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디 임팩트 11권 13화
도현은 술집에서 술을 한잔하며 고대 도시와 관련된 소문들에 귀를 기울였다. 제일 큰 화제는 베일 가문과 뤼호른 가문이 중심인 연합 측과의 싸움이었다.
케일 경이 지원군을 끌고 온 이후로도 싸움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사라지는 건 앞으로 약 한 달 보름 정도 후. 뱃길이 다시 열리면 수많은 병력이 함선을 이용해 이곳으로 밀려올 거야. 그때가 되면 더 큰 싸움으로 번지겠지.’
변수는 브링틱인들이 외지의 병력을 과연 언제까지 막지 않고 지켜만 보느냐는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이 된다면 브링틱은 그들의 안전을 이유로 고대 도시의 싸움에 개입을 할 가능성이 존재했다.
‘베일 가문의 고대 왕궁 터를 차지해 보자고 짐브리오에게 말을 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네.’
그때만 해도 회오리바람이 사라지기 전까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보름 정도가 줄었다. 계획을 짜서 일을 진행시키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더구나 여전히 동료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조금은 무거운 얼굴로 술집을 나선 그는 집으로 향했다. 집이 비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블리잭과 그의 부하들은 여전히 집에 있었다.
“이 집이 마음에 드나?”
도현은 왜 아직 이들이 집에 있는지 궁금했다.
“아닙니다.”
“그럼 왜 아직 여기에 있지?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말이야.”
도현은 깨끗해진 집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저희들을 수하로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십시오!”
블리잭과 다섯 명의 사내들이 절도 있게 외쳤다.
정말 목숨이라도 바쳐서 주인으로 섬길 듯한 태도는 일면 늠름해 보이기도 했다.
블리잭이 자세 하나하나를 지적하며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절도 있게 서 있는 부하들을 곁눈질하던 블리잭은 도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현이 뭐라고 대답을 하든 그를 설득시킬 만한 몇 가지 말들을 준비해 놨다.
‘그의 부하가 돼서 강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에드의 검술 스승이 도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도현의 부하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검을 배우게 될 거라고 상상했다.
험난한 세상을 언변으로만 뚫기에는 점점 힘에 부쳤다. 강해지는 게 필요했다.
도현의 마음에 들 만한 여러 말들을 준비해 놓은 그는 어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현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가.”
“자, 잠시만…… 허억.”
도현의 손에 멱살이 잡힌 블리잭은 집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블리잭의 부하들이 앞다투어 집을 나갔다.
집 안에 있다가는 차가운 눈빛의 도현이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쿵.
도현은 말없이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먼지를 털며 땅바닥에서 일어선 블리잭은 겸연쩍은 얼굴로 부하들을 둘러봤다.
“그의 부하가 되는 건 다시 생각해 보자.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도현은 블리잭 일당이 집 앞에서 사라지자 그때서야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거두어 달라니, 정말 황당한 소리였다.
도현은 침대를 옆으로 옮겨 지하실을 살폈다.
블리잭이 집을 차지하기 전에 짐브리오가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가 다녀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며칠 더 기다려도 안 오면 크샤코 가문의 성으로 가 봐야겠어. 어쩌면 그들이 얼음탑 마법사들에게 또다시 잡혔을 수도 있으니까.’
생각하기 싫은 가정이었지만 도현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야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짐브리오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도현은 집을 나섰다. 고대 도시로 가는 길이었지만 그 전에 한 군데 들를 곳이 있었다.
암거래 상인의 집이다.
도현이 문을 두드리자 문에 난 구멍으로 사람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뭐요?”
“물건을 구입하러 왔습니다.”
눈동자는 도현의 좌우를 살피더니 사라졌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오.”
짐브리오와 방문했을 때처럼 집 안에는 무장한 사내들이 여러 명 있었다. 개중에는 활시위에 걸린 화살 방향을 도현에게 맞춘 사내도 있었다. 바닥에 핏자국도 있는 것을 보니, 실제로 싸움이 벌어진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시오. 먼저 온 사람이 있으니까.”
한동안 기다린 끝에 도현은 암거래 상인을 만났다.
“짐브리오와 같이 왔던 사람이로군.”
늙은 암거래 상인은 기억력이 좋은지 그때 한번 본 도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앉으시오.”
도현의 위아래를 살피던 상인이 책상 앞 의자를 권했다.
“그래, 무슨 일이오?”
“짐브리오가 의뢰했던 물건이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 그 투명한 수정 구슬.”
“물건이 있습니까?”
도현이 살짝 기대를 하며 물었다. 오래전 폭주를 한번 한 이후로 지금껏 폭주를 하지 않고는 있지만 만일을 대비해 이계의 수정을 가지고 있는 게 좋았다.
“아쉽지만 아직 그런 물건은 들어오지 않았소. 다른 상인들에게도 연락을 해 놨으니까 기다려 보시오.”
“그렇군요.”
도현은 턱을 매만지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계의 수정은 고대인들에게 특별하고 귀중했을 것이다. 다크캐슬에서도 단 한 개만을 발견했을 만큼. 더구나 다크캐슬에서 발견한 그 수정은 이미 파손이 된 것이었다.
‘아무 곳에나 보관하거나 방치하지 않았을 거야. 다크캐슬에서도 성주들의 무덤이 있는 지하 유적의 석상에서 존재했으니까.’
도현은 고대 왕궁이라면 이계에서 흘러나왔다는 이계의 수정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가능성이 그 어떤 곳보다 높다고 생각했다.
씨드와 이계의 수정.
둘 다 고대 왕궁이 그 중심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새삼, 베일 가문이 차지하고 있는 발굴지가 더욱 중요해 보였다.
“다음에 또 오도록 하죠.”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상인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짐브리오는 바쁜가 보군. 직접 오지 않고 당신을 보낸 걸 보면.”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베일 가문의 발굴지에 숨어들어 간 건 아닌가? 다른 도둑들도 요즘 그곳을 주시하고 있던데 말이야.”
“아닙니다.”
도현의 담담한 대답에 상인이 웃는 낯으로 넌지시 말했다.
“짐브리오에게 내 말을 전해 주게. 베일 가문의 발굴지에서 좋은 물건이 나오면 내게 먼저 오라고. 높은 가격을 쳐줄 테니까 말이야.”
상인은 짐브리오가 베일 가문의 발굴지를 노리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전하도록 하죠. 그럼.”
모자를 다시 머리에 뒤집어쓴 도현은 암거래 상인의 집을 나와 고대 도시로 향했다.
술집에서 그곳의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또 다를 것이다.
그는 용병 시장과 고대 도시로 이어지는 넓은 마찻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열대우림처럼 깊은 숲을 일직선으로 통과하면 가는 시간을 반 이상 단축시킬 수 있다.
맹수와 몬스터가 등장하는 지역이었지만 도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휘이익.
원숭이처럼 나무를 가볍게 타고 올라간 도현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타고 건너갔다.
달빛을 받으며 숲 위를 거침없이 달리던 그의 시야에 서서히 고대 도시가 나타났다.
나무에서 뛰어내린 도현은 숲을 벗어나 고대 도시로 진입했다.
베일 가문의 땅에 가까워질수록 비명 소리와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한밤중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도현은 길을 차단하고 있는 연합 측의 병사들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큰 싸움 같은데.’
보이지는 않았지만 전장의 소리가 전달하는 느낌이라는 게 있었다.
도현은 병사들이 막고 있는 길에서 물러나 멀리 길을 돌아 피터롤 진영으로 잠입했다.
‘이곳을 이용하면 길을 막고 있는 병사들은 문제가 안 되지.’
피터롤 진영은 베일 가문의 땅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연합 측에 붙어 기습을 감행했다가 칼라치가 이끄는 베일 가문의 병력에 무자비한 보복을 당한 곳이었다.
생존자는 백 명이 채 안 될 정도였고 발굴 시설과 건물 들은 모두 불타서 없어졌다.
당시 도현과 짐브리오는 피터롤 진영의 나무 방벽을 베일 가문 쪽으로 옮기는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것이 보름 전 일이었다.
‘음산하군. 불빛이 보이지 않아. 마치 버려진 장소 같다.’
도현의 시선에 수많은 무덤들이 보였다.
베일 가문이 죽인 피터롤 진영의 사람들이 묻힌 곳이었다.
무덤 사이를 통과한 도현은 피터롤 진영의 방벽에 올라갔다. 방벽을 지키는 병사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름 전 전투에서 대부분 죽어 지킬 병력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도현은 피터롤 진영의 방벽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일부 확인할 수가 있었다. 불화살이 난무하고 있었다.
‘정문과 동쪽 방향이군.’
연합 측은 두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 높은 곳이 필요한데.’
싸움 양상을 자세히 보려면 조금 더 높은 곳이 필요했다.
생각 끝에 도현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기다란 창 하나를 구해서 나무 방벽에 꽂았다.
그러곤 창대 위로 몸을 날렸다.
2미터 이상 되는 긴 창대 위에 올라서자 한결 잘 보였다.
‘방벽을 넘기 힘들겠어.’
케일 경의 지원군이 합류한 뒤로 베일 가문의 방벽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아주 튼튼해져 있었다.
공격하는 연합 측의 희생만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가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많은 세력들이 연합 측에 힘을 보탠 거지? 저 정도 희생을 감수하면서 공격을 가한다는 건, 그만한 병력이 준비되어 있다는 건데.’
케일 경이 합류해 베일 가문의 수비가 단단해지기는 했지만, 연합 측의 세력도 나날이 불어나는 것 같았다.
‘저들도 고대 왕궁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격하는 거겠지.’
베일 가문이 독식하는 걸 지켜볼 수 없는 영주 세력들은 연합해서 땅을 차지한 후 나누자는 의견의 일치를 봤는지도 모른다.
그런 흐름이 계속 이어진다면 의외로 베일 가문이 쉽게 무너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절대적인 힘.
공격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서 싸움의 의지를 꺾어 놓고 새로운 세력들이 합류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 절대적인 힘을 소유한 강자가 베일 가문에 필요한 시점이었다.
보름 전, 싸움 초기에 칼라치가 그런 역할을 해서 뤼호른 가문의 연합 측을 주춤거리게 만들었었다.
‘반돌로 경이나 케일 경의 머리가 복잡하겠군.’
도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들이 내다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도 줄지 않는 연합 측의 병력에 가슴이 답답할 것이다.
‘내가 돕는다 해도 베일 가문이 씨드나 씨드와 관련된 단서를 양보하지는 않겠지?’
어베인과 짐브리오는 로나를 위해 씨드를 찾고 있었다. 그들의 욕심도 있었겠지만.
도현도 전설의 씨드를 복용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한편으론 그도 가능하다면 로나를 돕고 싶었다. 다크캐슬에서 그의 안위를 걱정해 탈옥을 시켜 주려고 위험을 무릅쓴 로나였기 때문이다.
의리. 친구.
비록 이계였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고대 왕궁에 씨드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존재한다면 씨드를 차지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와 동료들이어야 했다.
굳게 다문 입술로 전장을 살피던 도현은 창대에서 뛰어내렸다.
‘다른 곳은 조용하군.’
베일 가문의 발굴지를 살피고 돌아오던 도현은 주변의 방벽을 둘러봤다.
한쪽에선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그 지역을 벗어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롭기까지 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을 지나쳐 도현은 묵묵히 길을 따라 걸었다.
길 좌우로 서 있는 방벽들이 그를 계속 쳐다보는 것 같았다. 고대 도시 발굴 현장이 워낙 넓어서 벗어나려면 아직 상당히 걸어야 했다.
높게 뜬 달을 어깨에 지고 고대 도시를 벗어나던 도현은 문득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별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방상이었지. 검선문의 여덟째 제자. 밤하늘의 별을 모두 끌어다가 내게 쏟아붓는 듯했었지.’
아름답게 빛나는 모래알같이 많은 별을 보자, 도현은 상해에서 그를 상대로 검술을 펼쳤던 뚱뚱한 방상이 떠올랐다.
‘검선문의 역사가 천 년이나 된다고 했는데 그 방대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검법들이 창안됐을까.’
도현은 무인이자 검객이었다.
고대 무인들이 깨달음을 얻어 창안한 각종 무예들이 어떤 색채와 어떤 깊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껏 그는 스스로 내공 운용법을 터득하고 순간의 영감에 따라 신법이나 호검술 후반부 초식, 비검술 등을 만들어 왔다.
스스로 깨친다는 것은 좋은 것이나, 그도 한계가 있었다. 긴 역사의 시간 속에 그보다 앞선 인재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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