 되오.”

손에 든 투구를 머리에 착용하며 반돌로가 답했다.

단호한 그의 대답과 태도에 세 명의 용병단장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별수 없다는 듯 각자의 투구를 머리에 썼다.

“그럼 믿어 보지요, 반돌로 경.”

적을 한곳으로 모아 황소 진형으로 일거에 쓸어버리자는 계책을 반돌로가 제안을 했을 때 용병단장들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우두머리가 적들을 압도할 만한 무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이 진형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반돌로는 스므차의 친위대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호드리오스를 꺾은 사내가 있다며 따라 주기를 원했고, 할 수 없이 용병단장들이 동의를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결전의 순간이 오자 용병단장들은 슬며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어서 다시 한 번 물은 것인데, 반돌로의 의지만 확인하는 꼴이 됐다.

“이제 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됐으니, 저자가 기대만큼 잘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요.”

용병단장들은 칼라치에게 걸어가는 반돌로를 보다가 재를 사방으로 날리며 불타오르는 방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방벽이 땅으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무자비하게 손을 쓰시오. 적들의 간담이 오그라들어 감히 베일 가문의 땅을 다시는 넘보지 못하게 말이오.”

차가운 반돌로의 명령에 칼라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다크캐슬에서 스므차에게 치명상을 입은 칼라치는 부상에서 회복한 뒤 전보다 한 단계 더 강해졌다. 죽을 위기를 거치며 그가 미처 다 흡수하지 못했던 엘바의 힘이 온전히 그의 것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다크캐슬로 돌아가 복수를 꿈꾸지 않았다. 스므차와 싸워 본 그는 아직 이 정도로는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이디언에게 다시 한 번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점도 작용했다.

도현에게 당하고 스므차에게 당했다. 그런 모습을 그녀는 연속해서 지켜봤다.

‘다시는 패배하지 않는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적발 거한 칼라치는 어디선가 보고 있을 이디언을 생각하며 등에 차고 있던 직사각형 모양의 강철 방패 두 개를 떼어 내 그 안쪽에 손을 끼워 넣었다.

사람 키만 한 거대 방패 두 개를 양손에 끼운 그는 은색 갑옷을 입은 7백 명의 전사들과 그 양옆으로 길게 퍼져 있는 수백 명의 용병들, 병사들을 길게 한번 둘러봤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이어 불붙은 방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더니 힘껏 땅을 박차고 올라 거세게 방벽과 충돌했다.

불에 타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방벽이 그의 몸과 부딪치는 순간 강한 충돌음을 내며 종잇장처럼 부서졌다. 아니, 그에 그치지 않고 바깥 방향으로 그 조각들이 비산했다.

“크아악.”

“내 다리!”

불타는 방벽의 파편에 맞은 수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죽거나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방벽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던 적들로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그들 앞에 칼라치가 한 마리 들소처럼 돌진해 왔다.

퍼직. 퍼버버퍽.

칼라치가 휘두르는 두 개의 방패는 거대한 해일과 같아서 걸리는 건 무엇이든 박살을 내 버렸다. 사람의 몸이 걸리면 몸이 터져 나갔고, 갑옷은 찌그러지고 검이나 창은 부러져 근처에 있는 그들의 아군을 상하게 했다.

휘리리리릭.

방패 두 개를 붙여 회전을 하자 서 있는 자들의 목이 동시에 수십 개나 떠올랐다.

마나를 가지고 제법 위세를 펼치던 뤼호른 가문의 귀족 몇은 검으로 막다가 검과 함께 상체가 잘려 나갔다.

누군가 명령을 내릴 틈조차 없었다. 그저 놀라움과 공포감 속에 ‘어어’ 하며 말이 안으로 삼켜진 자들의 본능적인 저항만이 있을 뿐.

삽시간에 뤼호른 가문의 정예 병력 수십과 마나를 가진 검사들, 용병들 수십을 방패 두 개로 해치운 칼라치는 피가 툭툭 떨어지는 얼굴로 죽음의 방패를 멈춰 세웠다.

방벽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방벽 앞으로 감히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신들과 함께 무너진 방벽 가운데 버티고 선 칼라치가 주변을 단번에 압도해 그들의 사고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킨 것이다.

“뭐 하나! 지켜보기만 할 텐가!”

칼라치의 거친 고함 소리에 적들처럼 정신이 잠깐 나가 있던 은색 갑옷 전사 7백 명이 정신을 차리며 방벽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적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자!”

칼라치가 방패를 흔들며 외치자, 은색 갑옷 전사들이 동시에 복창을 했다.

“적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자!”

이때만큼은 칼라치가 그들의 신이었다.

“돌진!”

길을 따라 전열을 재정비하는 수천 명의 적들을 향해 칼라치와 은색 폭풍이 들이닥쳐 학살을 시작했다.

네 가문의 병력 중에도 실력이 좋은 자들이 많았지만 악마 같은 칼라치를 본 자들은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돼 기세가 약해져 있었다.

“도망가지 마라! 맞서 싸워!”

벨피타 진영의 한 지휘관이 병사들을 다독이다 칼라치와 눈이 마주쳤다.

“이, 괴물 같은 자식!”

서걱.

방패 날에 목이 잘린 지휘관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후퇴! 뒤로 가!”

“빨리빨리 뒤로 물러나라고! 으아악!”

사나운 황소처럼 거침없이 적의 전열을 깨부수는 칼라치와 은빛 갑옷 전사들에 의해 연합 세력은 뒤로 밀리며 계속 쓰러져 갔다. 결국 후미부터 전열이 무너지더니 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끝까지 쫓아가 놈들을 죽여라!”

칼라치는 집요했다. 이미 도망가는 적들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쫓아가며 죽였다.

“사, 살려 줘.”

부상당한 병사가 애원했지만 은색 갑옷 전사의 도끼가 그의 머리를 쪼갰다.

“그러게 왜 덤벼, 이 자식들아!”

칼라치와 7백의 은색 갑옷 전사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살아 있는 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병사든 용병이든 어느 영주에 속한 귀족이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살려 두지 않았다.

긴 피의 강이 길을 따라 흘러 이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여러 영주들의 방벽 사이로 스며들었다.

베일 가문과 연합 세력 간의 전투를 지켜보던 다른 세력들은 그 모습에 가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병력 수에서 압도적이었던 연합 세력이 수많은 시체를 남기며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7백 명의 은색 갑옷 전사들을 도와 함께 싸우려고 나왔던 도현과 짐브리오는 크게 할 일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그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베일 가문이 황소 하나는 제대로 구했군. 어디서 저런 악마 같은 자식을 구해 왔지?”

“짐브리오, 저 사람 모르십니까?”

“내가 아는 사람인가?”

짐브리오가 싸움을 대비해 아까 챙겨 놨던 여러 무기들을 바닥에 버리며 물었다. 상황을 보니 난전이 벌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다크캐슬에서 전쟁을 일으켰던 구역장 중 한 사람입니다.”

도현의 설명에 짐브리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렇군. 이제 기억이 난다. 나도 저자를 본 적이 있어.”

짐브리오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도현을 구하기 위해 스므차의 대저택에 갔다가 윌벤슨을 탈옥시키기 위해 움직이던 칼라치를 본 기억이 있었다.

“저자 이름이 칼라치지?”

“네.”

도현은 칼라치가 만든 긴 피의 길을 보며 무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너 저 녀석과 사이가 안 좋다고 그러지 않았냐?”

도현이 인간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게 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짐브리오는 확인하듯 물었다.

“썩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저놈 눈 한쪽 네가 못쓰게 만들었잖아.”

“그랬죠.”

“곤란하게 됐는데. 저놈이 널 보면 가만두지 않으려 할 거야. 너, 저놈 이길 수 있겠어?”

도현은 아침 하늘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못 이겨?”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럼 됐다. 겁낼 것 없지, 네가 있는데. 계속 베일 가문 쪽에 남아서 조사를 하자고. 만약에 부딪치더라도 나는 너만 믿는다.”

짐브리오의 말에 도현은 피식 웃으며 앞을 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앞서갔던 칼라치가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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