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디 임팩트 11권 22화
“몸 사리면서 해라. 고대 왕궁이 아무리 중요해도 동료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하고 싶지 않으니까.”
도현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짐브리오는 진지한 표정 속에 걱정을 담아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리타, 다녀올게.”
“같이 가.”
“다음에.”
도현은 어둠에 잠긴 고대 도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뤼호른 가문을 제외한 연합 세력은 모두 열세 개의 영주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기 천여 명 가까운 군사와 용병을 파견해 그동안 연합군을 이뤄 싸웠다.
연합군은 베일 가문과 싸우다가도 때가 되면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간다.
잠을 자고 배를 채우고 무기와 방어구를 손보는 것은 각 진영에서 알아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현은 지도를 펼쳤다.
연합 세력은 각기 방벽을 갖춘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 위치가 넓은 고대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베일 가문의 땅과 가까운 곳은 몇 되지 않았다.
‘이곳 먼저 친다.’
지도를 품 안에 넣은 도현은 고대 도시 남동쪽에 위치한 보콜라차 영주의 땅을 향해 달려갔다.
나무 방벽 위에 드문드문 경비병들이 보였지만, 잡담을 하거나 길게 하품을 하는 등 경계는 소홀했다.
쿵.
방벽 한쪽이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그 진동에 놀란 방벽 위의 병사들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부서진 방벽 하단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왜 갑자기 방벽이 부서진 거지?”
“글쎄. 근처에 몬스터가 나왔나?”
그들의 시선이 방벽 외부에 쏠렸을 때, 방벽을 부순 도현은 유유히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방벽이 부서지는 큰 소리를 들은 순찰병들이 횃불을 들고 달려오다 그런 도현과 마주쳤다.
“누구냐!”
“베일 가문에서 왔다.”
도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벽 위에서 화살이 여러 발 날아왔다.
외부를 살피던 방벽 위 병사들이 내부로 들어온 도현을 뒤늦게 발견하고 화살을 쏜 것이다.
검으로 화살을 쳐 낸 도현은 무기를 꺼내 들고 덤벼드는 순찰병들 사이를 지그재그로 통과하며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으로 핏물이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사아악. 스슥.
“크아악.”
“허윽.”
도끼와 검을 든 순찰병 여섯 명이 비명을 지르며 픽픽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병사들 사이를 통과한 도현은 묵묵히 건물들이 밀집한 중심부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서야 적이 침입했다는 고함 소리와 신호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삽시간에 병사들과 용병들이 모여들었다.
“잡아라!”
열 명이 서른 명이 되고 서른 명이 백여 명이 됐다. 도현은 급하게 걷지 않았다. 적들이 모일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그리고 앞길을 막는 적들을 향해 말없이 검만 휘둘렀다.
혼자 쳐들어온 도현을 우습게 보고 겹겹이 포위를 한 병사들은 그들의 차례까지 오지 않겠지 예상했다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도현의 검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다.
도현의 검은 정직했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베어 냈고, 옆과 뒤에서 공격하는 자도 베어 냈다.
날뛰다 죽는 자도 있었고, 대부분은 움직이지 않으면 목숨을 보존할 만한 검상을 입은 채 바닥을 뒹굴었다.
도현이 지나간 자리에 누워 있는 병사와 용병의 수는 순식간에 이백여 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이놈!”
마법사 한 명이 화로에 있는 불길을 이용해 불의 형상을 한 독수리를 만들었다.
보콜라차 진영의 유일하고도 솜씨는 있는 화염 마법사였다.
불의 독수리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밤의 공기를 달궜다.
도현의 머리 위를 한 바퀴 선회한 녀석이 도현을 향해 빠르게 하강했다.
병사들을 밀어내며 묵묵히 전진하는 도현의 왼손에서 장풍이 날아갔다.
퍼엉 소리와 함께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새는 허공에서 허무하게 소멸해 버렸다.
깜짝 놀란 마법사의 옆구리에 도현이 집어 던진 어느 병사의 검이 꽂혔다.
퍼억.
건물 벽에 검과 함께 꽂힌 마법사는 신음을 흘리며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검이 벽에 너무 힘 있게 박혀 뽑히지가 않았다.
“방패로 막아라!”
길게 늘어선 방패 벽 뒤에서 도현을 향해 화살이 빗발쳤다.
도현은 검을 회전시켰다. 빗방울도 막아 버리는 그물 같은 그의 검막에 화살들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검도, 화살도, 마법도 한밤의 침입자인 도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거운 갑옷으로 중무장한 보콜라차 진영의 정예 병사 백여 명이 등장해 검을 들고 용감히 도현을 향해 돌진해 왔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저들의 기세는 산이라도 쪼갤 듯 힘차고 용맹했다.
도현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꽂았다.
눈부신 황금 검이 나타나 정예 병사들 무리를 휩쓸어 버렸다.
공중으로 튕겨 올라간 자들이 쿵쿵 소리를 내며 땅으로 추락을 하고, 주변에 있는 목조건물로 튕겨 나간 자들은 집을 부수며 처박혔다.
단단한 갑옷으로 보호를 하고 있어도 중상을 면키는 어려울 모습이었다.
도현은 바닥에 꽂았던 검을 뽑아 아직 땅 위에 서 있는 정예 병사들을 쓰러트리며 다시 전진을 했다.
방패 벽도 도현이 검으로 내려칠 때마다 방패가 금이 가며 부서졌기 때문에 그의 앞길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과 용병들은 용감하게 도현을 맞아 싸우고는 있지만 차츰 도현이 넘을 수 없는 거인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눈에 서서히 공포와 절망감이 쌓일 때쯤 도현이 걸음을 멈췄다.
“거기 당신이 이곳 책임자인가.”
멀지 않은 목조건물 3층에서 내려다보던 노인을 도현이 검 끝으로 가리켰다.
그의 주변엔 중년의 검사들 몇이 호위처럼 서 있었다.
“대체 넌 누구냐!”
싸움을 지켜보던 노인은 분노 어린 눈빛으로 도현을 노려봤다.
“베일 가문에서 왔소.”
“베일 가문?”
보콜라차 진영의 책임자인 노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 인물이 베일 가문에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있었다면 벌써 싸움에 개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베일 가문에서 나왔다는데 달리 할 말은 없었다.
“내가 찾아온 용건을 말하겠소. 베일 가문에 대한 적대 행위를 멈추고 연합에서 떠나겠다고 약속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오늘 밤 당신은 물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내 손이 독하다고 땅속에서 원망할 것이오.”
“너 혼자 우리 모두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직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천여 명 가까이 됐다.
“남은 자들이 저기 누워 있는 정예 병사들보다는 약해 보이는데, 내가 못할 것 같소?”
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싸움 초기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도현이 얼마나 쉽게 병사들을 상대하고 마법사까지 물리쳤는지 모두 본 것이다.
마치 보란 듯이 천천히 다가오며 힘을 과시한 것이다. 평생 살아오며 저렇게 강한 사내는 처음 목격해서 가슴이 뛸 정도였다. 표정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손에 사정을 두었지만, 당신의 말 한마디에 따라 오늘 나는 악마가 될 수도 있소. 이제부터는 부상이 아닌 죽음에 초점을 둘 테니까.”
도현은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목소리였다. 그래서 노인은 몸을 숙여 귀를 기울여야 할 정도였다.
도현의 주변을 가득 메운 병사들과 용병들은 은연중 3층에 있는 노인을 올려다봤다.
‘틀렸군.’
노인은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목숨을 걸고 싸워도 저 강한 사내를 이길까 말까 한데, 다들 두려워하고 있었다.
며칠만 있으면 베일 가문의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며 연합 세력의 수장들과 낮에 모여 껄껄댔는데 아주 우습게 되어 버렸다.
“좋다! 우린 연합에서 빠지겠다!”
도현은 검을 몇 번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날린 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 말을 어기면 당신을 제일 먼저 죽이겠소.”
도현은 들어올 때처럼 구멍 난 방벽을 통해 걸어 나갔다.
이날 밤, 도현은 모두 세 곳을 방문해 연합에서 탈퇴하겠다는 각 진영의 약속을 받아 냈다.
고대 왕궁이 탐났지만 당장 눈앞에 사신이 찾아와 다 죽이겠다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도현이 보여 준 이날 밤의 무위는 놀랄 만한 것이었고, 단숨에 그는 고대 도시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로 소문이 났다.
매일 공격을 하던 연합 세력의 공세가 오늘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처럼 베일 가문의 병사들과 용병들은 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도현이 베일 가문의 지휘소로 들어갔다.
케일 경과 반돌로, 세 명의 용병단장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도현이 하루 사이에 큰일을 벌여 연합 세력이 주춤했기 때문이다.
오늘 공세가 없었던 이유도 남은 연합 세력이 큰 충격을 받아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결과였다.
도현은 안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뒤, 긴 탁자 앞에 늘어선 의자 중 하나를 차지했다.
“피곤하시지 않소?”
용병단장 중 한 명이 도현을 호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피곤하겠지. 밤새 세 군데나 돌아다니면서 적들을 혼내 줬는데 말이야, 하하하.”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놈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세 명의 용병단장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도현의 칭찬에 열을 올렸다.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싸움이 이제는 그로 인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도현은 담담히 대꾸했다.
“충분히 쉬어서 괜찮습니다.”
용병단장들과는 어제 계약을 한 직후 소개를 받았기 때문에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불만 가득한 시선이었는데, 오늘은 그를 높이 평가하기 바빴다.
용병단장들의 떠들썩한 칭찬이 잠잠해지자 케일 경이 도현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숙소는 괜찮던가?”
“네.”
도현은 베일 가문의 진영에 임시로 머물 장소를 제공받았다.
“밖에서 소문을 모아 온 자들 말로는 자네가 아주 묵직하게 일을 처리했다더군. 그것이 남은 연합 세력을 혼란에 빠트린 것 같아.”
한순간에 세 곳이 떨어져 나가자 남은 연합 세력은 불안해했다. 베일 가문과의 싸움에서 이겨도 도현이 찾아와 자신들의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이 확산된 것이다.
몇몇 연합 세력의 수장들은 피해를 당한 진영을 방문해 직접 이야기를 듣기까지 했다고 하니, 도현이 만든 파문이 크긴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말을 아끼며 도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돌로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도 저들을 찾아갈 건가?”
대답을 듣기 위해 용병단장들도 일제히 도현을 주시했다. 케일 경이 따라 준 술을 조금 마신 도현은 천천히 대답을 했다.
“어제 일이 효과가 있었다면 계속해야겠지요. 오늘도 몇 군데 방문할까 합니다.”
“그들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옆에 앉아 있던 케일 경이 넌지시 충고하듯 말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정예들을 뽑아 저 사람과 같이 움직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강해도 함정에 빠지면 혼자서는 헤어 나올 수가 없는 법 아닙니까?”
용병단장의 말에 다른 두 용병단장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지원이 필요하면 말하게. 수십 명 정도 추려서 자네에게 붙여 주지.”
케일 경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혼자 가는 게 효과가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도현은 몇 마디 그들과 더 대화를 나눈 후 조용히 지휘소를 나섰다.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지자, 도현은 다시 연합 세력을 방문하기 위해 움직였다.
온몸에 피를 묻히며 두 곳을 연합 세력으로부터 분리시킨 도현은 새벽 늦게 세 번째 장소를 방문했다.
두 번째 방문한 곳에서 생각보다 피를 많이 봤다. 책임자가 워낙 강성인 인물이라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도현은 다소 무거운 얼굴로 세 번째 방문지를 응시했다.
‘적당히 물러났으면 좋겠는데.’
콰앙.
도현은 자신의 바람을 담아 다른 곳보다 더욱 강한 힘으로 방벽을 부수고 진입했다.
병사들이 깜짝 놀랐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신호만 전달할 뿐 도현을 향해 적대 행위는 하지 않았다.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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