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디 임팩트 11권 12화
그렇게 수천 개나 되는 검들을 제거하며 한 발 한 발 전진해 왔는데, 마지막 검을 앞두고 벌레가 그의 몸에 침투한 것이다.
도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검을 붙잡았다.
힘이 하나도 모이지 않았다.
몸속에 침입한 벌레에 신경 쓰는 순간, 명경지수 같았던 그의 잔잔했던 마음에 파문이 일며 정신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도현은 뒤를 돌아봤다.
목검을 든 어린 시절의 그가 팔짱을 끼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중학생일 때의 그가, 그리고 그 뒤에는 조금 더 성장한 자신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 마. 할 수 있으니까.’
과거의 모습에서 시선을 뗀 도현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거꾸로 박혀 있는 검은 땅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를 악물며 온 정신을 집중해 잡아당겼다.
벌레가 아무리 몸속에서 요동을 쳐도 그는 오로지 앞길을 막고 있는 마지막 검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긴 시간 끝에 마침내 검이 뽑혀 올라왔다.
‘해냈다!’
도현은 마지막 검을 옆으로 던져 놓고 앞을 바라봤다.
평범한 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수천 개의 검이 막고 있던 이 길은 과연 어디로 연결된 것일까. 도현은 새로 나타난 길 위에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올려놨다.
그 순간 도현은 환한 빛에 휩싸여 내면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튕겨 나갔다.
눈을 번쩍 뜬 도현은 손으로 얼굴을 만져 봤다. 실제처럼 느껴졌던 벌레의 공격은 심마의 일종으로, 그의 무예가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녀석이었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닫혀 있던 창문을 열어젖혔다. 햇빛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쉽군. 그 길을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겠어.’
내면을 관조하며 명상에 들어가도 쉽게 마주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전보다 깊어진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도현은 몸을 돌려 식탁으로 걸어갔다.
며칠 전 떠 온 수통의 물이 미지근했다.
‘짐브리오는 언제쯤이나 올까.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지?’
여러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짐브리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돌아선 도현은 의자에 걸쳐 놓은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검을 뽑은 그는 고요한 눈빛으로 검 끝을 응시했다.
내면의 세계에서 마주친 수천 개의 검은 수천 명의 자신이었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면서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머리가 평소보다 훨씬 맑았고 명확히 잡히지 않았던 몇 가지 검을 이용한 기술들이 어느새 체계가 잡혔다.
작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해 보자. 이제는 가능할 것 같아.’
한동안 검 끝을 응시하던 도현이 부드럽게 검을 날려 보냈다. 정면의 벽을 향해 날아가던 검은 도현이 손을 오른쪽으로 움직이자 놀랍게도 방향을 바꿔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이번엔 아래로.’
도현의 손짓에 따라 검은 이리저리 방향을 계속 바꿨다. 허공에 번쩍이는 검광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기로 검을 움직인다.’
내공 소모가 커서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놀라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정신을 집중해 기와 연결된 검을 조종하던 도현은 익숙해지자, 좀 더 정교한 검술을 펼쳐 봤다.
홀로 움직이는 검은 신비로우면서도 어딘지 으스스했다.
‘돌아와.’
검이 공중을 선회하더니 도현의 수중으로 되돌아왔다.
‘다음에 그 마법사를 만나면 이 기술로 깜짝 놀래 줘야겠어.’
크샤코 가문의 성에서 만난 마법사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였다. 위력적인 얼음 마법을 원거리에서 사용해 그가 접근할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고, 기회를 잡아 검을 휘두르면 순간적으로 분신을 만드는 마법을 사용해 그의 검을 번번이 피해 버리곤 했다.
그는 재빠르고 영리한, 싸울 줄 아는 마법사였던 것이다.
도현은 검을 다시 날렸다. 물 찬 제비처럼 검이 집 안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이 기술을 비검술이라고 하자.’
날아다니는 검이란 뜻에서 이름을 지은 도현은 손을 구부렸다.
허공에서 검이 딱 멈춰 섰다.
검을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 고정시키는 게 훨씬 더 많은 내공 소모가 따랐다.
도현의 깊은 내공이 받쳐 주지 못했다면 비검술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검술은 막대한 내공과 검술의 깨달음이 더해진 고차원적인 검술이다.
그의 손이 느리게 왼쪽으로 움직이자 그에 따라 검이 스르륵 방향을 바꿨다.
이윽고 빠르게 날아간 검이 식탁 다리 사이를 통과해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천장을 베고 돌아왔다.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좀 더 가다듬어야겠어.”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천장의 나무가 더 깊이 베였다. 검이 베고 찌르는 미묘한 깊이 차이에 따라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성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산에서 수련을 하자.”
마음껏 비검술을 연습하기에는 집 안은 좁았고, 목표로 삼을 대상도 없었다.
짐브리오를 기다리며 여러 날을 용병 시장 외곽의 집에서 보낸 도현은 인근 산으로 향했다.
집 지하실에는 그가 짐브리오에게 남겨 놓은 편지가 있었다.
짐브리오, 수련을 위해 용병 시장 서쪽의 산으로 갑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만약 집에 머물 형편이 안 된다면 제가 찾아갈 장소를 남겨 주십시오. 확인하는 대로 바로 찾아가겠습니다. 어베인과 로나가 걱정입니다. 괜찮을지. 이 편지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추적
산에서 며칠간 비검술을 수련한 도현은 용병 시장으로 돌아왔다.
‘짐브리오가 왔을까?’
그가 없는 사이에 짐브리오가 찾아왔을지 궁금해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누군가 있다.’
집 안에서 인기척을 느낀 도현은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닥에 둘러앉아 뭔가를 상의하던 다섯 명의 사내들은 도현이 불쑥 나타나자 움찔했다.
‘누구지?’
짐브리오가 아니었다. 낯선 자들이었다.
“뭐냐, 네놈은?”
마치 집주인처럼 말을 하는 사내에게 도현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누구 심부름으로 왔습니까?”
“심부름? 무슨 심부름?”
도현은 그의 반응에 이들이 짐브리오가 보낸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다.
“남의 집에서 뭐 하는 거지?”
도현의 물음에 사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여기가 네 집이냐?”
“그래.”
“거짓말하지 마. 여긴 버려진 집 같은데.”
“청소를 안 해서 그렇지, 내가 엄연히 사는 곳이야. 당신들은 그만 나가 줬으면 좋겠어.”
도현은 술통과 음식 찌꺼기로 지저분해진 집 안을 둘러보며 말을 덧붙였다.
“나갈 때 저것들도 정리해서 가지고 나가고.”
“놀고 있네.”
사내들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무기들을 들고 일제히 일어섰다.
“여기에 네 집 내 집이 어디 있어? 용병 시장 중심부도 아니고 외곽은 아무나 들어와서 집을 짓는다던데. 누가 허가해 준 것도 아니고.”
“허가를 안 해 줘도 주변 사람들 다 그렇게 살고 있잖아. 당신들도 집이 필요하면 저 뒤편 공터에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목재를 구해서 집을 지어. 잘 사는 사람 겁박하지 말고.”
도현은 다가오는 사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우리가 이 집을 나가야겠나?”
사내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자 도현이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돈 벌자고 이곳에 온 것 같은데 굳이 이럴 필요 없잖아. 그리고 저기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도 깨우고.”
벽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사내를 도현이 턱짓으로 가리켰다. 집 안에는 총 여섯 명이 있었던 것이다.
도현이 전혀 겁을 먹지 않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행동하자 무기를 들고 늘어서 있던 사내들이 침을 삼키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도현이 찬 검도 눈에 크게 들어왔다.
하급 용병으로 쳐주기에도 아까운 실력을 갖춘 그들은 결국 침대에 누워 있는 대장을 깨우기로 했다.
“대장, 일어나십시오. 대장!”
“무슨 일이야?”
술에 취해 자고 있던 사내가 눈을 뜨며 물었다.
“저기 말입니다, 여기가 빈집이 아니라네요. 집주인이 왔어요.”
“그래? 이거 실례했군. 하지만 집주인인지 아닌지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
대장이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얼굴을 가린 머리를 쓸어 올린 대장은 늘어서 있는 부하들을 좌우로 밀어내며 도현 앞에 섰다.
“당신이 집주인이라는 증거가…….”
말을 꺼내던 대장의 얼굴이 돌연 굳어졌다. 집주인이란 자가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앞에서 말을 하며 자세히 보니 그가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 당신은!”
“여기서 또 보는군.”
도현이 모자를 벗으며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블리잭을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내 집에서 뭐 하나?”
언변이 능한 블리잭이었지만 다크캐슬에서 인간 도살자라는 악명을 떨친 도현과 마주치자 오금이 저려 왔다.
루드의 일로 오해를 사 그의 손에 얻어터지고 죽을 뻔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었다. 블리잭은 도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 대장.”
믿었던 블리잭이 도현 앞에 엎드리자 남은 사내들이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너희들 뭐 해! 어서 무릎 꿇어!”
부하들을 무릎 꿇린 블리잭은 도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누가 살다가 버린 집으로 착각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저, 정말입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도현은 넘어져 있는 의자를 세웠다.
“다크캐슬에서는 언제 나왔지?”
“루드네 가족이 떠난 다음 날입니다.”
“브링틱에는 왜 온 건가?”
도현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고대 도시 발굴이 한창이라고 해서요. 돈이 될 만한 게 있는지 와 봤습니다. 호기심도 있었고요.”
“저들은?”
“융트에서 만났습니다. 용병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실력들이라 다들 먹고사는 게 힘들어 보여서 제가 이끌고 알레빙스 산맥을 넘어왔지요.”
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크캐슬에서도 느꼈지만 사람 모으는 재주는 탁월한 자였다. 다만 그 재주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자다.
몬스터와 싸우자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 틈에 내빼고, 사기를 쳐 함께한 동료들의 돈을 훔쳐서 달아나고.
남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고 자신만 살면 된다는 행동 방식을 가진 자. 그것이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도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정리해서 나가도록 해. 나는 조금 있다 다시 올 테니까.”
도현이 사라지자 블리잭은 식은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주인이 도현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아니, 이곳에서 만난다는 자체를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대장, 저 사람이 누구기에 그렇게 몸을 사리는 겁니까?”
“내가 어제 술 마시며 얘기한 사람 있었지?”
“다크캐슬에서 악명이 자자하다는 인간 도살자 얘기요?”
“그래. 그가 바로 조금 전 사내다. 내가 아니었다면 너희들 목은 나뭇잎처럼 초라하게 떨어져서 벌써 생을 마감했을 거다. 다행인 줄 알아.”
블리잭은 집 안을 빠르게 훑었다. 능력자인 도현이 대체 왜 이런 외곽의 집에서 초라하게 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의 실력이라면 어디를 가든 환영을 받을 만한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박수를 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최대한 빨리 집 안을 정리한다! 청소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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