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디 임팩트 11권 3화
43년 전, 하룻밤을 보낸 창녀를 통해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고 늘 궁금해했는데, 결국엔 끝까지 그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스므차를 때려눕히고 당당히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뭐 하나! 죽이지 않고!”
칼라치의 고함 소리가 도현의 귓전을 때렸다.
달빛을 사방으로 반사하던 도현의 검 끝이 공기를 가르며 밑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생성된 눈부신 황금 채찍이 도현을 그물처럼 감싸며 공격했다.
‘마법?’
중도에 검을 거둔 도현은 뒤로 물러나며 황금 채찍을 상대했다. 다크캐슬에서 이 황금 채찍을 무기로 사용한 마법사가 떠올랐다.
‘이디언.’
황금 채찍은 그때보다 훨씬 강한 힘이 서려 있었고,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도현을 공격했다.
도현이 잠시 상대하는 사이, 지하 발굴 현장에 이디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라치, 힘을 내요!”
그녀는 고함을 치며 수십 미터 밖에서 또 다른 황금 채찍을 만들어 휘둘렀다.
그녀 손에서 길게 늘어난 황금 채찍이 구명줄처럼 칼라치의 눈앞에 도달했다.
하지만 칼라치는 바라만 볼 뿐 그 줄을 붙잡지 않았다. 이디언 앞에서 도현에게 또 패했다는 게 그를 말할 수 없는 수치심에 휩싸이게 했다.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눈을 감았다.
“어서 잡아요! 어서!”
그러나 지하 발굴 현장에 메아리치는 이디언의 절절한 목소리는 회피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보니 발굴 현장을 지키는 정예 전사들이 이디언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를 악물며 뒤를 돌아봤다.
도현이 하늘에 떠 있는 황금 채찍을 상대하며 말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면 지금 가시오. 내가 이 황금 채찍을 상대하고 나서도 그대로 있다면 틀림없이 난 당신을 죽일 테니까.”
칼라치는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이디언까지 위험에 빠질 수가 있었다.
황금 채찍을 잡자 반대편에서 이디언이 황금 채찍의 크기를 줄이며 잡아당겼다.
칼라치는 줄어드는 황금 채찍에 몸을 맡겼다.
이디언을 향해 달려가는 정예 전사들이 앞에 보이자 칼라치는 몸에 박힌 방패 조각을 몇 개 뽑아 벼락처럼 집어 던졌다.
“크아악!”
“커헉!”
다리에 구멍이 난 정예 전사들이 거의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서 올라오시오!”
지상에서 밧줄을 내리고 밑을 내려다보던 헬구스가 소리쳤다. 저 멀리 비상 신호를 접한 베일 가문의 병사들이 물밀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잡아당겨요!”
마법으로 황금 채찍을 뽑아내느라 힘이 다한 이디언이 핏기 없이 휘청거리는 칼라치를 부축하며 외쳤다.
“으라차차!”
지상에서 헬구스가 힘을 가하자 둘의 몸이 위로 올라갔다.
멀찍이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황금 채찍을 순식간에 여러 조각 내 버린 뒤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헬구스까지 저들과 일행이었던 건가?’
이디언이 칼라치와 함께 다니는 건 이상하지 않았지만, 헬구스는 의외였다.
‘이 정도 소동이면 짐브리오도 알아서 몸을 피하겠지?’
도현은 방벽을 훌쩍 넘어갔다. 뒤따라오던 베일 가문의 병사들과 용병들은 이미 따돌린 후였다.
‘브링틱 성으로 가자.’
비상시 어베인의 집에서 만나기로 짐브리오와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때 그의 시야에 베일 가문의 방벽을 넘어오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방벽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자는 말할 수 없이 신속하고 은밀했다.
“짐브리오.”
“아이고, 깜짝이야.”
넉살 좋게 도현을 보고 놀란 척하던 짐브리오는 일단 자리를 피하자는 손짓을 하며 어둠 속에서 먼저 앞서갔다.
“네가 소동을 일으킨 범인이지?”
베일 가문의 땅에서 한참을 벗어났을 때 달리는 속도를 줄이며 짐브리오가 물었다.
“네.”
도현은 발굴 현장을 살피다 칼라치와 부딪힌 사정을 설명했다.
“흠, 왜 안 죽이고 살려 뒀어? 마법 채찍 때문에 기회가 없었던 건가?”
“글쎄요…… 오늘은 때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다 잡은 고기를 놓아주다니, 인간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은 너답지 않은데?”
“그런가요?”
도현은 담담히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오늘 밤의 사건으로 인해 칼라치는 더 이상 베일 가문에 머물기 어려울 것이다.
“짐브리오, 그 발굴 현장 말입니다. 아무래도 고대 도시의 주인이 살았던 장소 같지 않습니까?”
“왕궁이야.”
“왕궁요?”
“고대 왕국의 왕이 머물던 곳. 네가 보았던 여러 석상들은 역대 왕들의 조각상이었던 거야. 그 길 끝에 있던 황금 장식의 청동 문은 왕궁의 입구였고.”
짐브리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듯 말하십니까?”
“귀로 들었으니까.”
“예? 어디서요?”
“학자들의 건물에서.”
“학자들의 건물요?”
“발굴지를 조사하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에 불이 환히 켜진 건물을 발견했어. 이 늦은 시간까지 뭐 하나 싶어서 몰래 숨어들어 가 봤지. 뭐, 경비들도 좀 있긴 했지만 이 몸이 들어가는 걸 막을 정도는 아니었고. 안에 들어가 보니까 학자들이 썩어 가는 양피지와 부서진 석판에서 고대어를 해석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더라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봤지. 그때 네가 목격한 왕궁 발굴 현장 이야기가 흘러나왔지 뭐야.”
짐브리오는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연합 측이 베일 가문의 땅을 노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야.”
“왕궁의 장소가 밝혀져서요?”
“그래. 왕이 살던 곳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 수많은 종류의 보물들이 땅 밑에 잠들어 있을 수 있다고. 게다가 씨드나 씨드와 관련된 단서가 존재할 장소로서도 가장 유력한 곳이기도 하고. 베일 가문과 앙숙인 뤼호른 가문이 이런 사실을 알아냈다면 그냥 지켜보기에는 배가 아팠을 거야. 그래서 싸움을 건 것이고.”
“그렇군요.”
도현은 지상으로부터 수십 미터 아래에 있던 왕궁의 터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왕궁 발굴이 끝나기 전까지 베일 가문은 긴장을 늦출 수 없겠네요. 케일 경이 이끄는 지원군이 와도 말입니다.”
“그럴 테지. 다른 곳도 아니고 고대 왕궁인데. 융트에서 베일 가문의 지원군을 봤다고 했지? 아마 뤼호른 가문이 보낸 지원군도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할 가능성이 커. 베일 가문과 연합 측의 싸움은 아마도 길게 갈 거야.”
“싸움이 길어지면 곤란한데.”
도현은 고민 깊은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왜?”
“싸움이 길어지면 발굴이 늦어질 거 아닙니까.”
“흠, 그건 그렇지. 자칫하면 몇 년을 갈 수도 있어.”
짐브리오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로나를 위해서라도 씨드 찾는 일이 그리 오래 걸려서는 안 된다.
“너도 로나 걱정을 하고 있구나. 역시 의리 있고 멋진 도둑놈이다.”
짐브리오의 말에 도현은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타투에 저장된 스톤의 에너지는 이계의 시간으로 1년 이상 머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 해도 불확실한 씨드 일에 모든 걸 걸 수는 없었다.
씨드를 발견해 로나를 돕고 그도 복용해서 강해지면 좋겠지만,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게 세상일이다.
왕궁 안에 씨드나 씨드와 관련된 단서가 없을 수 있다는 것도 가정해야만 한다.
이계에서 사귄 친구들을 돕는 것도 중요했지만, 태선군에 대한 복수를 위해 수련을 게을리할 수도 없었다.
도장에서 그를 기다리는 홍영도 생각해야만 한다.
“짐브리오, 고대 왕궁에 씨드와 관련된 게 없다면 다른 곳은 더 희박하겠지요?”
“왕궁에 있다고 생각하자. 우울하지 않게.”
거구의 짐브리오는 허리에서 술병을 꺼내 입에 댔다.
“커흑, 좋다. 너도 마셔 봐.”
“어디서 난 술입니까?”
도현이 술을 받으며 물었다.
“학자 녀석들이 탁자에 올려놓은 걸 내가 몰래 가지고 왔지. 흐흐흐.”
술은 부드럽고 순했다. 몇 모금 한 도현이 술병을 돌려주며 말했다.
“짐브리오, 만약에 말이에요, 베일 가문의 땅을 우리가 차지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푸후, 뭐라고?”
입에 넣은 술을 뿜어낸 짐브리오가 놀란 눈빛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우리가 차지하고 일꾼들을 고용해서 왕궁 발굴을 빠르게 진행시키는 겁니다.”
“베일 가문과 연합 세력은?”
“밀어내고요.”
도현의 대답에 짐브리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회오리바람이 사라지려면 아직 두 달 가까이 더 있어야 하잖습니까? 배편이 아닌 육로로 저들의 지원군이 얼마나 많이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 안에 저 땅을 꿀꺽하고 발굴을 한 뒤 도망가자는 얘기냐?”
“예. 이왕 도둑질할 거면 크게 한번 해 보죠.”
“너 진심이냐? 도둑 아니라고 길길이 날뛸 때는 언제고.”
도현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여러 세력의 방벽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대꾸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네요. 어차피 저들은 고대 왕궁을 두고 죽고 죽이는 싸움을 계속 벌일 게 아닙니까. 그걸 언제까지 바라보며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도둑이 왜 유리한 줄 알아? 들고튀면 되기 때문이야. 그런데 넌 도둑들에게 제일 불리한 상황을 만들고 있어. 설사 우리가 운 좋게 베일 가문의 땅을 차지한다 해도 끝이 아니라 시작이야. 아마 고대 도시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세력들이 주인 없어진 땅이라며 모조리 달려들걸.”
“베일 가문과 뤼호른 가문이 물러난 곳을 그들이 감히 넘볼 수가 있을까요?”
미소를 보이며 말하는 도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짐브리오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어제 오전에 벌어진 학살극의 주인공인 칼라치를 죽이려다가 보내 준 사내다. 그 정도로 강한 사내다.
두 자루 검을 허리에 매달고 서 있는 도현의 자세에서 짐브리오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느끼기 시작했다.
“너 사실대로 말해 봐. 다크캐슬에서 슈빅타이런 몇 마리나 잡아먹었냐?”
“백 마리 정도 됩니다. 슈빅타이런보다 조금 더 센 녀석들도 몇 놈 잡아먹었고요.”
“엄청난 마나를 흡수했겠군.”
짐브리오는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던져 깨트렸다.
“가자. 돌아가서 대장과 상의해 보자.”
크샤코
“어이가 없군.”
도현과 짐브리오는 처음엔 집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이틀 전만 해도 멀쩡했던 브링틱 성의 이층집이 벽이 무너진 상태로 반쯤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거의 진 상태에서 길게 그림자를 보이는 부서진 이층집은 생명이 꺼져 가는 것처럼 매우 위태롭게 서 있었다.
주변을 날카롭게 둘러보던 도현이 말했다.
“들어가 보죠.”
도현과 짐브리오는 부서진 벽을 통해 집 내부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위태롭게 버티고 선 집이 곧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몸을 숙여 좁은 굴처럼 변한 거실로 들어간 도현은 바닥에 보이는 적지 않은 핏자국에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로나의 것으로 보이는 비수도 발견했다.
“싸움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빌어먹을.”
그들은 조금씩 조사하면서 집 안 깊숙이 들어갔다.
밖은 해가 지고 있었고, 실내는 부서진 집의 영향으로 인해 안으로 들어갈수록 깜깜해졌다.
주저앉은 거실의 천장 일부와 벽을 살피던 도현은 집 안에서 굉장한 충돌이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누구와 싸운 걸까?’
손가락이 다 들어갈 정도로 벽에 깊숙이 난 홈을 만져 보던 도현은 옆이 환해지자 고개를 돌렸다.
짐브리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촛불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불을 붙인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잘 볼 수 있는 도현과는 달리 짐브리오는 한계가 있어서 불빛이 필요했다.
그들은 주방 근처에서 바닥에 흩어진 음식들을 발견했다.
“식사를 하다가 적의 습격을 받은 것 같군요.”
도현의 추리에 짐브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숙였던 몸을 세웠다.
뒷문 근처는 다행히 몸을 세울 만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
끼이이익.
덜렁거리는 뒷문을 열고 집 뒤편으로 나온 그들은 긴장감이 남아 있는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말이 있던 마구간은 텅 비어 있었다.
“다행이야, 시체가 안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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