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73화 (273/575)

[273] 디 임팩트 11권 23화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책임자가 있을 법한 장소의 건물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갔다.

저만치서 병사들을 대동한 거만한 인상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는 피에 절은 도현의 모습에 흠칫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오. 당신이 그 유명한 방벽 파괴자요?”

방벽 파괴자.

하루 사이에 누가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른다. 아마도 방벽을 부수며 들어가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도 인간 도살자보다는 낫네.’

다크캐슬에서 얻은 악명을 잠시 떠올리던 도현은 중년인을 봤다. 싸울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곳은 다른 곳과 사뭇 다르군요. 병사들이 그냥 지켜만 보다니 말입니다.”

“굳이 아까운 병사들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이곳 책임자입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내가 제시할 제안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고 있겠군요.”

중년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헛기침을 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아래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공개적으로 얘기할 것까지 있겠소?”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 같았다.

도현은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함정일까 주의를 했지만 별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발굴지 안에 지어진 목조건물은 나름 신경을 썼는지 제법 안이 넓고 편안했다.

접객실처럼 꾸며진 곳에서 도현은 그와 대화를 나눴다.

“연합 세력에서 나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자리에서 끝을 보시겠습니까?”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말씀해 보십시오.”

“당신이 베일 가문이 고용한 용병이라는 소식을 들었소.”

“그래서요?”

“대체 얼마나 받고 일을 하는 겁니까?”

도현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인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건 왜 묻습니까?”

“이런 말 한다고 해서 바로 칼을 뽑아 날 죽일 생각은 하지 말고 일단 들어 보시오. 베일 가문이 거액을 약속한 것 같은데, 우리는 무조건 그보다 많은 것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우리라면 누구를 말하는지?”

“뤼호른 가문과 몇몇 연합 세력입니다.”

간사한 웃음이 중년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껏 도현이 거쳐 온 다섯 곳의 세력 책임자들과 비교하면 사람됨이 한참 모자라 보였다.

“내가 돈 때문에 움직이는 것 같습니까?”

“용병이 그게 아니면 뭐 때문에 움직인다는 겁니까? 혹시 땅이나 다른 이권을 보장해 줬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베일 가문보다 월등히 많은 것을 지불할 수 있으니까요.”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를 보니 그를 회유할 목적으로 싸움을 벌이지 않고 접근한 것 같았다.

“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제 당신 얘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죠. 연합에서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여기 이 방에 영원히 남겠습니까?”

“음.”

중년인의 눈빛이 여러 차례 변화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병이 놓인 벽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그는 술병을 잡는 척하며 벽면에 삐져나온 기다란 장치를 발로 밟았다.

도현이 서 있던 바닥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의자와 함께 도현도 지하로 빨려 들어갔다.

밑은 굉장히 깊은 구덩이로 독사와 전갈이 가득했다.

“이 멍청한 녀석아! 여기가 네놈 무덤이다! 크하하하!”

중년인이 웃을 때,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여기에 기름을 붙고 불을 붙여라!”

건물이 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된다.

“힘으로 안 되면 머리를 써야지.”

흡족한 표정을 한 중년인은 병사들을 뒤로하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밖엔 수백 명의 중무장한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도현이 중년인과 안으로 들어간 사이 은밀히 모인 병력이다.

“해산시키도록 해.”

“예!”

중년인의 지시를 받은 부대장이 지시를 내리려 할 때였다.

목조건물의 벽이 폭발하듯 터지며 안에서 누군가 뛰쳐나왔다.

독사와 전갈이 있는 깊은 구덩이를 빠져나온 도현이었다.

스르릉.

검을 뽑은 도현의 차가운 눈빛이 중년인의 눈동자에 박혔다.

다른 연합 세력의 수장과 달리 중년인은 싸움을 전혀 할 줄 몰랐다. 그저 머리 회전이 빠르고 계산에 능한 인물일 뿐이다.

영주의 신임이 없었다면 이곳에 파견되어 책임자가 되지도 못할 위인이었다.

“마, 막아라!”

뒷걸음질 치며 병사들 사이에 숨은 그는 병사들 어깨 너머로 도현이 싸우는 모습을 훔쳐봤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구, 궁수들은 뭐 하느냐! 어서 놈을 쏴라!”

티티틱틱. 티티틱.

도현은 표정 변화 없이 화살 비를 검으로 막으며 도망가는 중년인을 쫓아갔다. 병사들이 막고 있지만 도현은 묵묵히 병사들을 베며 끈질기게 중년인을 쫓아갔다.

간신히 말에 올라탄 중년인이 도현을 막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방벽 밖으로 도주하려고 했다.

“저자를 대신할 자가 이곳에 있나?”

도현이 병사를 지휘하던 자를 붙잡아 물었다.

“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내게 데려오시오.”

도현은 지휘관의 멱살을 놓아준 뒤, 검을 집어 던졌다.

쾌속하게 날아간 검은, 말을 탄 중년인을 계속 쫓아갔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도 검은 중년인을 놓치지 않았다.

“안 돼! 오지 마!”

뒤들 돌아보며 소리를 치던 중년인의 등과 가슴을 번개처럼 베어 버린 검이 길게 선회해서 도현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책임자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베일 가문과 싸울 이유가 없었소. 영주님의 지시도 없었고, 그저 이자가 공명심에 눈이 멀어서 멋대로 행동한 것이지. 이대로 돌아가 주면 연합 세력에서 우리는 당장 빠지겠소.”

도현은 노인의 약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에도 똑같은 경고를 했으니, 당신에게도 말을 하겠습니다. 약속을 어기면 그때는 다시 돌아와 제일 먼저 당신을 찾을 겁니다.”

동이 틀 무렵 도현은 베일 가문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준비해 놓은 물로 몸에 묻은 피를 제거했지만 혈향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는 침대에 잠시 걸터앉아 있다가 뒤로 몸을 뉘었다.

오늘까지 모두 여섯 곳. 이제 남은 곳은 뤼호른 가문과 일곱 곳의 연합 세력뿐이다.

베일 가문 진영에는 병사들의 무기를 손봐 주는 대장간이 존재했다. 햇빛이 따사로운 오후, 도현은 검을 들고 그곳을 찾아갔다.

지난 이틀 사이 검을 무리하게 사용해서 날이 무뎌지고 검신에 금이 갔다.

“검으로 돌이라도 내리쳤소? 검날이 왜 이렇게 많이 상한 거요?”

대장간을 책임지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가 도현의 두 자루 검을 이리저리 살피며 혀를 찼다.

“연합 녀석들과 싸우려면 병장기를 소중히 해야지. 이렇게 날이 상하도록 그냥 방치하다니. 진작 찾아와서 손을 봤어야지. 이쪽 검은 손을 봐도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렵겠네. 검신이 크게 손상됐어.”

도현을 답답하고 생각 없는 용병쯤으로 치부한 사내의 잔소리는 길게 이어졌다. 베일 가문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대장간은 무료로 병사와 용병 들의 무기들을 수리해 준다.

도현은 대장간 사람이 뭐라고 하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가 나쁜 뜻에서 핀잔하듯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날을 손보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조금 있다 오시오. 얼마 안 걸리니까. 하지만 이쪽 검은 이미 생명이 다했소.”

두 자루 중 하나는 버려야 했다.

“이와 비슷한 외날 검이 있습니까?”

“외날 검은 흔치 않은데. 저쪽에서 골라 보시오. 아마 찾아보면 몇 자루는 있을 게요.”

도현은 구슬땀을 흘리며 모루 위에 놓인 검을 치는 젊은 대장장이들 사이를 통과해 벽면 한쪽에 쌓인 수백 자루의 무기 앞에 섰다.

전쟁 중 사망한 아군의 무기나 적의 무기를 수거해 놓은 것 중 일부인 것 같았다.

‘이게 괜찮겠군.’

무기들을 뒤적여 외날 검 몇 자루를 찾아낸 도현은 그중 하나를 이리저리 휘둘러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게도 적절했고, 손에 어색하게 겉돌지 않았다.

검술과 내공이 높은 경지에 올랐지만 사용하는 검이 자신의 손에 잘 맞아야 된다는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기본이다.

“얼마입니까?”

도현의 물음에 대장간 사내가 화로의 불꽃을 보며 고갯짓을 했다.

“그냥 가지고 가시오. 용병들에게는 수리만 공짜고 물건을 팔 땐 약간의 돈을 받아야 되는데,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 그냥 주는 거요.”

도현은 잠시 대장간 사내를 바라보다가 새 검을 허리에 찼다. 그냥 주겠다는데 굳이 억지로 돈을 줄 이유는 없었다. 호의를 베푼 대장간 사내가 불쾌해할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죠. 근데 어떤 기분 좋은 일이 있기에 돈까지 안 받는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연합 놈들을 깨부수는 용병 때문이지. 오늘도 소문을 들었는데, 그제에 이어서 어젯밤에도 녀석들을 홀로 찾아가서 항복을 받아 냈다더군. 그러니 기쁘지 않을 수 있나.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군.”

도현은 뜻밖에 자신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살짝 놀랐다.

그는 주변의 다른 대장장이들을 둘러봤다. 얼굴이 밝고 망치질을 하는 손길은 경쾌하고 힘이 넘쳤다.

싸움에서 패해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일을 하던 그들은 연합 세력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간다는 소식을 들으며 크게 고무된 상태였다.

“당신은 기쁘지 않소?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대장간 사내의 물음에 도현은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기쁩니다. 저는 조금 있다 검을 찾으러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시오.”

대장간을 벗어나 숙소로 향하던 도현은 길 위에서 케일 경이 보낸 병사와 마주쳤다.

도현이 연합 세력을 부수고 다니는 무서운 용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병사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케일 경께서 찾으십니다.”

케일 경은 방벽 위에서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케일 경은 방벽 난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매일 화살이 오가는 전쟁을 벌이다 어제와 오늘 평화로운 날을 맞이하니까 어딘지 좀 이상해.”

“그렇습니까.”

도현은 바람을 맞으며 케일 경의 옆에 섰다. 아래는 드문드문 지나는 사람만 있을 뿐, 싸움을 걸러 온 연합 세력은 보이지 않았다.

“몸은 괜찮은가?”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의 큰 부상은 입지 않았습니다.”

도현은 자잘한 상처가 제법 있었다. 약을 바르고 천으로 감쌌다.

“수고했네. 어제도 큰일을 해냈어. 싸움이 아주 치열했던 곳도 있었다고 들었네.”

“말이 통하지 않더군요. 손을 좀 많이 썼습니다.”

“연합 세력의 수장을 죽이기도 했고.”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함정을 사용하다 그의 손에 당한 중년인을 떠올리며 도현이 답했다.

“반돌로가 오늘 내게 넌지시 자네 문제를 거론하더군. 자네를 통제할 수 있을지 걱정인 모양이야. 생각보다 자네의 힘이 너무 강해 보이거든.”

“계약만 이행된다면 전 베일 가문의 편에 계속 남아 있을 겁니다.”

“나는 믿지만 반돌로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반돌로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겠지?”

“사실 그런 걱정은 제가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필요할 때 이용하고 필요 없어지면 제거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농담도 잘하는군.”

“반돌로 경께는 잘 전해 주십시오.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 제 걱정도 전해 주십시오.”

방벽 밖을 응시하던 케일 경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방향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아나?”

도현은 맞은편 방벽 너머 먼 공간까지 시선을 두었다. 막연했지만 짚이는 게 있었다.

“뤼호른.”

“맞아. 우리와는 오랫동안 앙숙 관계인 뤼호른이 저곳에 있지. 연합 세력을 모아 우리를 공격한 주범이기도 하고.”

케일 경의 말투에 한기가 묻어났다.

“종종 여기에 서서 저 방향을 바라보며 신께 기도를 했다네. 제발 내 검을 뤼호른의 진영에 가서 휘두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이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망 없어 보이더군. 그때 자네가 나타났어. 꺼져 가던 내 바람을 되살려 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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