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디 임팩트 11권 21화
“임무에 집중하시오, 반돌로 경!”
케일 경이 화난 얼굴로 탁자를 내리쳤다.
“이 모든 게 당신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야! 대공의 명령 때문이지! 당신도 대공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시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고대 도시엔 아직 많은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협상을 해서 연합군과 싸우면 됩니다!”
“언제 저 많은 연합군과 싸울 세력을 모은단 말이오! 그럼 왜 진작 그러지 않았소! 내가 누차 그러자고 주장을 했지만 당신은 믿을 수 없다며 끝까지 거부했고, 그래서 내가 가장 신뢰할 만한 세력으로 원로들을 끌어들인 게 아니오!”
“신중한 것도 죄란 말이오!”
반돌로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바로 앞에서 서로를 향해 강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며칠 뒤엔 요리사들과 학자들까지 손에 검과 활을 들고 방벽에서 싸워야 될 거요. 그때가 되면 백도현이 아쉬울 거요. 그 전에 당신이 말한 고대 도시의 세력들을 가능한 많이 끌어오시오. 이곳을 지키려면.”
케일 경이 투구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반돌로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문이 닫히기 전 큰 소리로 케일 경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백도현! 계약을 맺을 테니 데리고 오세요!”
“여기서 기다릴 줄 알았지.”
숙소에 유령처럼 가만히 서 있는 도현을 발견한 케일 경은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항상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는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힘들어 보이는군요.”
“나이가 들어서 이제 이런 일도 못 하겠어. 돌아가는 대로 대공께 작은 땅이라도 달라고 해서 여생을 보내야지.”
도현은 원로와의 일이 궁금했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케일 경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눈을 감고 앉아 있던 케일 경이 도현을 쳐다봤다.
“원로들과는 잘 안 됐네. 자네가 필요해.”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돌로는 자넬 별로 신뢰하지 않고 있어.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말을 해야겠지.”
“그렇군요.”
“그래도 그를 이해해야 돼. 수많은 생명들이 오직 이곳을 지키기 위해 죽어 갔으니까. 물론 공격하는 녀석들도 그렇지만 말이야. 그런 곳을 자네는 힘 하나만을 믿고 너무 무난하게 들어오려고 하고 있어. 어찌 보면 이곳의 상황을 이용하는 측면도 다분하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뭐, 괜찮네. 강한 자가 세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법이니까. 자네도 그만한 노력을 기울였을 테고.”
케일 경은 기침을 몇 번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돌로를 만나러 가세.”
도현은 케일 경을 따라서 지휘소로 들어갔다. 반돌로가 뒷짐을 진 상태에서 발굴지가 그려진 지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도현입니다.”
도현이 먼저 인사를 했다.
뒷짐을 푼 반돌로는 케일 경과 같이 들어온 도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키가 좀 크고 적당히 균형 잡힌 몸매의 젊은 사내였다. 눈빛이 유독 깊긴 하지만, 이런 사내에게 적발 거한 칼라치가 패했다는 게 선뜻 믿기지는 않았다.
반돌로는 뒷짐을 풀며 기습적으로 허리에 검을 뽑아 도현의 목을 향해 찔렀다.
마나를 이용한 쾌검이었다.
번쩍이는 빛처럼 보이는 반돌로의 빠른 검을 도현은 피하지 않았다.
피하는 대신 손가락에 내공을 모아 반돌로의 검신을 옆에서 때렸다.
쩌어엉.
맑은 소리와 함께 반돌로의 손에서 벗어난 검이 벽면에 꽂혔다.
반돌로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현이 검을 손가락으로 치는 순간 막대한 힘이 그의 손아귀에 전달됐고, 감히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만 것이다.
창피함과 도현의 뛰어난 솜씨에 놀란 마음이 뒤엉킨 그에게, 도현이 벽면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공손하게 되돌려줬다.
“몸이 너무 과하게 반응했나 봅니다. 손은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거기 앉게. 케일 경도 앉으시죠.”
긴 탁자의 상좌에는 반돌로가, 양옆으로는 도현과 케일 경이 마주 보듯 앉았다.
“난 반돌로네. 이곳 책임자지.”
“알고 있습니다.”
“자네의 제안을 들었네. 고대 왕궁의 권리를 반이나 갖겠다고?”
“네.”
“너무 염치없는 거 아닌가?”
반돌로는 케일 경을 힐끔 쳐다본 후 말했다.
“마음이 편치는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제 가치가 그 정도는 된다고 평가합니다. 베일 가문의 땅을 보호하기 위해 전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대공께서는 땅을 지키라 명하셨지, 나누라 하시지는 않았네. 차라리 금화로 주면 어떻겠나?”
케일 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현과 이미 얘기를 하고 왔는데 반돌로가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제가 원하는 건 고대 왕궁에 대한 권리입니다.”
“솔직히 말하겠네. 자네가 힘을 발휘해 이 위기가 넘어가도 자네와 맺은 계약은 무효가 될 수도 있어. 대공께서 허락 하시지 않으면 신하 된 입장으로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그럼 원로들과의 협상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되고 저는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반돌로가 헛기침을 했다.
“결국엔 경께서 대공께 어떻게 말씀하시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연합 세력을 제가 와해시키겠습니다.”
“고대 왕궁에 대한 권리를 반드시 갖겠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안 된다면 어찌할 텐가?”
“비는 어디든 쏟아집니다. 비구름이 연합 세력 쪽으로 가려는데 억지로 붙들지 마십시오.”
“우리와 싸울 수도 있다는 뜻인가?”
반돌로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도현은 별 대답 없이 가만히 탁자에 시선을 두었다. 심기가 불편한 반돌로를 굳이 더 자극할 필요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 반돌로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휘소에 있는 서랍을 열어 안에서 종이를 꺼낸 그는 베일 가문의 대표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도현이 원하는 대로 고대 왕궁에 대한 권리 반을 넘겨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가?”
“연합 세력이 와해되면 곧장 고대 왕궁에 대한 발굴을 개시한다는 내용입니다. 발굴에 관해 당연히 저와 제가 지정한 동료들도 참여할 수 있고요. 권리가 있으니 문제가 없겠지요?”
시간을 끌다 다른 소리를 할까 봐 도현은 속전속결로 일을 진행시키려 했다.
그의 목표는 가급적 뱃길이 열리기 전, 고대 왕궁의 발굴을 마치는 것이다.
“급하게 할 필요가 있나? 서두르다 중요한 유물이라도 파괴가 된다면 우리 모두가 손해인데? 천천히 하세.”
“베일 가문에서 파견한 학자들이 아주 훌륭하다고 들었습니다. 현장에서 지켜보며 일꾼들을 감독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요.”
반돌로는 옆에 따라 놓은 술로 목을 축였다. 계약서에 글을 한 자 한 자 적을 때마다 속이 쓰라렸다.
두 부의 계약서가 완성되자 반돌로는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그리고 서명도 했다. 옆에서 참관한 케일 경도 숙소에서 가지고 온 인장을 찍고 서명을 했다. 마지막으로 도현이 이름을 적고 손도장을 꽝 찍었다.
“이 계약서가 설사 사라지더라도 계약은 영원히 유효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한 도현은 준비해 온 작은 통 안에 계약서를 말아서 보관했다.
와해
케일 경을 만나러 간 도현을 숲에서 기다리던 짐브리오는 달빛이 비치는 공터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리타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집중해서 하는 거야?”
“흑마법진 만들고 있어.”
“흑마법진?”
“응.”
“어떤 효과가 있는 건데?”
짐브리오는 리타의 어깨 너머로 엉성해 보이는 마법진을 힐끔 쳐다봤다. 선을 몇 개 긋고 몇몇 위치에 죽은 나뭇가지를 배치한 것뿐이다.
그걸 하는데 머리를 감싸며 끙끙대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흑마력을 빨리 모을 수 있게 도와주는 마법진.”
“그런 게 있어?”
“응. 흑마력을 상승시키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제일 어려운 거야. 자신의 흑마력과 상성이 맞는 마법진을 혼자서 창조해 내야 하는 거거든. 그동안 축적해 온 흑마법의 지식과 깨달음이 모자라면 완성시킬 수 없는 거야.”
“지금은 되고?”
“노력하고 있어. 원래 도현을 만나기 전에는 마법진을 반도 완성 못 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됐거든.”
“어째서? 도현은 마법사도 아닌데, 그 녀석이 도움을 줬냐?”
리타는 나뭇가지 하나를 조심스럽게 서쪽 방향에 놓으며 대꾸했다.
“응. 도현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서 눈을 감고 나 자신에 대한 탐구를 깊게 했더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거야.”
짐브리오는 어제오늘 도현 옆에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던 리타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뭔가 큰 발전을 이룬 것 같았다.
“흑마력을 높여서 얼음탑 녀석들을 혼내 줄 거야. 특히 드비오와 카샨. 강화된 비골 맛을 보여 줘야지.”
말을 마친 그녀는 하나 남은 나뭇가지를 중앙에 천천히 놓았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뭇가지가 중앙에 놓인 순간, 엉성해 보이는 마법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됐다!”
리타의 얼굴에 기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뭐야, 완성된 거야?”
짐브리오가 눈을 크게 뜨며 마법진을 응시했다.
리타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몸을 감싼 빛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마법진 형태를 이루며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러고는 한순간에 그녀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숲 공터는 다시 어두워졌다.
“끝난 거야?”
왠지 싱거워 보여서 짐브리오가 물었다.
“응. 이젠 이런 거 없어도 돼. 내 몸속에 마법진이 새겨졌으니까.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흑마력이 증가할 거야.”
그녀는 바닥의 선과 나뭇가지를 발로 지우고 치워 버렸다.
그때 도현이 공터에 나타났다. 갑작스레 나타난 밝은 빛이 짐브리오와 리타가 기다리고 있는 방향에서 보이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도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리타가 요상한 흑마법진을 완성했단다.”
“흑마법진?”
도현이 쳐다보자 리타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뿌듯한 표정으로 조금 전 짐브리오에게 설명한 이야기를 다시 해 주었다.
“축하해. 흑마력이 늘지 않는다면서 고민했잖아.”
“고마워. 도현이 수련하는 방식이 도움이 됐어.”
도현은 어제 자신 옆에 앉아 허리를 두드리며 명상을 하던 리타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흑마법사로서 탁월한 자질을 가진 게 분명했다.
“갔던 일은?”
짐브리오가 한발 나서며 물었다. 도현은 품 안에서 계약서가 담긴 통을 꺼내 내밀었다.
“브링틱의 원로들과는 잘 안 됐다고 합니다. 제가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어디 보자, 흠, 우리가 원하는 대로 계약이 됐군.”
계약서를 다시 통 안에 넣은 그는 도현에게 돌려줬다.
“언제 시작할 거냐?”
“오늘 밤부터 움직일 겁니다.”
“케일 경에게는 네가 어떻게 싸울 건지 설명해 줬어?”
“아니요. 내일 아침이면 소식을 듣게 되겠죠.”
그동안 도현과 짐브리오는 연합 세력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 왔다.
여러 얘기가 오갔지만 결국엔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지 않으면 연합 세력은 와해되지 않을 거라는 데 결론을 내렸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 힘은 무자비하고 두려울수록 효과가 크다.
도현은 어깨가 무거웠지만 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 실제로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움직이는 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짐브리오, 계약서는 아무래도 저한테 없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전한 곳에 숨겨 두세요.”
오늘 밤 긴 싸움을 시작하면 온몸에 피를 뒤집어쓸 것 같았다. 통 안에까지 피가 들어갈 리는 없겠지만, 계약서를 품고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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