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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51화 (251/575)

[251] 디 임팩트 11권 1화

조우

베일 가문은 적지 않게 부서진 서쪽 나무 방벽을 보수하기 위해 적의 방벽을 이용했다.

숲에서 벌목을 해 오는 수고를 줄이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도현은 뾰족한 갈고리를 길고 거대한 통나무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짐브리오가 튼튼한 밧줄을 갈고리 끝에 매달린 둥근 고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수십 개나 되는 갈고리와 밧줄이 완성되었다.

“당겨라!”

방벽 보수를 책임지고 있던 감독관이 고함을 치자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들이 일제히 손에 든 밧줄을 잡아당겼다.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거대한 통나무가 조금씩 베일 가문의 서쪽 방벽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뿌리째 뽑아 가는군.’

도현은 적의 방벽을 둘러봤다.

그가 간밤에 경비를 서며 마주 보았던 피터롤 진영의 방벽 상당 부분이 해체되어 지척에 있는 베일 가문의 서쪽 방벽으로 하나둘 이동되고 있었다.

보호막이 사라진 피터롤 진영의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연합 쪽에 붙어 새벽에 기습을 가한 결과였다.

“칼라치 녀석이 저들의 승리를 빼앗아 갔어.”

짐브리오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엘바를 복용해 강해진 칼라치는 머릿수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존재였다.

‘엘바로 인해 저 정도 무위를 보였다면, 씨드는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을까.’

씨드는 엘바와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복용자에게 준다고 했다.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보수 중인 베일 가문의 방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짐브리오, 칼라치가 왜 이 싸움에 개입했을까요?”

“뭔가 대가를 받았겠지. 그게 돈이든 땅이든.”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씨드를 찾고 있다면요?”

“짜증 나는 경쟁자 한 명이 더 생기는 거겠지.”

“그렇겠죠?”

도현은 몸을 돌려 또 다른 통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뭐야, 그 말은. 지금 칼라치 그 녀석도 씨드를 보고 베일 가문을 도왔다는 거야?”

짐브리오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물었다.

“씨드가 이 고대 도시에 존재할지 아니면 단서라도 있을지 저는 솔직히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있다면 칼라치는 그걸 노릴 만큼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거죠. 홀로 말입니다.”

“너 역시 그런 능력은 있잖아.”

짐브리오는 칼라치를 상대할 수 있다는 도현의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통나무에 갈고리를 꽂아 넣는 도현의 뒤로 다가갔다.

“정 신경이 쓰이면, 칼라치 녀석을 네가 손을 좀 보는 건 어때?”

도현은 자신의 검에 왼쪽 눈을 잃은 칼라치를 떠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있지만, 그가 없으면 오늘 승리가 불안해질 겁니다. 아직 연합 측이 싸움을 포기했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하긴 베일 가문이 이 발굴지에서 뭘 발견했는지 먼저 파악하는 게 급선무지. 칼라치 녀석은 그다음이고. 아니, 근데 배고파 죽겠는데 저녁은 언제 주는 거야? 해 다 지는데?”

하급 용병으로 분리돼 간밤에 밤새도록 경비 서고 아침 전투에 참여한 도현과 짐브리오는 잠도 못 자고 계속 일만 하고 있었다.

“당겨라!”

감독관의 지시에 맞춰 사내들이 줄을 당기자 밧줄이 팽팽해졌다.

깊은 밤, 짐브리오는 피곤했는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도현은 슬며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짐브리오 외에도 세 명의 사내들이 경쟁하듯 코를 골아 대고 있었다. 그들 역시 간밤에 경비를 서고 아침에 일어난 전투를 겪은 하급 용병들이었다.

원래는 여러 명이 더 자고 있어야 할 방이었지만, 없는 자들은 서쪽 방벽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방은 여유가 있었다.

“짐브리오.”

도현이 속삭이며 몸을 흔들자 짐브리오는 언제 코를 골았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조금 전에 순찰병이 방 안을 확인하고 나갔습니다.”

베일 가문의 지휘관 반돌로는 새로 모집한 용병들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병사들이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숙소를 확인했다.

눈곱을 뗀 짐브리오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훌쩍 몸을 날려 창가 앞에 섰다.

나무로 된 창문 틈으로 주위를 살핀 그는 뒤에 서 있는 도현을 봤다.

“순찰병들이 자주 들락거려서 오래 방을 비울 수가 없어. 따로 움직이자.”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넓은 베일 가문의 진영을 돌아다니며 조사하려면 그 방법이 효과적이었다.

단, 그 전제는 은밀히 어둠 속을 돌아다니며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괜찮겠지?”

짐브리오가 도현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싸움 실력과 은신하며 정보를 모으는 능력은 별개였다.

“전 그냥 자고 있을까요?”

도현의 농담에 짐브리오는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보다 도현의 몸놀림이 더 빠르고 은밀했다.

다크캐슬의 몬스터 사냥에서 보여 줬던 도현의 움직임을 떠올린 짐브리오는 나무 창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이 오거나 신분이 노출되면 알아서 탈출 해. 나도 알아서 도망칠 테니까. 다시 만나는 장소는 대장이 있는 브링틱 성의 그 집. 알겠지?”

“네.”

둘은 2층 창문을 통해 은밀히 목조건물을 빠져나와 좌우로 갈라졌다.

건물 주변엔 병사 몇이 서 있었지만 기척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들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단독으로 움직이게 된 도현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신법을 발휘하며 발굴지를 찾아다녔다.

도중에 여러 건물을 지나쳤고, 그중에는 경비가 삼엄한 곳도 있었다.

지휘관의 숙소일 수도 있었고, 발굴지에서 얻은 중요한 고대 물건들이 보관된 장소일 수도 있다.

‘가서 확인해 볼까?’

도현은 조금 전 지나쳐 왔던 건물을 생각하며 갈등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움직였다.

경비를 제압하지 않고는 눈을 속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갈 구조가 아니었다.

‘일단 발굴 상황 먼저 확인해 보자.’

짐브리오도 은밀히 조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괜히 그가 나서서 먼저 베일 가문의 사람들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면 모를까.

횃불을 든 순찰병들의 시선을 피해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도현은 북동쪽 지역에서 베일 가문의 발굴 현장을 발견했다.

‘경비가 없다.’

지키는 사람이 따로 없는 그곳은 얼추 축구장 반 정도 크기의 면적에 달했다.

위에서 지하 발굴 현장을 내려다보던 도현은 근처에 보이는 나무 계단을 이용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부서진 고대 도시의 잔해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수습해서 모아 둔 고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들도 보였다.

고대 도시를 복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발굴 현장은 야만적일 만큼 거칠게 다뤄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곳은 별 볼 일 없는 장소였나 보군. 그래서 발굴이 중도에 중단된 거야.’

지하 20여 미터 깊이로 파헤쳐진 발굴지는 오랫동안 방치된 느낌이 묻어났다.

경비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현은 다른 곳을 찾아보기 위해 발굴 현장에서 올라와 더 안쪽으로 이동을 했다.

규모나 크기는 다르지만 처음 봤던 발굴 현장과 비슷한 곳들이 여러 곳 나타났다.

하지만 역시 버려진 발굴 지역인 듯, 을씨년스러운 고대 도시의 흔적만 보일 뿐이었다.

베일 가문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전 지역을 발굴하는 게 아니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들이 산 땅을 조사하고 있었다. 마치 표본조사를 하는 것처럼.

순찰병들이 지나칠 동안 버려진 발굴 현장에서 잠시 몸을 숨기고 있던 도현은 그들이 지나쳐 가자 다시 밖으로 나와 소리 없이 달려갔다.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숙소를 점검하는 병사들이 올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도현은 아쉽지만 이쯤에서 오늘 밤 조사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짐브리오가 의미 있는 걸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저기 뒤만 확인해 보고 돌아가자.’

전방의 흙더미가 육중한 성벽처럼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그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발굴지에서 퍼 올린 것으로 보이는 그 흙을 밟으며 위로 올라간 도현은 반대편을 내려다봤다.

활주로 모양으로 길게 뻗은 발굴장이 등장했다.

지하 수십 미터 깊이의 그곳엔 화로들이 곳곳에 배치돼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비들도 보였다.

지상은 아침에 보았던 은색 갑옷의 용병들이, 지하는 은색 사자 갑옷을 입은 베일 가문의 정예 전사들이 눈을 크게 뜨고 지키고 있었다.

분위기로 보아 중요한 발굴 장소임이 틀림없었다.

‘혹시 이곳이?’

숙소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바꿔 도현은 좀 더 조사해 보기로 작정했다.

흙더미를 넘어 10여 미터쯤 접근하자 용병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얼핏 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아주 통쾌했어. 그렇지?”

“그럼. 오줌을 싸며 도망가던 녀석을 잡아서 뒤통수에 철퇴를 내려쳐 줬지. 하지만 좀 싱겁기도 했어, 반돌로 경이 데려온 사내가 너무 설쳐서 말이야.”

“입조심해.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는 상당한 피해를 당했을 거라고.”

“그런가?”

용병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바닥에 엎드려 포복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 온 도현은 저들의 대화를 듣다가 손에 기를 모아 장풍을 만들어 날렸다.

낮게 소리 내어 웃던 용병은 엉덩이에 장풍을 맞고 앞으로 쭈욱 밀려났다.

“뭐야, 이거!”

깜짝 놀란 용병이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그의 몸이 수십 미터 깊이의 지하 발굴장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떨어지면 안 되지.’

도현이 엎드린 상태로 양손을 쫙 펼쳐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강력한 기운이 막 추락하려는 용병의 몸을 붙잡았다.

용병은 허공에서 몸이 잠시 멈추자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땅에 꽂았다.

단검에 의지한 그는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처럼 몸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뭘 보고 있는 거야! 얼른 잡아 줘!”

그의 고함 소리에 주변의 이목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도현은 그 상황을 이용해 저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로 달려갔다.

절벽처럼 생성된 지하 벽면을 타고 빠르게 내려가던 그는 어느 순간 몸을 날렸다.

우아한 몸동작으로 공중에서 몸을 비튼 그는 나비처럼 사뿐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바로 지하 벽면에 몸을 붙였다.

넓고 깊은 지하 발굴장에서 유일하게 달빛이나 화로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위에서 벌어진 소동은 용병이 구해지자 이내 잠잠해졌다.

도현은 지하 벽면에 바짝 붙은 상태로 지하 발굴 현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발굴 중앙에 대리석 길이 보인다. 중요한 장소였던 건가?’

발굴자들이 깨끗이 청소를 해 놔서인지 고대의 대리석 길은 중간중간 놓인 화로의 불빛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석상들은 파괴됐지만 웅장함이 살아 있다. 낮에 보았다면 장관이었겠어.’

대리석 길 좌우로 쓰러진 5미터 가까운 석상들은 근엄한 표정의 서로 다른 얼굴의 남성들이었다.

‘대리석 길과 범상치 않은 석상들. 고대에 이 길을 통과한 사람들은 아마도 수십 개의 석상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 중압감에 심리적 압박감을 받았을 수도 있겠어. 대체 여기는 어디인 거지?’

도현은 어둠에 가려진 벽면에 붙어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미터쯤 이동하자 발굴 현장의 끝에 도달했다.

그곳엔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청동 문이 입구처럼 존재했다.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용했다.

그러나 도현은 느낄 수 있었다. 발굴이 재개되면 저 청동 문은 얼마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성문으로 보기엔 그 크기가 다소 작고, 지나치게 화려하다. 어디로 통하는 문일까.’

도현은 지나쳐 온 곳을 되돌아봤다.

수십 미터의 대리석 길과 그 양옆에 배치된 웅장한 석상들. 그리고 발굴이 중단된 채 위태로운 모습으로 서 있는, 황금 장식이 된 거대한 청동 문.

고대 도시에 이 정도 시설을 갖추고 지낼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도시의 주인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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