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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69화 (269/575)

[269] 디 임팩트 11권 19화

요란한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적을 뒤로하고 케일 경은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주워 들었다.

“모두 모여서 적을 방벽 뒤로 밀어내라!”

흩어져서 전투를 벌이던 정예 병사들 수백 명이 방패를 앞세우고 케일 경을 중심으로 뭉쳤다.

베일 가문은 대륙에서 가장 호전적인 곳 중 한 곳이었다. 그래서 주변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전쟁으로 단련된 정예 병사들이 많았다.

케일 경이 지원군으로 데리고 온 병력의 태반이 그런 전쟁터에서 기술을 익히고 싸움을 벌이며 생존한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이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수적으로 몇 배나 많은 연합 세력이 아직도 방벽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커헉!”

“윽!”

철벽같은 방어벽을 유지하며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케일 경과 정예 병사들 손에 침입해 들어왔던 적들이 서서히 밀려났다.

쿠웅.

마침내 무너진 방벽을 되찾은 케일 경은 뒤를 돌아봤다.

“적들의 시체로 벽을 쌓아라!”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을 쏟고 있는 적들의 시신이 부서진 방벽을 대체해 산처럼 쌓였다.

피 냄새가 진동했고 시신에서 나온 피들이 방벽 너머 적들을 향해 흘러갔다.

참혹했지만 땅을 지켜야 하는 케일 경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전쟁에서 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그 지독한 모습에 연합 측도 기가 죽었는지 이날은 더는 싸움을 걸지 않았다.

피 묻은 투구를 벗은 케일 경은 지휘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 못지않게 흉험한 전투를 벌이며 오늘도 방벽을 지켜 낸 반돌로와 세 개 용병단의 단장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케일 경이 자리에 앉자 반돌로가 술을 따른 잔을 건넸다. 말없이 술잔을 받은 케일 경은 심란한 얼굴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케일 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단장들께서는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가십시다.”

늙은 세 명의 용병단 단장들은 조용히 지휘소를 나갔다. 안에는 반돌로와 케일만이 남았다.

술을 한 모금 한 케일 경이 반돌로를 응시했다.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는 없소. 어찌할 생각이오, 반돌로 경?”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시오. 모든 걸 잃느냐, 아니면 일부라도 우리 것을 만드느냐.”

“경은 가족이 없으니 그런 말씀을 쉽게 하시겠지만, 난 집안 식솔들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대공께서 나중에 나를 문책하실 수도 있어요.”

“나도 여기에 도착할 때만 해도 이 정도 병력이면 무리 없이 지켜 낼 거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잖소? 저 겁 없는 자들이 뤼호른 가문 쪽에 붙어 큰 세력을 형성했으니 말이오. 반돌로 경, 이곳 책임자인 당신은 대공께 가장 이득이 될 만한 결정을 하면 되는 거요. 당신이 여기서 싸우다 죽는다고 해서 대공이 기뻐할 것 같소?”

“음…….”

반돌로는 고민 깊은 눈빛으로 술을 마셨다.

“브링틱의 원로들에게 사람을 보내시오. 그들도 이곳에 고대 왕궁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명분이 없어서 개입하지 못하고 있을 거요. 그들에게 명분을 주고 병력을 빌려 오시오.”

“도와 달라는 제안을 이미 한 차례 거절했는데…….”

“그때는 대가가 적었지만 지금은 반을 내놓겠다는 게 아니오.”

케일 경은 지휘소에 있는 지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병력으로는 얼마 못 버티는 걸 당신도 잘 알 거요. 대공께서 뤼호른 가문이 중심이 된 연합 놈들에게 땅을 빼앗기는 것과 브링틱의 원로들과 고대 왕궁을 나누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을 더 불편해하실지 잘 생각해 보시오.”

지휘소를 나온 케일 경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와 갑옷을 풀고 피 묻은 얼굴을 물로 닦아 냈다.

그러다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흠칫한 그는 세수하다 말고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촛불의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구석에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서 있었다.

“접니다.”

그 사람은 불빛 앞으로 나서며 모자를 뒤로 넘겼다.

“아니, 자넨?”

융트에서 헤어진 도현을 알아본 케일 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잠시 도현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케일 경은 검을 거두고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격전장에 불쑥 나타난 도현이 의심스럽긴 했지만 융트에서 오고 간 말이 있어서 한 가닥 기대감도 생겼다.

충성을 맹세하면 후견인이 되어 모든 걸 넘겨주겠다고 말을 했지만 당시 도현은 거부했고, 마음이 바뀌면 찾아오라고 했다.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온 건 아닐지 추측을 해 본 것이다.

천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 낸 케일 경은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잡으며 도현을 힐끔 돌아봤다.

“설마, 암살자로 여기에 들어온 건 아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넨 용병 아닌가. 방벽 밖에는 우릴 죽이려는 녀석들이 바글거리고 있고.”

“아쉽지만 그런 의뢰를 해 오는 사람이 없더군요.”

도현의 대답에 케일 경이 낮게 웃었다.

“내 숙소는 어떻게 알아냈나?”

케일 경은 도현에게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어제부터 돌아다녔습니다. 숙소를 알아내려고요.”

“큰일이로군. 외부에서 이렇게 쉽게 사람이 들어와서야.”

케일 경은 의자를 가지고 와 도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할 말이라는 게 뭔가?”

“연합과의 싸움이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칼을 빌려주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서요.”

“후견인 이야기가 아니었군.”

케일 경이 실망한 표정으로 술을 마셨다.

“죄송합니다.”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래도 한편으론 든든하군. 자네 같은 실력자가 내 편이 되어 주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다니. 내가 자네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보장해 주겠네. 이곳 책임자인 반돌로 경에게도 자넬 소개해 주고.”

도현은 술잔에서 입을 떼며 차분히 말했다.

“그런데 제가 원하는 보상이 큽니다. 화를 내실 정도로 말입니다.”

“하하하, 얼마든지 말해 보게.”

도현이 제시하는 금액 정도는 충분히 맞춰 줄 수 있다고 생각한 케일 경이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고대 왕궁에 대한 권리를 베일 가문과 똑같이 나누어 갖고 싶습니다.”

케일 경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다시 말해 보게.”

“고대 왕궁의 권리를 나누어 주십시오.”

“진심인가?”

“네.”

케일 경은 굳어진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해할 수가 없군. 자네가 나와 검을 주고받을 정도로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실력을 믿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다니 말이야.”

“경이 생각하는 제 실력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증명해 보게.”

도현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방 한쪽에 있는 육중한 케일 경의 사자 갑옷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강력한 내공의 힘으로 발휘한 허공섭물에 이어 도현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날렸다.

푸른 빛이 맺힌 도현의 검은 단단한 사자 갑옷을 마치 사과를 깍듯 테두리부터 얇게 베어 갔다.

번쩍이는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순식간에 사자 갑옷이 중앙의 사자 머리만 남기고 모두 떨어져 나갔다.

“베일 가문의 상징은 남겨 두겠습니다.”

도현이 손짓을 하자 검이 그의 수중으로 되돌아왔고, 작아진 사자 갑옷은 둥둥 떠서 케일 경의 발밑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케일 경은 너무 놀라서 일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검이 저절로 움직여 정교한 움직임으로 단단한 갑옷을 깎아 내다니.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도현은 저 무거운 사자 갑옷을 손도 대지 않고 움직였다.

“첫 전투 때 막강한 파괴력으로 연합 측의 사기를 떨어트린 적발 거한이 있었습니다. 칼라치라고.”

“알고 있네. 반돌로 경이 얘기해 주었어. 그자가 없는 걸 무척 아쉬워하더군.”

“칼라치가 고대 왕궁 발굴지에서 싸운 사실도 아십니까?”

“그것도 들었네. 어떤 사내에게 큰 부상을 당해 이디언의 도움을 받고 도망쳤다지.”

작게 변한 사자 갑옷을 손에 들고 대답하던 케일 경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또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네가?”

“네. 칼라치를 부상 입힌 사람이 접니다. 이만하면 제가 감히 그런 요구를 할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케일 경, 제가 검이 되어 연합 측의 세력을 깨어 버리겠습니다. 지키지 못하면 저 역시 얻는 게 없으니 베일 가문도 나쁠 건 없습니다. 결과만 보십시오.”

케일 경은 사자 갑옷에 손을 올려놓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칼라치가 30년 전 대륙의 강자 중 한 명이었던 스므차의 친위대장을 죽인 사내라는 소리를 반돌로에게 들었다. 실제로 첫 전투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도.

그런 칼라치를 이긴 도현이 손을 잡자고 제안했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눈을 뜬 케일 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멀쩡한 갑옷을 망가트렸으니 어떻게 보상할 텐가?”

“죄송합니다.”

“자네, 브링틱에 온 이유가 뭔가? 씨드가 있다는 소문을 믿고 온 건가?”

도현의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며 케일 경이 물었다.

“그런 이유도 있고, 다른 이유도 좀 있습니다.”

“고대 왕궁에 씨드가 없을 수도 있어. 전설은 그저 전설이니까. 고대 왕궁의 권리를 반이나 달라는 건 결국 씨드도 있다면 공평하게 나누자는 뜻이겠지.”

도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자네 제안은 생각을 좀 해 봐야겠네.”

“그러시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빠른 결정을 내리실수록 베일 가문의 희생도 줄이고, 연합 세력을 더 빨리 와해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그러니까요.”

케일 경은 술을 비우며 도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실은 이미 다른 곳과 손을 잡으려고 추진 중이야. 그러니 자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난 이곳 일을 떠나서 여전히 자넬 후견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렇군요. 혹시 어느 쪽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케일 경은 술잔을 흔들며 답했다.

“브링틱의 원로들이네.”

도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곳 책임자는 반돌로 경이네. 솔직히 내가 결정을 할 수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자네와 계약을 맺어 보고 싶지만, 내 영역 밖이군. 난 반돌로를 압박할 수 있지만, 최후 결정은 그가 아니면 안 되네. 차후에 대공께 보고를 할 때도 말이야. 내 입장을 이해해 주겠나?”

“아쉽게 됐군요.”

브링틱의 원로들과 자신을 두고 선택하라고 하면 아무래도 저울은 원로들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반돌로 경에게 제 제안을 전해 주실 수는 있습니까?”

“물론이지. 만약에 브링틱 원로들이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때는 내가 자네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네.”

“감사합니다.”

도현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 이대로 연합 녀석들에게 가는 건 아니겠지? 그쪽은 먹이를 보고 달려든 녀석들이 너무 많아서 자네 몫이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케일 경은 도현의 행보가 은근히 부담된 눈치였다. 당장 도현이 칼을 빼 들고 진영 안을 돌아다니면 그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사실 저 말고 동료들이 몇 명 더 있습니다. 그들을 대표해서 제가 온 것이기 때문에, 돌아가서 상의를 해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베일 가문의 입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원로들이라…….”

고대 도시 근처에 있는 숲에서 도현을 기다린 짐브리오는 사각 턱을 훔치며 미간을 좁혔다.

“이거 너무 비교되는데.”

도현과 리타를 둘러본 짐브리오는 손가락을 셌다.

“현재 우린 세 명. 그리고 저쪽은 브링틱을 지배하는 원로들. 한 달 뒤에 뱃길이 뚫려서 영주들의 지원군이 밀려와도 원로들이 버티고 있으면 베일 가문은 든든할 게 아닌가. 당장 곤경에 처한 것도 면하고.”

“그럼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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