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디 임팩트 11권 4화
짐브리오는 동료들의 시신을 집 안에서 발견할까 봐 내심 불안했었는지 겨우 숨을 돌리는 표정이었다.
그건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동료들의 생사가 아직 밝혀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보를 더 모으는 게 급선무였다.
그들이 주변 이웃집으로 가서 탐문을 하려는 순간, 위태롭게 서 있던 이층집이 큰 소리를 내며 폭삭 주저앉았다.
꼼짝없이 먼지를 뒤집어쓴 도현은 발밑을 봤다.
집이 무너지며 밖으로 튕겨 나온 청동 술잔이 볼품없이 누워 있었다.
허리를 숙여 청동 술잔을 손에 든 도현은 그 술잔이 얼마 전 자신이 술을 따라 마시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무사해야 할 텐데.’
도현은 집을 무너트릴 만큼 격렬하게 싸운 게 리타가 소환한 비골이라고 내심 판단하고 있었다.
어베인은 이틀 전만 해도 부상에 힘겨워했었고, 로나는 애초에 그 정도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골을 소환하고서도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한 느낌이 집 안 곳곳에서 느껴졌었다.
상대가 그만큼 강했다는 것이다.
손에 든 청동 술잔을 무너진 집 앞에 조용히 내려놓은 도현은 저만치 앞서가는 짐브리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짐브리오는 사라진 어베인과 로나를 찾기 위해 마음이 급해 보였다.
“이 과일 이름이 뭐지?”
리타가 그릇에 담긴 검붉은 빛깔의 과일을 맛있게 먹으며 물었다. 주먹만 한 과일은 리타의 입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마법사 카샨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청동 그릇에 담긴 과일이 차갑게 변했다.
“홀론이라는 것이다. 차갑게 먹으면 그 향이 더욱 깊고 달콤해지지.”
“고마워.”
리타는 얼음처럼 시원하게 변한 과일을 입안에 넣고 맛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당신 말대론데! 더 맛있어졌어.”
“원한다면 평생 맛보게 해 주겠다. 네가 늙어서 이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말이야.”
“미안하지만 난 안 늙어. 아마 당신이 늙어서 거동을 못할 때에도 난 이 외모를 유지할걸.”
“걱정 마라. 얼굴에 칼질을 하고 벌레 몇 마리를 상처 안에 집어넣으면 절로 주름이 잡힐 테니까 말이야.”
“과일 다 먹었어. 더 없어?”
리타가 청동 그릇을 집어 던졌다. 카샨은 차가운 눈빛으로 청동 그릇을 받아서 바닥에 내려놨다.
“기회를 줄 때 협조하는 게 좋을 게다.”
“얼음탑의 마법사가 왜 흑마법을 탐하지?”
“마법 연구랄까? 난 모든 마법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야.”
중년의 마법사 카샨은 감옥 한쪽에 있는 책상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필기도구와 내용이 없는 빈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네가 알고 있는 마법 지식을 기록해라. 그것만이 네가 살 수 있는 길이다.”
“싫어.”
리타가 벌렁 누웠다. 그녀의 손목에는 마력이 깃든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이것은 얼음탑에서 소속 마법사들이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의 마법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 수갑이었다.
리타도 그 마법 수갑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서 흑마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드비오는 무식한 늙은이야. 그자가 날 찾아와 너와 네 동료들을 넘겨 달라고 벌써 여러 번 말했다. 그에게 가면 너희들이 어떻게 될 것 같나?”
“당신이 우릴 잡아 왔잖아! 드비오가 아니라!”
리타가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
어제 집에 쳐들어온 노마법사 드비오를 피해 어베인, 로나와 함께 고대 도시로 가던 중, 은색 머리칼의 중년 마법사 카샨에게 사로잡혔다.
그의 마법이 어찌나 세던지 그녀가 소환한 비골은 그가 만든 얼음 폭풍에 갇혀 소멸하고 말았다.
물론, 평상시보다 비골의 힘이 많이 약해졌긴 했다. 드비오를 상대할 비골을 소환하느라 그녀의 흑마력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비골은 기본적으로 강한 존재인데 얼음 폭풍에 그렇게 간단히 소멸했다는 건, 상대방의 마법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가? 얼음탑에 죄를 짓고 도망가는 너희를 잡은 게 잘못됐다는 건가?”
카샨은 냉소를 흘렸다.
“간수장.”
“예!”
철창 밖 어둠침침한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우락부락한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옆방에 있는 늙은이와 여자를 고문해라. 비명이 밤새도록 끊이지 않게.”
“알겠습니다.”
간수장이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옆방에서 어베인과 로나의 억눌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리타의 표정을 살피며 카샨이 말했다.
“원래 난 이런 짓을 즐겨 하던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네가 고집을 피우니 어쩔 수가 없구나.”
“바보.”
리타가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도 깔깔댔다.
“내 진정한 동료는 저들이 아니야. 그를 잡아 와 고문하지 않는 한,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아.”
“그가 누구지?”
“기다려 봐. 그는 분명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
굳은 믿음이 섞인 그녀의 대답에 카샨이 코웃음 쳤다.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얼음탑 마법사지.”
“틀렸다. 브링틱에서는 날 크샤코 가문의 차남 카샨이라고 부른다. 네가 기다리는 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크샤코 가문의 성으로 들어온다면 그자는 전투 몬스터의 손에 잔인하게 죽을 것이다.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내 동료가 좋아하겠는데? 내 동료는 힘센 몬스터를 엄청 좋아하거든.”
리타는 말을 하며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옆방에서 들리는 어베인과 로나의 비명 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너무 두근거리게 해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도현과 짐브리오는 집 주변 탐문을 통해 몇 가지 정보를 모았다.
사건이 벌어진 건 어제 아침이고, 잿빛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어베인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
그날 오후 브링틱 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들이 등장해 어베인의 집 안에서 시신들을 수습해 갔다는 점.
다만, 그 시신 중에 어베인이나 로나, 리타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
“고맙소.”
짐브리오는 은화 몇 개를 이웃 주민에게 준 뒤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몇 걸음 걷다 휘청거리는 그를 도현이 옆에서 부축했다. 거한인 짐브리오는 부서진 어베인의 집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땅에 머리를 박았다.
“빌어먹을! 내 잘못이야! 내가 그들을 죽였어!”
“짐브리오, 진정하십시오.”
“이거 놔!”
도현의 손을 뿌리친 그는 계속 머리를 땅에 박았다. 상처가 나고 피가 튀었다.
“잿빛 로브는 얼음탑 마법사들의 상징이야. 그놈들이 대장을 공격한 거라고. 내 잘못이야. 몸도 성하지 않은 대장을 남겨 두고 베일 가문의 땅을 조사하러 가서는 안 됐어. 얼음탑 놈들을 불러온 건 정작 나인데 말이야.”
“병사들이 수습한 시신이 그들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릅니다. 섣불리 단정 짓지 마십시오.”
평상시 든든함을 보여 주던 짐브리오의 눈빛이 지금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며칠 전 얼음탑 소속의 마법사 셋을 죽인 일이 발단이 되어 동료들이 공격받았다는 생각이 그를 힘들게 한 것 같았다.
“일단 병사들이 수습해 갔다는 시신을 먼저 확인해 보죠. 가슴 아파하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복수도요.”
도현의 냉정한 말에 정신이 좀 들었는지 엎드려 있던 짐브리오가 천천히 일어섰다.
“가자. 도움을 줄 사람을 알고 있어.”
짐브리오가 찾아간 사람은 얼마 전 그에게 고대의 지팡이를 구입한 브링틱 성의 상인이었다.
턱수염이 무성한 상인은 습관처럼 턱수염을 훑어 내리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짐브리오와 도현을 둘러봤다.
“병사들이 수습해 간 시신을 보고 싶다고요?”
“그렇소.”
“관련이 있으면 직접 관청에 가서 말을 하면 될 텐데. 왜 나를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사정이 있으니 온 게 아니오?”
“흠.”
“당신 동생이 관청의 관리라고 들었소. 자리를 마련해 주시오.”
짐브리오는 탁자에 금화 주머니를 내려놨다.
“고대의 지팡이를 또 구하게 되면 당신에게 팔 테니, 부탁드리오.”
상인은 금화의 무게를 손으로 가만히 재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신이 아직 그냥 있을지 모르겠소. 주인 없는 시신들은 곧바로 화장을 하는 편이라서. 아무튼 다녀오겠소. 여기서 저녁이나 먹으면서 기다리시오.”
“잠깐, 만약 화장을 했다면…… 그들이 남잔지 여잔지. 죽은 자들의 외모라도 알아봐 주시오.”
짐브리오가 무거운 얼굴로 말을 하자 상인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힘써 보겠소.”
상인이 나간 후 하인들이 탁자에 저녁상을 차렸지만 도현이나 짐브리오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한참 후, 상인이 되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묘했다.
“호세안 거리 뒤편에 있는 이층집에서 어제 수습한 시신이라고 했지요?”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도현이 상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어젯밤에 그 시신들은 모두 크샤코 가문의 성으로 옮겨졌습니다.”
크샤코 가문이라면 브링틱을 지배하는 세 개 가문 중 한 곳이었다.
살짝 놀란 표정으로 도현과 짐브리오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유는요?”
“그건 동생도 모른다고 했소.”
“죽은 자들의 외모는 혹시 알아보셨습니까?”
“다섯 명 모두 사내들이고 목이 잘린 채 죽었다더군요.”
“여자는 없고?”
짐브리오가 밝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방금 말했잖소, 모두 사내들이었다고.”
“늙은 사람은?”
“그건 모르겠소. 그냥 사내들이라고만 들었으니까.”
“옷차림은?”
짐브리오가 다시 묻자 상인이 탁자에 손을 얹으며 억양을 높였다.
“그것까지 내 동생이 일일이 어떻게 알겠소! 정 알고 싶다면 크샤코 가문의 성으로 가서 직접 확인하시오!”
“흥분하기는.”
짐브리오는 홀가분해진 음성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소. 진심이오.”
덩치 큰 짐브리오가 정중히 고마움을 표하자 목소리를 높였던 상인이 헛기침을 하며 저녁상을 둘러봤다.
“왜 아무도 음식을 드시지 않았소?”
상인이 알아 온 정보는 도현과 짐브리오에게 큰 힘이 됐다. 병사들이 수습한 시신 중 여자가 없다는 건 적어도 로나와 리타가 현장에서 죽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이 살아 있다면 어베인도 무사할 가능성이 높았다.
“로나는 대장을 두고 홀로 도망가지 않았을 거야. 그녀 성격을 내가 잘 알고 있거든.”
상인의 집을 나온 짐브리오는 죽은 자들이 동료가 아닌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야겠군요.”
“너 같으면 어디로 갔을 것 같아?”
짐브리오가 말에 올라타며 물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우리들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맞아, 그랬을 거야. 용병 시장으로 가자. 그곳엔 우리가 마련해 놓은 작은 거처가 있어.”
“그래요?”
“발굴 중인 고대 도시에서 정보를 모을 때마다 우리가 임시로 머물던 곳이야. 우리는 용병 시장의 여관을 이용하지 않거든. 내가 훔쳐 온 고대의 물건들을 보관하던 장소이기도 하고.”
용병 시장과 고대 도시 발굴 현장은 비교적 가까웠다. 짐브리오는 동료들이 그곳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들은 우리가 베일 가문 땅에서 도망 나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 어쩌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방벽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도 몰라. 길이 엇갈리기 전에 빨리 가 보자.”
그들은 곧장 브링틱 성을 나와 고대 도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용병 시장으로 향했다.
쉬지 않고 말을 몬 그들의 얼굴엔 땀과 먼지가 가득했다.
지친 말을 다독이며 밤새도록 달린 그들은 몇 달 만에 거대한 마을처럼 번성한 용병 시장 외곽 지역에 도착했다. 밤이 물러가고 새벽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말에서 서둘러 내린 짐브리오를 따라 도현은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과 의자, 침상이 보였다.
‘온기가 없다. 최근에 사람이 머문 흔적이 보이지 않아.’
집 안에 불을 켜고 사방을 살피던 도현은 짐브리오를 돌아봤다. 그는 벽 쪽에 붙어 있는 침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걸어간 짐브리오는 작은 침상을 옆으로 밀고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위로 잡아당겼다.
“직접 만든 지하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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