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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68화 (268/575)

[268] 디 임팩트 11권 18화

의술을 겸비한 약초꾼 노인의 등을 잠시 응시하던 도현은 그를 지나쳐 지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통나무집으로 들어갔다.

한약재와 비슷한 향이 가득한 집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는 조금 더 넓었다.

짐승의 털가죽이 깔린 바닥에 어베인과 로나가 누워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도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 얼굴로 지내고 있을 거라 상상했는데, 막상 그들이 담담한 미소로 반겨 주자 도현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까이 다가간 그는 그들의 발치에 서서 얼굴을 내려다봤다.

감옥에서 나올 때만 해도 상처 나고 멍들고 부어올라서 알아보기 어려웠던 얼굴이 지금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우리 모습이 우습죠?”

로나가 마른 입술로 물었다.

“전혀요. 몸은 어때요?”

“좋아지고 있어요. 고마워요, 구해 줘서.”

“할 일을 한 거뿐이에요. 우린 동료니까.”

도현의 대답에 로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도둑 인생을 감옥에서 마감할 뻔했네.”

어베인이 말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움직여도 됩니까?”

“괜찮네. 누워 있었던 건 약 효과가 다 스며들 때까지 누워 있으라고 해서야.”

보릿자루 같은 옷 안에 손을 집어넣은 어베인은 상처 부위에 붙어 있던 으깬 약초들을 하나둘 떼어 냈다.

로나도 일어나서 어베인처럼 약초들을 떼어 냈다.

“짐브리오와 리타는?”

“용병 시장의 집에 있습니다.”

도현은 앉아 있는 어베인과 로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짐브리오에게 들었네. 베일 가문의 땅에 고대 왕궁이 묻혀 있다고.”

“네.”

“한번 가 보고 싶은데 몸이 이래서 답답하군.”

어베인의 아쉬움이 얼굴에 절로 묻어났다.

“그곳을 차지하자는 말을 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인가?”

어베인은 씁쓸함을 머금은 미소로 도현을 응시했다.

몬스터에게 당한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얼음탑 마법사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당해서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잘 짜인 계획 속에 호흡을 맞춰 나가야 그런 큰일을 시도라도 해 볼 수가 있는 것인데, 로나와 자신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마음이 쓰라렸다. 그리고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서 저곳의 사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른다.

어려운 일일수록 때와 운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베인은 얼음탑 마법사들과 얽혀 버린 게 아쉬울 뿐이었다.

“상황이 꽤 어려워졌습니다.”

“그럴 테지.”

도현은 한쪽으로 기운 전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고대 왕궁을 반이라도 차지해 볼까 합니다.”

도현은 짐브리오와 나눴던 대화를 어베인과 로나에게 말해 주었다.

“베일 가문을 돕고 고대 왕궁의 권리를 요구한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지만 그들이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연합 세력의 힘이야. 자네가 막을 수 있겠나?”

어베인은 다소 무거운 얼굴 표정을 지었고, 로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현을 쳐다봤다.

“마음은 그런데 정 안되면 도망가야겠지요.”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도현이 가벼운 어투로 대꾸를 하자 어베인과 로나는 어이가 없었던지 웃고 말았다.

“그 정도 여유면 멍청하게 베일 가문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지는 않겠군. 한번 해 보게. 우리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대로 자넬 돕기 위해 찾아갈 테니까.”

“서두르실 필요 없습니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도현은 메고 온 가죽 가방에서 술병과 잔을 꺼냈다.

“술을 드셔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되지. 어제도 톨리핀과 함께 우리는 술을 마셨다니까.”

“양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술을 조금씩 맛본 어베인과 로나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굉장해요. 어디서 난 술이에요?”

로나가 흥분한 어조로 묻자 도현은 웃으며 거목 속 집 이야기를 해 주었다. 술에 대한 관심은 차츰 몬스터가 모여 있었다는 그곳에 대한 관심으로 변해 갔다.

“놀랍군. 몬스터의 목적지가 그런 장소였다니.”

“고대인의 집이라고 의심은 되지만, 그 외에는 발견한 게 없습니다.”

생각에 잠긴 어베인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마지막 남은 술을 청동 술잔에 담아 일어섰다.

밖으로 나온 그는 화로에 약을 달이고 있는 톨리핀에게 다가갔다.

“술맛이 괜찮더군요. 드셔 보십시오.”

“향이 좋군.”

바람에 실려 오는 주향에 톨리핀은 기분 좋은 얼굴로 술을 음미하며 마셨다. 양이 적어 세 모금 정도 마시자 술잔의 바닥이 드러났다.

그 역시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더 있느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잘 마셨소.”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습니까?”

어베인과 로나의 치료에 성심을 다하는 것 같은 느낌에 도현은 하나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저 위쪽으로 가다 보면 계곡이 하나 있는데 그곳 중턱에 붉은 꽃잎을 가진 약초들이 자란다오. 뿌리가 상하지 않게 캐 올 수 있겠소?”

도현은 톨리핀이 내미는 가방을 들고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벌써 갔다 온 거요?”

“여기 확인해 보십시오.”

톨리핀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도현이 내미는 가방 안을 살폈다. 약초들이 가득했다.

크샤코 가문의 성을 탈출할 때 도현이 싸우는 모습을 봐서 그가 강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발이 빠른 사람인 줄은 몰랐다.

“더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이만하면 됐소. 다른 건 넉넉히 있으니까. 그나저나 참 걸음걸이가 빠르오.”

도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때 로나가 비틀거리며 집 안에서 나왔다. 도현이 얼른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바깥 공기 좀 마시려고요. 같이 산책할래요?”

파리한 안색의 로나를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로나는 도현의 몸에 의지해 느릿느릿 산길을 걸었다. 무성한 나뭇잎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그들 머리 위에 쏟아졌다. 주변엔 이름 모를 약초의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이곳은 톨리핀이 수십 년 전에 약초의 씨앗을 뿌린 곳이래요. 그것들이 다 자라서 지금의 우리를 치료해 주는 약으로 쓰이고 있는 거죠.”

“그렇군요.”

대답을 하는 도현의 시선은 약초가 아닌 약초를 가리키는 로나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왼쪽 새끼손가락 두 마디가 보이지 않았다. 감옥을 탈출할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로나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아요? 나머지 손가락은 멀쩡하니까요.”

“누가 그런 겁니까?”

“카샨요. 마법으로 손가락을 얼리더니 간수 보고 깨라고 했어요.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 않았어요.”

밝게 대꾸한 그녀는 바위가 나오자 그쪽으로 걸어갔다.

둘은 널찍한 바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길게 숨을 몰아쉰 그녀는 손톱을 내려다봤다. 고문으로 뽑혔던 손톱들이 다시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상처는 아물고 손톱은 다시 자라나고 수십 년 전 뿌렸던 씨앗들은 약초가 되어 나타나고, 나도 죽으면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나겠죠?”

“로나…….”

“솔직히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내 선조들의 피가 이어져 단명할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근데 어베인과 짐브리오를 보면 미안해져요. 난 괜찮은데, 그들은 날 위해 씨드를 찾아보겠다고 노력을 하잖아요. 그래서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고요. 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포기하면 안 되잖아요.”

담담히 말을 한 그녀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베일 가문과 손을 잡으려는 이유, 나 때문인가요? 고대 왕궁에 있을지 모르는 씨드 때문에?”

“이거 미안한데요. 난 로나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그런 건데.”

“정말요? 아닌 것 같은데.”

“고대 도시에 이계의 수정이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을까 유추해 봤어요. 그랬더니 고대 왕궁이 제일 유력한 장소지 뭡니까?”

“아아, 그렇군요.”

“그럼요. 게다가 씨드도 있으면 더 좋은 거고. 그뿐만 아니라 고대 왕궁에 어떤 보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우린 부자가 될 수도 있다고요.”

“당신은 돈에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봤나 봐요?”

“잘못 본 게 맞아요.”

로나는 도현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바위 위에 누웠다.

“고마워요. 나 때문이 아니라서.”

“…….”

“조심해요. 고대 왕궁 차지한다고 다치지 말고.”

“네.”

도현은 금세 잠이 든 로나의 곁을 말없이 지켰다.

무허는 갈수록 잠이 드는 시간이 길어지고 기력이 쇠해지고 있었다.

태선군의 기습적인 장풍에 맞아 수백 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진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으나, 보양단으로 일시적으로 막아 놓은 내상이 도져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렸다.

죽음.

생전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인생의 끝이 그를 기다리는 게 느껴졌다.

기침을 하며 누운 자리에서 일어난 무허는 다탁에 놓인 식은 차를 기울여 찻잔에 담았다.

요즘 그의 유일한 낙은 식은 차를 조금씩 음미하는 재미뿐이었다.

“왔으면 들어오너라.”

무허의 말이 떨어지자 방문이 열리고 안으로 섭상이 들어섰다.

용사 계곡 정상에서 태선군과 싸우다 절벽 아래로 추락한 무허를 구한 건 옥룡산에 있는 도관의 도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도인들은 모두 섭상과 연관된 자들로, 섭상이 찾아와 사경을 헤매던 무허를 치료해 홍콩에 있는 그의 비밀 안가로 옮긴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섭상의 사형제들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수족처럼 부리는 주성하에게도 섭상은 얘기하지 않았다.

“한동안 바빠 들르지 못했습니다.”

“인사는 필요 없다.”

무허는 냉랭하게 말한 후 차를 마셨다.

“몸은 어떠십니까?”

“좋지 않다. 다음번 네가 왔을 때는 송장이 되어 저 자리에 누워 있을 것이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죽음이 다가오니 은원이 모두 부질없게 느껴지는구나.”

눈을 지그시 감은 무허가 차를 다시 한 모금 했다.

“패배자가 죽으며 느끼는 가장 저급한 생각입니다. 억울함을 감추기 위한 위선이지요.”

섭상은 뚜벅뚜벅 방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무허의 앞에 섰다.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허 사숙은 사부님에 대한 원한을 잊을 분이 아닙니다. 제가 압니다. 사숙의 원한, 제가 갚아 드리겠습니다.”

섭상은 한쪽 무릎을 꿇고 무허를 올려다봤다.

“사숙, 내공과 심득을 제게 전수해 주십시오.”

“마귀 같은 녀석.”

“사부님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저밖에 없습니다. 은원을 제게 넘겨주시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십시오.”

의자에 몸을 기댄 무허는 섭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리석은 녀석아, 내공을 전수받기 위해선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아느냐?”

“잘못되면 제 단전이 파괴되어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한데도 정녕 시도를 해 보겠다는 것이냐?”

“전 어려서부터 도전을 좋아했습니다.”

섭상이 웃으며 말했다.

“죽고 싶다면 오냐, 네 뜻대로 해 주마.”

차를 비운 무허는 벌떡 일어나 섭상의 정수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계약

무너진 방벽을 통해 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밀려들어 왔다.

“물러서지 마라!”

푸른색 사자 갑옷을 착용한 케일 경이 마나를 사용하는 연합 측 검사 몇을 쓰러트리면서 용맹하게 외쳤다.

그의 긴 수염은 적들이 휘두른 검에 잘려 예전처럼 멋진 모습은 아니었다.

“크아악!”

케일 경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숫자만 믿고 달려들던 적들의 시신이 뒹굴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뒤엉킨 무너진 방벽 일대에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퍼엉!

병사들을 지휘하며 고군분투하던 케일 경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장신의 적이 휘두른 철퇴가 그의 사자 갑옷을 때린 것이다. 갑옷으로 심각한 부상은 면했지만 고통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지상에 추락한 그를 향해 장신의 적이 다시 철퇴를 내리찍었다.

“뒈져라!”

그는 제법 이름을 날리는 연합 측의 장수였다.

빠르게 다가오는, 피와 살점이 묻은 철퇴를 몸을 굴려 아슬아슬하게 피한 케일 경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정면으로 돌진했다.

서걱.

철퇴를 검으로 튕겨 낸 케일 경의 검날이 장신의 적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크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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