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디 임팩트 10권 25화
피로 목욕을 한 듯한 그는 짐브리오 뒤에 서 있는 도현을 보지 못한 채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은색 갑옷 전사들도 방향을 바꿔 칼라치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수천 명의 적들을 밀어낸 그들의 다음 목표는 새벽에 기습을 가했던 피터롤 영주의 진영이었다.
“그곳만큼은 철저하게 부숴 놓게.”
철저히 중립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피터롤 영주의 진영이 연합 쪽으로 돌아서자, 반돌로의 배신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후를 위해서도 눈앞에 방벽을 치고 서 있는 피터롤 영주 진영을 제대로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미 상당수 병력을 길 위의 전투에서 잃은 피터롤 쪽은 방벽 안에 숨죽이며 숨어 있었다. 기름병을 던지며 기습을 가했던 새벽의 그 사나움과 용맹함은 어느새 자취를 감춰 버리고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칼라치와 수백의 은색 갑옷 전사들은 일반 용병들을 동원해 사다리 수십여 개를 만들어 불에 타지 않은 서쪽 방벽 일대에 걸쳤다.
순식간에 맞은편 방벽을 넘어갈 수 있는 수십 개의 다리가 생기자, 칼라치를 위시한 많은 병력들이 넘어가 전의를 상실해 변변한 반항조차 못 하는 피터롤 영주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설프게 방어하던 자들은 모두 잔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뿐만 아니라 방벽이 불타고 발굴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건물과 시설 들이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불과 채 1백 명도 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야비한 짓거리를 한다면, 그땐 이 땅의 권리조차 우리가 빼앗아 버리겠소. 아시겠소?”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수레 가득 챙긴 반돌로는 굳은 얼굴로 서 있는 피터롤 진영의 책임자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알겠냐고 물었소.”
“잘 알았소.”
“저 금화와 물건들은 배상으로 받는 것으로 알고 가지고 가겠소.”
전리품을 실은 수레를 뒤에서 밀던 짐브리오는 수레 안에서 고대의 물건 하나를 슬쩍하며 씨익 웃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신속했다.
“봤지? 이렇게 하나씩 모으는 거야, 일꾼으로 들어가면.”
“대단하십니다.”
짐브리오와 같이 뒤에서 무거운 수레를 밀던 도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하는지 알려 줄까?”
“기술을요?”
“이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야. 원래 사람을 죽일 때 사용하는 암살 수법인데, 내가 살짝 손을 봤지, 흐흐흐.”
“알려 주시면 고맙게 배우겠습니다.”
“좋아, 틈틈이 알려 줄게.”
둘은 앞서가는 수십 대의 수레를 따라 베일 가문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잿빛 로브를 걸친 얼음탑 소속의 마법사 일곱 명을 대동한 드비오가 말에서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마법사들이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드비오 님.”
“어디지?”
“저기 보이는 이층집입니다. 그곳에서 흔적이 끊겼습니다.”
“가자.”
차가운 인상의 노인 드비오는 어베인의 집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는 차기 얼음탑주 후보로 내정된 마법사 중 한 명으로, 명실공히 얼음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실력이 좋았다.
집 앞에 도착한 드비오는 손가락을 튕겼다.
아치형의 단단한 현관문이 밑에서부터 얼어붙더니 잠시 후 퍽 소리와 함께 부서져 버렸다.
그 소리에 주방에서 아침을 먹던 어베인과 로나, 리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로나는 별생각 없이 현관문으로 걸어가다가 창백하게 변한 얼굴로 뒤로 재주를 넘었다.
쩌어억 소리를 내며 그녀 뒤에 장식용으로 세워진 도자기가 얼음으로 변했다.
“대장, 얼음탑 마법사들이에요!”
재주를 넘어 마법을 피한 그녀는 현관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드비오를 향해 비수를 집어 던졌다.
쩌어엉.
빠르게 날아가던 비수는 드비오가 손가락을 튕기자 중간에 얼어붙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나, 리타를 데리고 뒷문으로 가!”
기침을 하던 어베인이 주방 한쪽에 놔뒀던 검을 뽑으며 외쳤다.
“아니에요! 제가 막을 테니까 대장이 리타를 데리고 가요!”
로나는 말을 하며 연이어 비수를 세 개나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비수는 드비오의 마법에 의해 중간에 얼어붙어 힘을 잃고 떨어졌다.
“내 앞에서 도망을 간다고?”
드비오가 손짓을 하자 허공에서 생성된 얼음 화살 두 개가 동시에 로나의 전신을 향해 날아갔다.
다람쥐처럼 날랜 동작으로 얼음 화살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로나는 주방의 식탁을 뒤집어 발로 힘껏 밀었다. 커다랗고 긴 나무 식탁이 돌바닥을 긁으며 드비오의 다리를 향해 밀려갔다.
드비오가 손을 연속해서 튕겼다. 식탁이 얼어붙더니 방향을 바꿔 로나 옆에 서 있는 어베인과 리타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어베인은 리타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호쾌하게 검을 두 번 휘둘렀다. 얼어붙은 식탁이 네 조각 나며 주방의 의자 몇 개를 부수고 사방에 처박혔다.
“검 솜씨가 제법이구나.”
얼음 마법으로 강화된 식탁은 바위만큼 단단해서 웬만한 실력 가지고는 자를 수도 없었다.
“그 실력을 믿고 마법사들을 죽였느냐?”
드비오는 걸음을 멈추고 주방과 뒷문으로 이어진 공간에 서 있는 어베인과 로나, 리타를 봤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려 애를 많이 썼소.”
“애를 많이 써?”
“그렇소. 커딜과 이안이 보낸 추적대 속에 있던 그들을 여러 번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우리는 쉬운 길을 포기하고 피해 다니기만 했소. 얼음탑을 존중해서요.”
어베인은 드비오 뒤에 늘어선 잿빛 로브 차림의 마법사들의 행동을 경계하며 나직이 말했다.
“아, 그렇다면 내가 물러나야 하는 것인가?”
시체처럼 핏기 없는 노마법사 드비오가 냉소를 흘렸다.
“대장, 뒷문에도 마법사들이 있어요.”
뒷문을 살짝 열어 보고 밖을 살피던 로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드비오와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끌어 보려고 했던 어베인은 난감해졌다.
몸이 아직 정상이 아니어서 마나의 연결도 원활하지 않고 움직임도 불편했다. 이런 상태로 얼음탑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노마법사와 여러 명의 잿빛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까지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당신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드비오다.”
“드비오, 얼음탑 소속의 마법사를 죽인 대가는 내가 치르겠소. 그러니 뒤에 있는 사람들은 보내 주시오.”
“네가 죽겠다고?”
“대장, 그럴 수 없어요! 같이 싸우고, 같이 죽어요.”
“로나, 대장은 나다. 끝까지 지시를 따라 줬으면 좋겠어.”
어베인의 말에도 로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끝까지 함께하는 거예요.”
굳건한 그녀의 음성에 어베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밌군. 난 너희들을 단 한 명도 살려 둘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당신만큼은 내가 죽이고 가겠소. 그럴 만한 힘은 내게 있으니까.”
어베인의 눈에서 강한 빛이 폭사됐다.
“리타, 우리를 도와 싸울 수 있겠어?”
로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녀는 리타가 도현이 말한 것만큼 강한 흑마법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저 성격 까다로운 나이 많은 소녀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도현이 인연을 맺은 리타를 이 집에 머물게 하기 위해 부풀려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어베인도 마찬가지였다.
“흥, 난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이제서야 묻는 거야?”
“미안해. 그래도 우린 널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잖아. 힘이 있다면 도와줘. 도현이 알면 기뻐할 거야.”
“기뻐한다고?”
“그래, 기뻐할 거야.”
“알았어.”
리타는 한 발 나서며 또랑또랑하게 외쳤다.
“너희들, 경고한다. 죽기 싫으면 얼른 이 집에서 나가!”
“허허, 어린것이 실성을 했구나. 넌 특별히 얼려서 얼음탑으로 데리고 가야겠다.”
드비오는 뒤에 늘어선 마법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두 놈은 죽이고 저 여자애는 얼려 놓아라.”
“알겠습니다, 드비오 님.”
다섯 명의 잿빛 로브 마법사들이 다가오자 어베인과 로나는 싸울 준비를 했고, 리타는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음습하고 끈적끈적한 주문을 외웠다.
그녀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거실의 허공을 때리는 순간,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공간이 갈라지며 비골이 나타났다.
은색 망토를 두른 위엄 있는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비골은 천천히 리타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소환물에 잿빛 로브의 마법사들은 물론 드비오도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흑마법사로구나!”
드비오는 전사를 소환해 낸 리타를 보며 말했다.
“그래, 흑마법사다! 비골, 저놈들을 다 죽여!”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비골이 뒤에서 날아오는 얼음 화살들을 모두 쳐 내며 돌진했다.
3미터 장신의 비골은 바닥을 타고 자신의 두 다리를 옭아매는 얼음 넝쿨을 힘으로 깨트리고는 양손 도끼를 좌우로 한 번씩 휘저었다.
잿빛 로브의 마법사들의 목 다섯 개가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쳤다.
“감히 마물 주제에!”
드비오가 허리에 꽂아 둔 마법 지팡이를 꺼내 집 바닥에 내리꽂았다.
마법 지팡이에 힘을 불어 넣는 드비오의 전신에서 눈부신 빛이 퍼져 나갔고 그의 눈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변해 갔다.
비골이 걸어가 양손 도끼로 드비오의 몸을 내려치려는 그 순간, 마법 지팡이가 얼음으로 된 거대한 뱀으로 변했다.
콰아아앙.
집 안을 가득 채울 만큼 커진 거대한 얼음 뱀은 비골의 도끼를 몸으로 막아 내고는 그의 몸을 휘감으며 입에서 냉기를 뿜어냈다. 비골의 몸이 빠르게 얼어 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어베인은 리타의 몸을 끌어안고 뒷문으로 향하며 외쳤다.
“로나, 따라와!”
비골과 얼음 뱀의 대결을 보고 놀라던 로나는 황급히 뒷문으로 나갔다.
어베인이 리타를 보호하며 뒷문을 지키는 마법사 네 명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비수를 연속으로 날려 마법사 한 명의 다리에 부상을 입힌 다음 말을 끌고 왔다.
집 안에서 비골과 얼음 뱀이 얼마나 격렬하게 싸우는지 벽이 깨지고 지붕이 들썩였다.
“대장, 어서 와요!”
어베인은 들고 있던 검으로 날아오는 얼음 화살을 물샐틈없이 막으며 로나가 준비한 말에 올라탔다.
“북쪽으로 가자!”
“예, 대장!”
쫓아오는 마법사에게 비수를 던져 접근을 막은 로나는 리타와 함께 말을 타고 가는 어베인의 뒤를 바람처럼 쫓아갔다.
거리를 빠르게 통과한 그들은 브링틱 성의 북문을 지나 계속 말을 몰아갔다.
뒤를 돌아보며 추적자가 있는지 살피던 로나는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겨우 숨을 돌렸다.
“대장, 몸은 괜찮아요?”
“쿨럭쿨럭.”
어베인은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로 심하게 기침을 해 댔다.
“많이 아파요?”
리타가 물었다.
“아니, 괜찮다.”
인자한 미소를 지은 어베인은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리타에게 말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오늘 큰일이 날 뻔했다.”
“비골은 강한 앤데 저 얼음 뱀도 만만치 않네요.”
리타는 확실히 이기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비골이 아쉬웠는지 풀이 죽어 있었다.
“내가 흑마력만 더 높아도 비골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텐데.”
“이 정도만 되도 넌 제 몫을 충분히 한 거다. 네가 우리 둘의 목숨을 구한 거야.”
리타를 위로한 어베인은 옆에서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로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버틸 만하니까 그리 걱정할 것 없어.”
“이제 어디로 가죠?”
“고대 도시로 가자. 아무래도 도현이 나서서 그 노마법사를 상대해 줘야 할 것 같다.”
“그자가 쫓아올까요?”
“틀림없이.”
그들은 먼지를 날리며 고대 도시를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몰아갔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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