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디 임팩트 11권 2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도현은 근처에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에 놀라 위를 올려다봤다.
누군가 절벽과도 같은 지하 벽면을 타고 유령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내려온 사람을 도현은 놀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는 다름 아닌 적발 거한 칼라치였다.
발굴장을 몰래 살펴보러 온 칼라치는 지척에 위치한 도현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백도현.”
“칼라치.”
서로의 이름을 나직한 목소리로 한 번씩 부른 둘은 아무 말 없이 지하 벽면에 등을 댄 채 서로를 노려봤다.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였다.
도현은 칼라치에게 볼일이 없었지만 칼라치는 자신의 눈을 앗아 간 도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눈 때문이 아니었다. 몬스터 숲에서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 준 도현의 행동이 그의 가슴 깊숙이 진한 패배감과 분노를 심어 줬었다.
수백의 부하들을 잃은 초라한 구역장 사내. 칼라치는 그길로 윌벤슨이 준 죽음의 엘바를 복용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진 자신의 힘이라면 눈앞의 도현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칼라치.”
칼라치의 몸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살기를 감지한 도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도현. 여기서 만나다니, 신이 나를 돕는구나.”
“길게 말하지 않겠소.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나나 당신이나 좋을 게 없어. 주변에 있는 경비병들에게 모두 들킬 테니까. 이대로 서로 모른 체합시다.”
“그건 안 되겠는데.”
칼라치의 하나밖에 없는 눈동자가 서서히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몸속에 잠자고 있던 엘바의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너와 스므차. 내 일생을 걸어도 좋을 만큼 꼭 죽이고 싶은 자들이야. 그런데 널 놓아주라고?”
“놓아 달라는 게 아니야.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거지.”
도현의 손이 검이 있는 허리로 갔다.
“당신이 엘바를 복용한 사실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날 상대하기 어려워.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내 말 들으시오.”
“틀렸다! 넌 내게 죽을 것이다!”
콰아아앙!
칼라치가 휘두른 방패를 도현이 검으로 막는 순간,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사방으로 퍼지는 먼지 폭풍 속에서 도현의 눈빛이 야수처럼 번들거렸다.
“칼라치, 네가 선택한 길이다. 후회하지 마라.”
도현은 지하에서 경비를 서던 정예 전사들이 달려오는 것을 봤지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싸움이 벌어져서 노출이 된 이상, 더 이상 꺼릴 게 없었다.
“강해졌구나! 크하하하!”
엘바의 힘이 깃들어 보라색으로 물든 강철 방패를 칼리치가 휘둘렀다.
도현이 피한 자리에 있던 지하의 벽면이 길게 폭발하며 갈라졌다.
비산하는 돌과 흙 파편을 뚫고 도현의 검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쩌어엉.
강철 방패의 겉을 휘감고 있던 보라색 기운이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보라색 파편 조각에 맞은 베일 가문의 정예 전사들 몇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들이 입고 있던 은색 갑옷은 형편없이 찢겨 있었다.
“넌 내 방패를 뚫지 못한다.”
보라색 막을 깨느라 힘이 다한 도현의 검을 뒤로 튕겨 내며 칼라치가 빠르게 접근해 왔다.
도현의 지척까지 다가온 칼라치가 쿵 하고 지면을 찍고 뛰어올라서는 등에 메고 있던 강철 방패를 순식간에 돌려 잡아 도끼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었다.
방패 날에 보라색 기운이 일렁이며 도현의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그때도 넌 그렇게 말했었지.”
냉정히 말을 한 도현은 검에 내공을 실어 미간으로 날아오는 방패를 후려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칼라치와 도현의 몸이 뒤로 동시에 밀려 나갔다.
발굴지 중앙의 대리석 길 위에 우뚝 멈춰 선 도현은 그에게 몰려드는 정예 전사들을 향해 번개처럼 검을 휘둘렀다.
후두두둑.
은색 갑옷이 잘려 나가 그들 발밑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당신들과는 볼일이 없어. 더 이상 덤비지 마.”
도현이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들을 죽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 중 몇은 뒤를 돌아보다가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칼라치가 집어 던진 강철 방패가 바로 그들 눈앞에 있었다.
사사사삭.
옆으로 회전하던 강철 방패는 세 명의 몸을 그대로 잘라 내며 도현을 향해 계속 날아갔다.
그 모습을 주변에서 본 전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전에 그들의 편에 서서 싸웠던 영웅이 지금은 사신이 된 것이다.
피 보라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회전 방패를 노려보던 도현은 위로 솟구쳤다가 방패를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방패 위로 나선형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어서 도현의 바지 자락이 세차게 펄럭거렸다.
나중에는 그의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현이 있던 허공을 베고 칼라치의 손으로 되돌아가던 방패 위로 묵직한 기운이 실린 도현의 두 발이 꽂혔다.
엘바의 기운이 도현의 두 발을 밀어내려 했지만 막대한 내공은 그 저항을 힘으로 내리눌렀다.
결국 강철 방패는 도현의 두 발에 날개가 꺾인 매처럼 대리석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우우웅.
도현의 두 발에 실린 힘이 얼마나 컸던지, 대리석 바닥이 움푹 들어갔고 강철 방패는 가운데가 찌그러져 볼품없이 변해 버렸다.
“이 쓰레기는 돌려주지.”
도현이 걷어찬 망가진 강철 방패가 바닥을 긁으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칼라치는 발 앞까지 굴러온 망가진 방패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현은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마치 그처럼 엘바라도 복용해서 힘이 증폭된 사내 같았다.
하지만 도현의 외관 어디에도 엘바를 복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오늘도 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칼라치의 적발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의 전신이 보라색 광채에 휘감겼다.
스므차와 싸울 때 엘바의 힘을 반밖에 흡수 못 했다면, 지금은 모든 힘을 흡수했다.
그는 승리하고, 도현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게 오늘 밤에 있을 이야기의 끝이다.
“백도현!”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칼라치를 도현은 고요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스므차의 대저택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강해 보인다.’
도현은 조금 전 몇 번의 부딪힘 속에서 칼라치의 잠재된 능력이 그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돌진해 오는 칼라치를 향해 도현은 늘어트렸던 검을 세우며 한 발 내디뎠다.
단순한 일 보였지만 도현은 그사이에 호검술의 정화가 담긴 전반 12식을 한 번에 펼쳐 냈다.
어느 검은 빠르고, 어느 검은 태산처럼 무겁고, 또 다른 검은 은밀하면서도 복잡해 보인다.
그 모든 검들이 어우러져 하나가 되자 세상은 온통 도현이 휘두른 검의 환영만이 보일 뿐이었다.
도현과 칼라치를 멀찍이서 포위하고 서 있던 수십 명의 전사들은 휘황찬란한 검의 향연에 놀라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검으로 환상을 만들어 내는 사나이.
그가 바로 백도현이었다.
채채채챙. 차차창창창.
도현에게 돌진하던 칼라치의 전신에서 불꽃이 튀었다.
도현이 전반 12식을 검기로 만들어 날린 것들이 하나둘 그의 몸에 적중하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엘바의 기운으로 보호되던 방패가 비명을 지르고 철갑은 찌그러져 갔다. 하지만 방패 뒤로 몸을 감춘 칼라치의 눈빛은 점점 강해졌다.
검기를 날린 도현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가 있던 자리에 칼라치가 기습적으로 집어 던진 도끼가 깊숙이 박혔다.
콰아앙.
대리석 바닥이 뒤집어지며 하늘로 그 잔해들이 튀어 올랐다.
‘굉장한 힘이 서려 있다.’
제대로 맞았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놈!”
도현의 검 공격을 버텨 내고 달려온 칼라치는 외마디 고함 소리와 함께 지난 몇 달간 고심하며 수련해 온 방패술을 한순간에 풀어냈다.
원래 방패술이 뛰어난 사내였지만, 무한한 엘바의 힘이 더해지자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되었다.
‘놀랍군. 방패 하나로도 이런 위력을 펼쳐 내다니. 빈틈이 보이지 않아.’
하나밖에 없는 방패로 공수 전환을 자유롭게 하며 온몸으로 투지를 발산하는 적발 거한 칼라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도현과의 싸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막강한 내공이 실린 도현의 검은 힘과 스피드, 변화 모든 면에서 최상이었지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완전히 몰입한 칼라치를 압도하기에는 어딘지 부족했다.
그것은 바로 필살의 의지였다.
‘마음속의 정을 버리지 않으면 내 검이 살아나지 않는다.’
사실 도현은 칼라치에 대한 확실한 살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강자로 성장한 칼라치를 이대로 죽이는 게 어딘지 아쉽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그의 검은 날카로움이 많이 무뎌진 상태였다.
퍼어억.
방패에 어깨를 가격당한 도현은 욱신거리는 그 통증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더 늦기 전에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가든지, 아니면 여기서 끝장을 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칼라치의 기세가 거세지고 있었다.
발굴장에서의 소란이 베일 가문 진영 전체에 퍼져 병력이 곧 들이닥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주위를 포위하고 서 있는 수십 명의 정예 전사들을 필두로 그 모두를 상대해야만 한다.
‘끝내자.’
칼라치를 피해 도망을 간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강자에 대한 예우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기로 했다.
결심이 선 도현은 그동안 뽑지 않았던 검 한 자루를 더 뽑아 들었다.
양손에 검을 한 자루씩 든 도현은 석상을 부수며 다가오는 방패를 향해 왼손의 검을 휘둘렀다.
까아아앙.
엘바의 힘이 깃든 방패와 검이 충돌하자 고막을 자극하는 거친 쇳소리가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그 소리를 가르며 도현의 오른손 검이 번개처럼 밑을 훑고 지나갔다.
사악.
정강이 보호대를 가르고 스며든 도현의 검에 칼라치의 피부 근육이 갈라졌다.
절뚝이며 물러서는 칼라치를 향해 도현이 양손 검을 십자 형태로 여러 번 교차해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듯 보였던 십자 형태의 검엔 도현이 창안한 호검술 후반부에 해당하는 감정의 검이 섞여 있었다.
철벽처럼 칼라치의 몸을 보호하던 방패가 가운데부터 갈라지더니 나중에는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 충격으로 칼라치의 몸이 뒤로 멀찍이 튕겼다.
방패 조각에 피투성이가 된 칼라치가 대리석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그런 칼라치를 향해 도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끝을 보려는 것이다.
“백도현.”
꿈틀거리던 칼라치가 힘겹게 일어섰다. 그의 몸에선 피가 강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아직 엘바의 힘이 남아 있었는지 그는 거센 포효 소리와 함께 도현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도현은 몸을 반쯤 숙여 그의 양손을 피한 뒤, 손에 든 검을 냉정히 옆으로 그었다.
복부가 갈라진 칼라치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는 그의 옆에 도현이 섰다.
“칼라치, 마지막으로 묻겠다. 여기서 죽겠나?”
도현의 물음에 칼라치가 허탈하게 웃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네놈에게 또다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겠다. 파쵸마 숲에서 너와 끝까지 싸웠어야 했어.”
윌벤슨에게 도현의 말을 전하기로 하고 목숨을 구함받은 일을 칼라치는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
긴말을 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도현은 무거운 표정으로 검 끝을 하늘로 올렸다.
“칼라치, 잘 가시오. 당신의 방패술은 훌륭했소.”
칼라치는 두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창녀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찾아 다크캐슬로 왔다. 그가 아버지의 얼굴을 실제로 처음 봤을 때는 서로 검을 마주했을 때였다.
‘스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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