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디 임팩트 11권 10화
딱히 어디가 입구이고 어디가 출구인지 정해지지 않은 용병 시장으로 물자와 사람을 실은 마차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마차들이 일으킨 마른 먼지가 바람을 따라 도현의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허름한 겉옷을 걸치고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 도현은 손을 움직여 가볍게 먼지바람을 내쫓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용병 시장 거리를 한차례 살핀 도현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음식점으로 향했다.
엉성하게 만들어진 목조건물로 들어선 도현은 먼지가 쌓인 모자를 등 뒤로 넘기며 음식점 안을 둘러봤다.
얼마 전, 크샤코 가문의 성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 전 짐브리오와 함께 아침을 먹은 장소다.
밀로 만든 질긴 빵과 구운 돼지고기, 목젖을 자극하는 독한 술로 한 끼를 해결한 도현은 돈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다.
해가 높이 뜬 하늘은 맑고 더웠다.
도현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 후, 용병 시장 외곽에 위치한 작은 집으로 향했다.
집 안에 들어선 도현은 벽 쪽에 붙어 있는 나무 침대를 옆으로 밀어내고 지하실 문을 열었다.
지하실에는 짐브리오가 어베인에게 남긴 글이 탁자 위에 남겨져 있었다.
왔으면 기다리시오, 대장.
크샤코 가문의 성을 조사하기 전에 혹시 모른다며 남긴 짐브리오의 글이었다.
“여기에 오지 않았군.”
집 안의 흔적을 통해 벌써 눈치챘지만 도현은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렸다.
며칠 전, 들판에서 헤어진 후 동료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도현은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주 꽁꽁 숨은 것 같았다.
하긴, 그가 쉽게 찾는다면 혹시 추적할지 모르는 크샤코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쉽게 소재가 파악될 테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를 꼬박 찾아다닌 도현은 결국 찾기를 중단하고 가까운 마을에 들러 휴식을 취하며 피로를 풀고 부상을 치료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짐브리오와 내가 동시에 아는 공간은 이곳뿐이야.’
그는 짐브리오가 용병 시장에 위치한 이 집으로 언제고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아마도 지금은 어베인과 로나를 치료하기 바쁠 것 같았다.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사실 이 방법 외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하실을 나온 도현은 먼지 쌓인 침대에 몸을 뉘었다.
‘한 달 가까이 됐나?’
차원 이동 게이트를 통해 이계로 넘어온 시간을 도현은 가만히 돌이켜 보았다.
다크캐슬을 떠나 브링틱까지. 그사이에 여러 일들을 겪었다.
“도장은 별일 없겠지.”
집을 떠나온 지 열흘도 안 됐지만 도장 식구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홍영과 용주, 철호 형 그리고 몇 안 되는 도장 수련생들까지.
한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도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고대 도시 발굴 현장으로 향했다. 고대 왕궁의 터가 있는 베일 가문의 땅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이 없었지만, 그라도 정보를 파악하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어둠을 틈타 도현은 베일 가문의 방벽 근처로 접근했다.
얼마 전까지 싸움이 있었는지 방벽 주위에는 아직 치워지지 않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방벽 일부는 불에 타올라 밤하늘로 재와 연기를 날리고 있었다.
뤼호른 가문이 주축이 된 연합 측은 지난번 전투에서 큰 피해를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재차 베일 가문의 방벽을 공략한 것 같았다.
‘아직 케일 경의 병력이 도착하지 않았나 보군.’
방벽 위의 경비 수가 며칠 전보다 확연히 줄어 있었다. 오늘 전투에서 희생이 컸던 것 같다.
경비들의 시선을 피해 방벽에 올라간 도현은 몸을 숙이다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방벽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죽은 시체가 있었는데, 그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선임 용병.’
그는 도현과 짐브리오가 베일 가문에 용병으로 위장해서 들어왔을 때 경비를 똑바로 서라며 뒤에서 잔소리를 했던 용병단 소속의 선임 용병이었다.
나중에는 짐브리오에게 진정한 용병이라며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기도 했던 사람.
도현은 눈을 부릅뜨고 죽은 용병단 소속의 선임 용병의 눈을 감겨 주었다.
상황에 따라 적이 될 사람이기도 했지만, 안면이 있고 대화를 나눈 용병이 시체가 되어 있는 모습을 웃으며 바라볼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막았군.’
방벽 위에는 화살에 맞아 죽거나 사다리를 타고 넘어오는 적들과 싸우다 죽은 병사들과 용병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베일 가문의 병력은 싸움이 소강상태에 들었지만 시체를 치우는 대신 휴식을 취하며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위장을 한 도현은 몸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성벽을 내려와 베일 가문의 진영을 돌아다녔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피로 더럽혀져 있어서 누가 봐도 얼마 전까지 싸움을 하다 온 사람처럼 보였다.
“빌어먹을.”
피가 흘러나오는 다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넘어진 사내를 도현이 다가가 부축해 줬다.
“괜찮습니까?”
사내는 도현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어디 가는 길입니까?”
“화살을 받으러 가는 길이오. 얼마 남지 않아서.”
그는 베일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는 세 개 용병단 소속이 아닌 용병 시장에서 모집되어 온 용병이었다.
중급 용병으로 용병단에 배치되어 싸우다 화살이 떨어지자 보급을 받기 위해 홀로 보급소로 가는 길이었다.
“당신도 용병 시장에서 모집된 용병이오?”
“네.”
다리를 다친 사내는 주위를 한번 살핀 뒤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잠깐 나 좀 봅시다.”
도현은 다리를 절뚝이며 건물 뒤편으로 가는 사내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뒤따라갔다.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다리를 다친 사내에게 접근한 것인데, 되레 사내가 은밀한 시선으로 그를 보자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달빛도 없는 건물 뒤편으로 가자 다리를 다친 사내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당신도 느꼈겠지만 베일 가문 녀석들은 돈만 던져 주고 우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소. 용병 시장에서 온 우리들을 차별하는 거라고.”
대답 없이 서 있는 도현을 향해 사내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다리를 봐. 뼈가 보일 정도인데, 나보다 훨씬 경미한 부상을 입은 용병단 애들 먼저 치료해 주잖아. 나 같은 건 죽어도 그만이라는 거지. 똑같이 열심히 싸웠는데.”
천으로 다리를 감싼 사내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이런 놈들과 무슨 신의를 지키는 게 필요하겠어? 안 그렇소?”
“도망이라도 가자는 겁니까?”
“이만큼 싸워 줬으면 됐지. 더 바라면 베일 가문 자식들은 개새끼들이야. 애초에 이런 험한 싸움이 벌어질 거라고 용병 시장에서 우리에게 그 누가 설명이라도 해 줬나?”
사내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뼈를 묻을 각오로 싸웠는데, 이런 취급을 받으면 더는 여기 못 있지. 죽어도 멋있는 죽음이 아니잖아.”
도현은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사내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할 만큼 해 줬으니까, 우리 그만 여기서 나갑시다. 받으시오.”
사내가 품에서 금화 세 개를 꺼내 내밀었다.
“다리가 이 모양이라 혼자서는 떠날 수 없소. 당신은 멀쩡하니까 날 좀 도와주시오.”
“…….”
“적소?”
사내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다가 금화를 한 개 더 꺼냈다.
“돈 모아서 고향에 여관이라도 하나 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시오. 내가 겁쟁이라서 이러는 게 아니라, 저들의 처사가 괘씸하지 않소.”
잠시 망설이던 도현은 천천히 금화를 받았다.
이미 이곳을 떠나려고 작정을 한 사내였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변함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약간의 도움을 주고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게 좋았다.
용병이 맹목적인 희생을 한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도현이 금화를 받아 들자 사내가 기뻐했다.
“잘 생각했소! 같이 떠납시다.”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생각해 놨습니까?”
“밧줄을 이용해 방벽을 내려갈 생각이오.”
“그다음은요?”
“미안하지만 용병 시장까지만 부축해 주시오. 그거면 되오.”
도현은 몸을 숙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수십 미터 깊이의 발굴장은 며칠 전과 다름이 없었다.
대리석 길과 웅장한 석상들 그리고 황금 장식 청동 문.
은색 갑옷을 입은 정예 전사들과 용병들이 지키고는 있지만 그 수가 반 정도 줄어 있었다.
아마도 싸움을 대비해 인원수가 조정된 것 같았다.
‘청동 문이 왕궁의 입구라 해도 열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을 거야.’
왕궁은 다른 고대 도시의 건축물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그 안은 흙과 돌 들이 채우고.
따라서 호미로 땅을 파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근차근 발굴해야만 한다.
적지 않은 시간과 많은 인력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도현이 저들을 제압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지만 홀로 발굴은 할 수 없었다.
‘베일 가문은 상황이 안전하다고 판단되지 않는 한, 섣불리 발굴을 재개하지 않을 거야.’
도현은 몸을 빼 아까 만난 사내를 찾아갔다.
다리를 다친 그는 방벽 위에서 발을 뻗고 휴식을 취하다가 도현이 나타나자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난 당신이 안 올 줄 알았소.”
“가시죠.”
도현의 말에 사내는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 용병단 소속의 용병들과 베일 가문의 병사들이 보였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사내는 화살 여러 개를 뭉쳐서 밧줄로 묶은 후 방벽 난간 사이에 걸쳤다.
“소리를 내며 내려가면 주변의 경비병들이 눈치챌 거요. 그러니까 조심해서…….”
다리를 다친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도현이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갑니다.”
사내의 허리띠를 잡은 도현은 그를 옆으로 안은 상태에서 밧줄을 잡고 몸을 던졌다.
“이, 이보시오!”
놀란 사내가 눈을 크게 뜰 때 도현은 한 손으로 밧줄을 잡고 미끄러지듯 지상으로 내려갔다.
척.
기척을 내지 않고 사뿐히 착지를 한 도현은 재빨리 사내와 함께 베일 가문의 진영에서 멀어져 갔다.
고대 도시 발굴 현장을 벗어난 도현은 용병 시장으로 향하며 사내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그가 베일 가문을 떠난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서였다.
사내는 도현이 의도를 가지고 잠입한 사람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개의치 않고 아는 대로 말해 주었다. 어차피 도현이 무슨 짓을 하든 그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칼라치가 결국 그곳을 떠났군. 하긴 발굴지에서 베일 가문의 병사들을 죽이고 싸웠으니 더 이상 있을 명분이 없었겠지. 내게 당한 부상도 심했을 테고.’
사내의 말에 따르면 칼라치가 없다는 정보를 입수한 뤼호른 가문이 그동안 하루에 한 번씩 계속 공격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싸울 때마다 인원이 늘었다고 했다.
“뤼호른 가문에 다른 영주 세력들이 더 붙은 것 같았소. 아마 며칠 안에 저기는 함락될 거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점점 가깝게 보이는 용병 시장에 시선을 둔 도현이 담담히 대답을 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들의 지원군이 도착했으니까요.”
“지원군?”
사내는 도현이 바라보는 곳을 쳐다봤다. 용병 시장에서 꾸역꾸역 걸어 나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알레빙스 산맥을 넘어 이제야 도착한 케일 경의 군사였다.
“신속히 움직여라!”
부대장의 목소리에 중무장한 베일 가문의 병사들이 육중한 발걸음으로 대열을 유지하면서도 빨리 달렸다.
길 한쪽에 비켜서서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도현은 케일 경도 봤지만 모른 척했다.
‘2천 명은 넘어 보이는데.’
그가 융트에서 본 병력은 천여 명 정도였지만, 하루 뒤에 도착한 후발대까지 합해 케일 경은 2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온 것이다.
개중에는 마법사로 보이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베일 가문에서 단단히 준비를 해 보냈나 보군.’
케일 경이 이끄는 지원군이 사라지자 도현은 그때서야 몸을 돌려 용병 시장으로 걸어갔다.
“다 왔습니다. 다리 상처가 꽤 심한 것 같은데 치료를 잘 받으십시오. 그럼 이만.”
도현은 사내와 헤어져 용병 시장 외곽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텅 빈 집으로 들어간 그는 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동안은 베일 가문과 뤼호른 가문 사이에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 같았다. 당분간은 집에서 수련을 하며 짐브리오를 기다려도 될 듯했다.
브링틱 성에서 좀도둑질과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청년은 복잡한 시장 거리를 배회하며 먹잇감을 찾았다.
‘장님인가?’
눈동자가 온통 회색인 노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손쉬운 상대인데, 크크.’
노인의 뒤를 잠시 따라가던 청년은 사람들이 붐비는 지점에 도착하자 자연스럽게 장님으로 의심되는 노인의 몸에 부딪쳤다.
능숙한 솜씨로 노인의 소지품을 빼내려던 청년은 별안간 느껴지는 노인의 시선에 당황해 뻗었던 손을 다시 빼냈다.
‘뭐, 뭐야, 장님 아니었어?’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정확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눈인데 시선이 느껴져서 소매치기 청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 뭘 봐, 이 미친 노인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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