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디 임팩트 11권 11화
기분 나쁜 공포심이 욕으로 바뀌어 순간 튀어나왔다. 소매치기 청년은 마치 뭔가에 쫓기듯 회색 눈을 가진 노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앞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한 겹 얼음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춥고, 고통스러웠다.
‘으아아아아!’
두려움에 휩싸인 그가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얼음으로 변한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나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거리의 사람들이 놀라 좌우로 피할 때 회색 눈동자를 가진 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죽은 청년을 지나쳐 갔다.
얼마 후 노인은 조용해 보이는 여관이 나타나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한 방 하나 주게. 넓었으면 좋겠군.”
3층 여관방을 얻은 노인은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다 손을 휘저었다.
탁자 위의 주전자에 들어 있던 물들이 허공으로 치솟더니 투명한 날개를 가진 얼음 새 다섯 마리로 변했다.
“그들을 불러오너라.”
노인의 주변을 날아다니던 작은 얼음 새들이 일제히 여관을 벗어나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중 한 마리는 크샤코 가문의 성안에 있는 카샨에게로 향했다.
“탑주님, 저희가 브링틱 성내에 정원이 딸린 넓은 집을 마련해 놨습니다. 그쪽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그렇습니다, 탑주님. 여긴 너무 누추합니다.”
여관에 자리를 잡은 얼음탑주를 향해 노마법사 베져스와 후투가 말했다.
차기 탑주 후보들인 그들은 돈독한 사이로, 브링틱에 와서도 늘 함께 다녔다.
“난 괜찮네. 신경 쓸 거 없어.”
“감히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자네들이 이 여관으로 오면 되겠군.”
부유한 집안 출신인 노마법사 베져스와 후투는 잿빛 로브 안에 온갖 사치스러운 귀금속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었다.
얼음탑의 상징인 잿빛 로브도 필요할 때만 입지, 평상시엔 화려한 차림으로 돌아다니기를 즐겨했다.
성향이 비슷한 둘은 그래서 더욱 가까워졌는지 모른다.
“저희들이 준비한 집이 싫으시다면 차라리 그렇게 하겠습니다.”
“됐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게.”
탑주는 탁자 위에 놓인 술을 마시며 담담히 말했다.
그때 방 안으로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샤비엔다가 들어왔다. 그녀는 다섯 명의 차기 탑주 후보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탑주님, 오셨습니까.”
백발이 치렁치렁한 샤비엔다가 방 안에 유일하게 앉아 있는 탑주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로군. 2년 만인가?”
“그런 듯합니다.”
샤비엔다는 주위에 서 있는 베져스와 후투에게 눈인사를 가볍게 보낸 후 입을 다물었다.
과묵한 그녀는 탑주 다음으로 말수가 적은 여자였다.
잠시 후, 또 한 명의 나이 지긋한 마법사가 등장했다.
그는 드비오였다.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 드비오는 방 안을 둘러봤다. 카샨이 보이지 않았다. 브링틱 성이 아닌 크샤코 가문의 성에서 머물고 있어서인지 아무래도 늦는 것 같았다.
그도 원래는 크샤코 가문의 성에서 머물렀지만 카샨이 어베인 일행을 놓친 이후 지금은 브링틱 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군, 드비오.”
탑주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드비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그것이…….”
“말해 보게. 성격 급한 자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해.”
드비오는 자신에게 고정된 탑주의 회색 눈동자를 보았다.
“실은 카샨 때문입니다.”
“카샨? 그가 왜?”
관심을 드러내는 탑주에게 드비오는 조심스러운 말투로 자신의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이 죽은 사건과 범인들이 감옥에서 탈옥한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는 끝으로 강한 어조로 카샨을 비난했다.
“카샨이 순순히 그자들을 넘겨줬다면 제가 그 자리에서 얼음탑을 욕보인 자들을 엄히 혼내 주고 죽였을 것입니다. 카샨이 시간을 끌고 버티는 바람에 얼음탑의 명성에 흠집을 낸 죄인들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탑주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침묵했다.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베져스와 후투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탑주 앞에 계속 서 있는 드비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방 구석진 곳으로 드비오를 데리고 간 베져스와 후투는 작은 목소리로 힐난을 했다.
“대체 무슨 짓이오?”
“내가 뭘 말이오?”
“제자를 비난하는 것은 곧 스승을 비난하는 일. 당신은 지금 탑주님을 모욕한 거란 말이오.”
금목걸이를 두른 베져스가 손가락질을 했다.
“그래도 있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 거 아니오? 내가 아끼는 마법사들이 죽었는데.”
“당신이 똑바로 했으면 도둑놈들에게 그들이 죽었겠소?”
후투의 지적에 드비오의 얼굴이 벌게졌다.
“보통 도둑들이 아니라고 내가 말했잖소. 마물을 소환하는 강력한 흑마법사도 있었고.”
“당신이 놓친 걸, 카샨이 붙잡았지.”
“내가 그들을 약하게 해 놓지 않았다면 카샨이 애초에 그들을 사로잡을 수나 있었겠소?”
“어찌 됐건 카샨이 잡기도 하고 다시 놓치기도 했으니, 그만 잊으시오. 왜 자꾸 탑주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거요? 칠칠치 못하게.”
“뭐요?”
드비오의 눈초리가 파르르르 떨렸다.
“자네들 거기서 뭐 하는 건가?”
눈을 감고 있던 탑주가 눈을 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탑주님.”
베져스와 후투는 드비오를 힐끔 쳐다보더니 방 중앙에 홀로 서 있는 여마법사 샤비엔다 곁에 섰다.
“드비오, 이리 오게.”
“예? 예.”
드비오는 탑주가 부르자 서둘러 다가갔다.
“카샨의 일은 그가 오면 다시 얘기 나누도록 하지. 그의 말도 들어 볼 필요가 있으니까 말일세.”
조용한 가운데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굳게 닫혀 있던 나무 문이 오랜만에 열렸다.
카샨이 들어서자 방 중앙에 서 있는 네 명의 노마법사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탑주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카샨은 네 명의 노마법사들과 한자리에 어울릴 자격이 없었다.
노마법사들은 긴 시간을 얼음탑 소속으로 활동을 해 왔고, 따르는 휘하 마법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카샨은 탑주의 제자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탑주가 제자로 삼을 만큼 마법에 대한 열의나 자질은 뛰어났고 그 실력도 대단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탑주님.”
카샨은 스승을 한 번도 스승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오직 탑주라 불렀다.
“드비오에게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들었다. 할 말이 있느냐?”
카샨은 옆에 서 있는 드비오를 힐끔 쳐다본 뒤 공손히 대답했다.
“녀석들에게 잡히지 않은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놈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감옥에서 고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감옥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내겐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잖아!”
드비오가 언성을 높였다.
“막무가내로 죄인들을 내놓으라고 하시니 말씀드릴 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드비오 님.”
깍듯하게 사죄하는 카샨의 행동에 드비오는 더는 언성을 높일 수가 없었다.
“크샤코 가문의 성이라면 방비가 철저했을 텐데 어쩌다 탈옥을 허용했느냐?”
“말씀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그날 밤 수십 마리의 전투 몬스터가 죽고 수백 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가문에서는 얼음탑에 죄를 범한 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막다가 저 역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의 말에 방 안에 모인 마법사들이 흠칫했다.
“죄인들을 탈옥시킨 자들은 단 두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의 병력과 몬스터 그리고 저와 싸운 자는 단 한 명, 그자였습니다.”
“어떤 자더냐?”
탑주의 눈빛이 너무 강해 카샨은 감히 똑바로 응시를 할 수 없었다.
“주름진 노인의 외모였지만 제가 보기엔 변장을 한 듯했습니다. 그의 전신에선 젊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생명력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카샨은 비교적 상세하게 옆에서 본 도현의 활약을 설명했다.
“검으로 마법을 깨는 자라…….”
흥미로운 시선으로 카샨의 이야기를 들은 얼음탑주는 담담히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몇몇 검사들이 떠오르긴 한다. 하지만 그들이 기껏 도둑이나 구하려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고 보기는 어렵겠지. 자존심이 있는 그들이 변장을 할 이유도 없겠고. 아무튼 그자가 네 말대로 젊은 자라면 놀라운 일이다.”
탑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샨에게 걸어갔다.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지 않고 상대방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한 너를 높이 평가한다.”
“부끄럽습니다, 탑주님.”
고개를 숙인 카샨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름도 모를 누군가에게 패한 너를 차기 탑주 후보로 유지시켜야 하는지, 얼음탑을 이끄는 탑주로서 심히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돌연 차가워진 탑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샨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를 차기 탑주 후보에서…….”
“탑주님!”
카샨이 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탑주님! 제가 꼭 패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도 얼음 화살을 맞고 결국엔 도망치듯 달아났습니다!”
탑주만이 익힐 수 있는 고대 마법들이 존재했다. 100여 년 전 얼음탑을 세운 초대 탑주가 남긴 것으로,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탑주가 되어야만 한다.
“패하지 않았다?”
“예!”
고개 숙인 카샨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탑주의 말 한마디에 따라 그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네 명의 노마법사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탑주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탑주는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난 널 가르쳤지만 탑주를 선정할 때는 사심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직 얼음탑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을 낙점한다. 이 말의 무거움을 알고 앞으로 주의하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탑주님!”
“일어나.”
탑주는 술을 한 모금 한 뒤 방 안에 모인 다섯 명을 둘러봤다.
“마음 같아서는 얼마 전 벌어진 사건의 범인들을 찾아 나서고 싶지만, 보다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은 차후로 미룬다. 우리는 가야 할 곳이 있어.”
“발굴 중인 고대 도시에 가는 겁니까?”
베져스가 물었다.
“아니, 그곳이 아닐세. 우리는 고대 도시 너머 더 중요한 곳으로 가야 하네.”
사사삭. 스스슥.
지네처럼 생긴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불이 꺼진 집 안을 돌아다녔다.
어두운 실내엔 도현이 앉은 자세로 내면을 관조하고 있었다. 벌레는 도현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허벅지 부근에서 맴돌던 녀석은 도현의 손을 거쳐 옷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도현의 얼굴에 나타난 녀석은 진득한 분비물을 여기저기 토해 냈다.
황산을 얼굴에 부은 것처럼 도현의 피부와 살이 타들어 갔다. 그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도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벌레는 도현의 콧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가 온몸을 헤집고 다녔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가혹한 통증에 도현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몸속을 돌아다니는 벌레를 잡아 쳐 죽이고 싶은 유혹이 거세게 타올랐다.
‘견뎌 내야 한다. 정신이 분산돼서는 안 돼!’
짐브리오를 기다리던 그는 지난 며칠간 내면을 관조하며 정신을 수양하던 중 수천 개의 검이 꽂혀 있는 길을 발견했다.
무의식과 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견한 그 길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장소처럼 다가왔다.
도현은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수천 개의 검을 한 자루씩 일일이 뽑아냈다.
검을 뽑을 때마다 그가 거쳐 온 과거의 기억들과 대면해야만 했다.
바닥에 꽂혀 있는 검들은 그간 땀 흘리며 수련한 노력들과 당시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형상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가 휘둘렀던 힘없는 목검, 부친과 겨루던 검, 홍영에 대한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을 억누르며 새벽 늦게까지 찌르고 베었던 고민 깊었던 검, 부친을 정신병원에 보내고 돌아와 울면서 펼쳤던 분노에 찬 검 등, 온갖 감정들이 응축된 검들은 도현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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