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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67화 (267/575)

[267] 디 임팩트 11권 17화

도현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마법사의 정체를 알고 보니 그날 무리해서라도 카샨을 확실히 손보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나중에 잡아서 껍데기를 홀랑 벗겨 버려야지.”

짐브리오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근데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서쪽 산에도 넌 없는 것 같던데.”

짐브리오는 지하실에 남겨 둔 도현의 글을 보고 용병 시장 서쪽에 있는 산을 돌아다녔었다.

“전에 남겨 둔 글을 보셨군요. 다른 곳을 다녀왔어요.”

“어디를?”

식사를 마친 짐브리오가 손등으로 기름기 가득한 입 주변을 훔치며 물었다.

“고대 도시에서 출몰하는 몬스터가 가는 곳요.”

도현은 몬스터를 추적해 먼 곳까지 다녀온 이야기를 해 주었다.

“거목 안의 집을 조사했지만 몬스터들이 왜 그곳으로 모였는지 밝혀 줄 만한 단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내 손을 거치면 숨어 있던 모든 게 나타나지.”

도둑으로서 풍부한 경험이 쌓인 짐브리오가 호기심 짙은 눈빛으로 말했다.

“어쩌면 마법이 펼쳐져 있는 장소일 수도 있어. 내 손이 필요할지도 몰라.”

리타가 손에 묻은 고기 기름기를 짐브리오의 옷소매에 쓱 닦으며 말했다.

“이게 또 내 옷에 닦네! 죽을래?”

“봤어? 미안.”

리타의 새침한 행동에 짐브리오가 주먹을 내보였다.

“또 그러면 맞는다. 알았어?”

“옷 사 줄게.”

“그 말이 아니잖아!”

도현은 말다툼을 벌이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튼 나중에 같이 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발굴지의 몬스터들이 그쪽으로 모이는 게 수상하긴 하니까요.”

“험, 그러자고. 대장도 그 부분을 신경 쓰는 것 같기는 했으니까 말이야.”

“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요.”

도현은 가는 도중 목격한 마법사 이야기를 해 주었다.

“흐음, 얼음탑 마법사들이 그렇게나 많이 브링틱에 들어와 있었나?”

짐브리오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도현의 얘길 들어 보니 얼음탑의 상당한 전력이 이 지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실력이 뛰어나 보이는 노마법사들도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눈썰미가 있는 도현이 한 말이니 신빙성이 높았다.

“짜증 나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떼거리로 모여서 어디로 가는 거야? 카샨도 거기 있었다고?”

“네.”

“지도에도 표시 안 된 지역을 마법사 수십 명이 돌아다닌다? 혹시 도현이 네가 찾은 거목을 찾는 건 아니겠지?”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협곡의 숲을 떠나 그들과 만났던 장소까지 되짚어 오는 동안 그들과 만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알 수 없군. 나중에 마법사 녀석들을 납치해서 알아보자고. 이미 적이 된 녀석들, 물불을 가리면서 상대할 자들은 아니지.”

짐브리오의 말투에는 얼음탑에 대한 차가움이 뚝뚝 떨어졌다.

도현은 가죽 가방에서 청동 술잔을 꺼내 짐브리오에게 건넸다.

“이게 조금 전에 말한 그 청동 술잔입니다.”

“상태가 좋군. 고대 도시에서 발굴되는 물건과 같은 종류야.”

고대 청동 술잔을 살펴본 짐브리오는 도현이 왜 나무 집이 고대인의 집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장식과 모양을 가진 청동 술잔은 지금 발굴 중인 고대 도시에서만 출토되는 것이다.

“맛 좀 보십시오.”

도현은 나무 집에서 가지고 온 술병을 기울였다.

옅은 노란색의 술이 술잔에 조금 담기는 순간, 주향이 넓게 퍼져 갔다.

“오, 기가 막히는데? 이런 술은 평생 처음이다!”

술을 맛본 짐브리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술잔을 탁탁 털어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곁에서 지켜보던 리타가 짐브리오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듯이 넘겨받았다.

“나도 줘.”

리타가 잔을 내밀자 도현은 술을 조금 따라 줬다.

“맛있다. 더 줘.”

“안 돼.”

“왜?”

“다른 사람도 맛보게 해 줘야지.”

어베인과 로나를 떠올리며 도현이 술병의 마개를 꾹 눌러 닫았다. 짐브리오와 리타의 시선은 술병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고대의 술이 분명해.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향기롭고 온몸을 태우는 듯한 뜨거움을 줄 수가 없지.”

짐브리오는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것 같은 고대의 술 맛에 깊게 탄식을 했다. 한동안은 다른 술은 입에도 못 댈 것 같았다.

“짐브리오, 고대 도시는 가 봤습니까?”

도현이 화제를 돌렸다.

“가 봤지. 안 좋아. 베일 가문의 땅에 달려든 놈들이 너무 많아졌어. 베일 가문을 공격하는 영주들의 깃발 수를 세어 봤는데 열두 개나 되더라고. 고대 도시 발굴장에 들어온 세력들의 5분의 1은 연합 측에 도움을 주는 거란 말이지.”

“오면서 저도 들렀습니다. 포위당한 채 싸움을 벌이고 있더군요. 당장은 괜찮겠지만 길게 버티긴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베일 가문도 뜨끔했을 거야. 설마 이렇게 많은 세력들이 힘을 합해서 공격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하긴, 우리도 예상은 못 했지. 뤼호른 가문이 수완이 좋아.”

짐브리오는 답답한 시선으로 집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베인과 로나는 다쳐서 꿈쩍도 못하고, 베일 가문의 땅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은 갈수록 많은 세력들이 꼬이고, 얼음탑과는 원수가 되어 언제 또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고, 게다가 크샤코 가문도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고대 왕궁 쟁탈전에 끼어든다는 건 생각 없는 짓일 수도 있다.

“씨드는 고대 왕궁에 없을 거야. 저것들 다 헛짓거리 하는 거라고. 흐흐흐.”

“미쳤어?”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는 짐브리오에게 리타가 말했다.

“흐흐흐,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이냐?”

“응.”

“…….”

돌아가는 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잠시 자포자기했던 짐브리오가 헛기침을 하며 팔짱을 꼈다.

“짐브리오,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불확실한 것에 대해 얼마만큼 힘을 기울여야 할까.”

“음.”

짐브리오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고대 왕궁에 가치 있는 보물들이 있을 순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그것이고 씨드와는 별개니까요.”

“미안하다. 사실 로나 때문에 대장과 내가 씨드 일에 민감해져서 앞뒤 안 가리고 들이댄 경향이 있어. 널 힘들게 하려고 한 건 아니야.”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불확실한 것을 포기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짐브리오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상황이 정말 좋지 않다.”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합칠 대상이 필요합니다.”

“누구와?”

“베일 가문입니다.”

도현의 대답에 짐브리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쓰러져 가는 녀석들과?”

“그래서 힘을 합친다는 겁니다. 그들이 아쉬울 게 없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과 손을 잡으려고 하겠습니까?”

“음.”

짐브리오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 도현을 응시했다.

“무엇을 요구하려고?”

“고대 왕궁에 대한 권리 반을 달라고 할 겁니다. 만약 씨드가 나온다면 그 역시 반은 우리 차지가 되는 거죠.”

“녀석들이 콧방귀를 뀌겠군.”

“적들의 검이 목 앞까지 다가온다면 어떤 게 현명한 결정인지 판단이 설 겁니다.”

짐브리오는 크샤코 가문의 성을 휘젓고 다니며 일행을 보호한 도현의 무력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가 베일 가문에 합류하면 적들에게는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연합 측에 합류하면 얻는 게 너무 적겠지?”

“이미 이기고 있는 싸움에서 저들이 자리를 내주지는 않겠지요. 저들이 보기에 우리는 초라한 도둑들에 불과할 테니까요. 그리고 저들 중 누구의 약속을 믿어야겠습니까? 뤼호른 가문이 중심이라고 하지만 많은 세력들이 연합한 곳입니다. 우리와의 약속을 책임질 자가 아무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에 비해 베일 가문은 확실하군.”

“네. 확실하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대가를 받아 내야 할 대상도 확실해지고요.”

말을 하는 도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지원군을 이끌고 왔다는 그 케일 경이라는 사람과 대화가 통할 것 같아?”

“안면이 있으니 대화를 시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베일 가문이 지금은 홀로 버티지만 다른 세력을 끌어들일 수도 있거든. 고대 왕궁의 권리 반을 달라는 우리 제안을 거꾸로 그들이 다른 곳에 제안한다면 받아들일 곳이 적지 않을 것 같아서.”

짐브리오의 생각도 타당했다.

“그건 그들이 선택해야 할 문제겠지요. 그때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현의 딱 부러진 대답을 들은 후, 짐브리오는 신중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번 해 보자. 근데 네가 많이 힘들 거다. 대장과 로나는 회복하기 바빠서 별 도움이 못 되고, 나밖에 없어.”

“나도 있잖아. 난 왜 빼?”

조용히 듣고만 있던 리타가 끼어들었다.

“도현, 나도 동료니까 같이해. 고대 왕궁에서 보물 나오면 나도 주고. 알았지?”

“험한 싸움이 될 수도 있어. 위험하고. 괜찮겠어?”

도현의 물음에 리타는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응, 괜찮아. 죽으면 부활하면 되니까. 리치가 돼서 뼈다귀로 살아가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녀의 으스스한 대답에 도현과 짐브리오는 어이가 없었다.

“케일 경은 언제 찾아갈 거냐?”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며칠 있다가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황을 봐 가면서요. 아직은 버틸 여력이 있어 보이니까요. 그때 가서 제안을 해야 콧방귀를 뀌지 않겠죠.”

“그럼 그동안 수상한 나무 집에 다녀올까?”

리타가 제안을 했다.

“아니, 너무 멀어. 내가 혼자 다녀오면 6일 정도 걸리겠지만, 우리가 같이 가게 되면 10일은 걸릴 거야. 그동안 케일 경의 베일 가문은 버티기 어려울걸.”

“아쉽네. 궁금해 죽겠는데.”

“짐브리오, 톨리핀의 산속 거처는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가 보려고?”

“예.”

“아주 멀진 않아.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니까.”

짐브리오는 대답을 하면서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여기까지 간 다음에, 산을 올라가면 돼. 리타, 너 산길 기억하고 있지?”

“응.”

“도현하고 다녀와. 나는 이곳에서 베일 가문과 연합 측이 벌이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아닙니다, 짐브리오.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산속에 있는 은거지 위치만 설명해 주십시오.”

“나랑 가는 게 싫어?”

리타가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싫긴. 혼자 다녀와도 충분하니까 그러지. 리타는 여기서 쉬고 있어. 금방 올 테니까.”

“치이, 알았어.”

도현은 술병과 잔이 든 가죽 가방을 등에 멘 다음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다녀오겠습니다.”

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은 도현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어린애 취급한다니까.”

리타는 투덜거리다 짐브리오를 올려다봤다.

“이 손 안 치워? 비골 소환한다.”

리타의 위협에 짐브리오는 서둘러 그녀의 머리 위에 올린 손을 내렸다.

괜히 도현을 따라 한번 해 봤다가 큰일이 날 뻔했다.

약초 노인 톨리핀은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통나무집 앞에서 다양한 약초를 말리고 있었다.

수분이 사라져 가는 약초들은 쪼그라들어 볼품이 없었지만 바람이 불 때면 약초 특유의 강한 향이 주변을 휩쓸었다.

“향이 좋군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약초를 뒤적거리던 톨리핀이 뒤를 돌아봤다. 도현이 서 있었다.

“어서 오시오. 무사하셨군.”

감정의 기복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짐브리오에게 들었습니다. 동료들을 치료해 주셨다고요. 고맙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도현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당신들에게 고마워해야지.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나를 구해 준 게 당신들이니까.”

“별말씀을요.”

도현은 톨리핀 어깨 너머로 보이는 통나무집에 시선을 두었다.

“제 동료들은 안에 있습니까?”

“들어가 보시오.”

톨리핀은 하던 일을 마저 하려는 듯 허리를 구부려 약초에 손을 댔다.

‘이 사람은 왜 감옥에 갇혀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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