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55화 (255/575)

[255] 디 임팩트 11권 5화

“그래. 집을 지을 때 내가 며칠간 고생해서 판 땅이야. 흙이 부드러워서 삽이 쑥쑥 잘 들어갔지.”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간 짐브리오는 내부를 둘러봤다.

거미줄과 습기 찬 내부. 그가 마지막으로 다녀간 뒤의 모습과 변함이 없었다.

혹시나 지하실에 그들이 머문 흔적이 있지 않았나 싶었지만, 그런 건 찾아볼 수가 없다.

어베인과 로나, 리타는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이다.

“빌어먹을.”

짐브리오는 지하실을 나와 침상에 몸을 던졌다.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도현이 다가갔다.

“부상을 당해 여기까지 올 형편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녀석들에게 붙잡혔겠지.”

짐브리오는 눈을 감은 채 담담히 말을 했다. 도현은 그런 짐브리오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의자를 끌고 와 옆에 앉았다.

“어느 쪽이 나을 것 같습니까?”

“뭐가.”

“브링틱 성에서 어베인을 찾아내는 것과 얼음탑 마법사들을 찾아 그들의 입으로 사건의 전모를 듣는 것.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나을 것 같은지 묻는 겁니다.”

짐브리오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후자지. 녀석들 손에 그들이 붙잡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시죠. 얼음탑 마법사를 찾아야죠.”

“좋아, 가자. 짐브리오가 여기 있다고 브링틱 성내를 돌아다니며 고래고래 소리치다 보면 녀석들이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그때 싹 쓸어버리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한 짐브리오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전에 먼저 조사해 볼 곳이 있습니다.”

“크샤코 가문의 성 말이지?”

짐브리오가 도현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물었다.

“네. 정황을 보면 병사들이 수습한 시신은 얼음탑 마법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얼음탑 관계자도 아닌 크샤코 가문이 왜 나서서 시신을 가지고 갔을까요?”

“얼음탑 녀석들이 크샤코 가문에 부탁을 했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든지.”

말을 하는 짐브리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크샤코 가문의 성을 조사하다 보면 그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브링틱 성 서쪽 방향으로 가다 보면 웅장한 성 하나가 있다. 그곳이 크샤코 가문의 성이야.”

“들어가 보셨습니까?”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봤을 뿐이야. 들어가 보지는 못했고. 이번 기회에 한번 들어가 보지 뭐. 아, 잠시만 기다려 봐.”

짐브리오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왔다.

“혹시 대장이 늦게라도 여기로 올 수도 있잖아. 그래서 지하실에 글을 남겨 놨어.”

“잘하셨습니다.”

얼음탑 마법사들을 찾아내려는 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일이었다. 동료들이 무사했으면 했다.

“아침 먹고 출발하자. 배가 든든해야 힘을 쓰지.”

용병 시장의 한 음식점에서 아침을 먹은 짐브리오는 대장간에 들러 작은 비수를 수십 개나 구입했다. 게다가 쇠사슬이 길게 연결된 낫을 사서 허리에 감았다. 도현이 보기에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 같았다.

“내가 로나에게 비수 던지는 법을 가르쳐 줬는데 배우는 게 영 시원찮더라고. 제대로 배웠으면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말이야.”

풍성한 겉옷으로 비수와 낫을 가린 짐브리오는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다가 문득 도현을 쳐다봤다.

“너, 만약에 말이다. 크샤코 가문과 싸워야 한다면 어쩔 거냐?”

“당연한 걸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준비됐으면 가죠.”

도현이 먼저 대장간을 나가자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짐브리오가 피식 웃으며 뒤따라 나갔다.

크샤코 가문의 성안엔 높은 건물이 수백 채나 존재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사납기 그지없는 전투 몬스터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초점 없이 흐릿한 눈빛을 가진 5미터 급 전투 몬스터 하이드로우의 무장 상태를 둘러보던 마법사 카샨이 뒤를 돌아봤다.

그의 형이자 크샤코 가문의 장남인 카심이 호위들을 달고 몬스터 보관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라.”

“예!”

호위들을 물린 카심은 얼음탑에서 20년 넘게 마법을 배우고 돌아온 동생에게 다가갔다.

젊었던 동생은 중년인이 되어 돌아왔지만 둘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다. 떨어져 있던 긴 시간과 변한 외모가 형제 사이를 갈라놓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서 속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있었다.

“브링틱의 원로들은 멍청해.”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카샨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몬스터의 발톱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긴 발톱이 새하얗게 얼어 갔다.

카샨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몬스터의 표정을 살폈다. 멍한 눈빛으로 서 있는 하이드로우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다리가 얼면 반응이 있으려나 모르겠군.”

몬스터의 다리까지 얼리려는 동생을 카심이 제지했다.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두 가문의 원로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몬스터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단합하면 대륙의 그 어떤 영주들도 겁낼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좁은 브링틱에서 개척이나 하면서 조금씩 땅을 넓히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냐. 대륙엔 이미 풍요로운 땅들이 아주 많은데 말이다. 알레빙스 산맥 너머 카비엘료의 땅만 해도 브링틱의 몇 배나 되는 경작지를 가지고 있다. 광산도 많고.”

“몬스터들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한한 자원도 아니고.”

“그래서 브링틱이 통일돼야 한다는 거다. 원로들이 아닌 단 한 명의 왕이 브링틱을 이끌어 가면서 그 힘을 차곡차곡 모아 가까운 카비엘료의 땅이라도 차지할 수 있게.”

“일리 있는 말이군요.”

얼어 있는 몬스터의 발톱이 부서지기 직전, 카샨은 손을 휘둘러 냉기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카샨, 네가 얼음탑의 차기 탑주 후보라고 했지. 네가 얼음탑을 차지하면 그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도 모두 네 명령을 따를 게 아니냐. 그때가 되면 날 도와라. 우리가 힘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어!”

“그게 내 뜻대로 되겠습니까, 얼음탑주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건데.”

카샨이 몬스터 보관소를 나가려 하자 카심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노력은 해 봐야지. 차기 탑주 후보 중 얼음탑주가 직접 가르친 자는 너밖에 없다면서.”

“그건 그렇지요.”

카샨의 얼굴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얼음탑주가 다섯 명의 차기 탑주 후보들을 모두 브링틱에 모이라고 한 연유가 무엇이겠냐? 이곳에서 탑주를 결정하려는 게 아니겠냐?”

“음.”

카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20년 만에 가문으로 돌아온 이유는 가족이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탑주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생각해 봐라. 그가 이곳에서 무엇을 두고 탑주를 결정하려고 할지. 내 생각엔 지금 발굴 중인 고대 도시와 관련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카샨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것 말고는 뚜렷이 이곳에 모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조만간 알 수 있겠지요. 탑주가 오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든 내가 널 돕겠다. 우린 형제니까.”

형의 말에 카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마음에 안 든다는 원로들, 내가 지금이라도 죽여 줄 수 있으니까.”

몬스터 보관소를 나가는 동생에게 카심이 소리쳐 물었다.

“카샨, 드비오가 아침에 날 찾아왔다. 감옥에 가둬 둔 자들을 내어 달라고. 어쩌면 좋겠냐?”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자들은 내가 잡은 자들이니까.”

“얼음탑 소속의 마법사들을 죽인 자들인데, 괜찮겠냐? 얼음탑주가 오면 문제가 되지 않겠어?”

“괜찮습니다. 그때 봐서 문제가 되면 죽이면 되니까.”

차갑게 말을 내뱉은 그는 몬스터 보관소를 나와 지하 감옥으로 향하다가 감옥 입구 근처에 서 있는 드비오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드비오 님.”

“카샨, 대체 언제까지 저들을 보호하고 있을 겐가?”

흰 수염이 가득한 마법사 드비오가 화를 꾹 참는 표정으로 물었다.

“보호하는 게 아닙니다. 고문을 하면서 고통을 주는 것이지요. 단순히 죽이는 건 너무 가벼운 벌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끼던 마법사들이 여러 명 희생됐네. 그들의 처분은 응당 내가 결정해야지 않겠나?”

“드비오 님의 부탁을 받고 우리 가문의 병사들이 시신을 잘 수습해 왔지 않습니까? 좋은 곳에 무덤도 세워 주고요.”

“이보게, 카샨!”

“고정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손님으로 여기에 머물고 계신 분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드비오는 카샨의 아버지인 원로의 초청을 받고 크샤코 가문의 성내에 머물고 있었다.

“내가 꼭 자네 부친을 만나야겠나?”

“만나 보시죠. 말리지 않습니다.”

카샨은 천둥소리가 퍼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가득한 게 큰비가 올 것 같았다.

감옥 입구를 지키는 전투 몬스터들을 지나친 그는 지하로 내려갔다. 길게 뻗은 감옥의 복도를 걷던 그는 어베인과 로나가 갇혀 있는 감방 앞에 멈춰 섰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그들이 기절한 듯 누워 있었다.

“왜 비명 소리가 나지 않지?”

“예?”

간수장이 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밤새워 매질을 하며 고문하다가 더하면 죽겠다 싶어서 잠시 쉴 시간을 준 것인데 그걸 꼬투리 삼고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간수들이 들어가 양동이의 물을 뿌려 어베인과 로나를 깨웠다. 그러고는 다시 가혹한 고문이 시작됐다.

그들의 손톱은 이미 다 빠져 있는 상태였다. 고통을 참기 위해 몸부림치는 로나와 눈이 마주친 카샨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살고 싶으면 네 동료가 흑마법을 책에 기록하게 만들어라. 할 수 있겠느냐?”

“퉤!”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낸 로나가 말없이 카샨을 노려봤다.

“살길을 주는데도 죽고 싶어 안달을 하는구나.”

카샨이 손가락을 튀기자 로나의 새끼손가락이 완전히 얼어 버렸다.

“때려라.”

파삭.

간수가 꼬챙이로 얼어붙은 손가락을 때렸다.

로나의 새끼손가락이 여러 조각 나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에 어베인이 피눈물을 흘리며 격하게 몸을 흔들었다.

“으아아아아!”

늙은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슬픈 고함 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괘, 괜찮아요, 대장. 울지 마세요.”

로나의 말에 어베인은 짐승처럼 울며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리타! 절대 말하지 마라! 절대 말하지 마!”

어베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은 카샨이 원하는 걸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또 알고 있었다, 카샨이 원하는 걸 얻으면 그들의 목숨도 끝이라는 것을.

“조용해!”

간수들이 어베인의 얼굴을 걷어찬 뒤 사정없이 매질을 해 댔다.

“독한 것들. 그런다고 해서 바뀔 건 없는데 말이야.”

혀를 찬 카샨은 느릿한 동작으로 옆방에 갇혀 있는 리타에게 갔다.

철창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리타를 힐끗 쳐다본 뒤 책상 위의 책을 뒤적여 보았다.

뭔가 적혀 있었다.

꿈 깨.

“흥!”

책을 집어 던진 카샨은 리타에게 걸어갔다.

“딱 하루만 더 기회를 주겠다. 그때도 이런 장난 짓거리를 하면 옆방에 있는 녀석들은 네가 보는 앞에서 얼음 조각으로 변할 것이다.”

“그들이 죽으면 당신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죽을걸.”

리타가 감은 눈을 뜨며 카샨을 노려봤다. 옆방에서 들리는 고문 소리를 듣고 밤새워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대체 네 그 어리석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어제 네가 말한 그놈인가?”

“그래. 그는 우릴 위해 복수를 해 줄 거야. 그러니 난 상관없어. 옆방의 사람들이 죽고, 내가 죽어도 말이야. 결국 너희들도 죽을 테니까.”

독기 서린 리타의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샨은 방을 나가며 한마디 했다.

“기대해 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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