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디 임팩트 11권 24화
죽도록 얻어맞으면서도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권투 선수처럼 케일 경은 그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오전과 낮 사이에 연합 세력을 이루는 다섯 곳에서 은밀히 사람이 찾아왔네. 자네가 방문하지 않은 곳들이지.”
“혹시…….”
“연합 세력에서 나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어. 자네의 영향력으로 이틀 사이에 연합 세력의 반 가까이 떨어져 나가자, 그 위기감이 상당했던 것 같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그럼 남은 곳은 뤼호른과 두 곳뿐이군요. 두 곳은 어디입니까?”
“벨피타와 콘로도 영주의 진영인데, 밤이 되기 전에 그들도 우리를 찾아와 연합에서 떠나겠다는 약속을 할 거라고 예상이 되네. 사실 찾아오지 않아도 돼. 그들은 초반부터 싸움에 임해서 병력 손실도 다른 곳보다 심하거든. 놈들이 다 모여도 단련된 우리 병사들에게는 어림도 없으니까. 실질적으로 남은 건 뤼호른밖에 없는 것이지.”
케일 경은 뤼호른 가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뤼호른 가문을 기습할 생각이네. 그동안 당하고만 있던 우리 병사들이 아주 좋아할 거야.”
준비
뤼호른 진영의 건물과 방벽이 타올랐다. 싸우다 목이 베이고 심장이 뚫린 뤼호른 가문의 병사들은 시신이 되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부상당해 꿈틀거리는 자들은 베일 가문의 병사들이 찾아내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했다.
깊은 밤 시작된 공격은 서서히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로잡힌 뤼호른 가문의 고위 관리들과 그들을 지원하던 용병대장들은 줄에 묶여 바닥에 무릎이 꿇렸다.
그들 앞에는 반돌로와 케일 경, 용병단장 그리고 도현이 서 있었다.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서 있던 반돌로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할 말이 있느냐?”
“어서 죽이기나 해라!”
뤼호른 가문의 책임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케일 경과 싸우다 다리와 팔에 부상을 입고 사로잡혔다.
“편안한 죽음은 너희들에게 사치다. 그만큼 이번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입은 피해가 막심하니까.”
반돌로가 손짓을 하자 미리 준비한 펄펄 끓는 기름이 등장했다.
“순서는 왼쪽부터. 시작해.”
“일어나!”
뒤에 늘어서 있던 건장한 병사들 네 명이 달려들어 몸부림치는 포로의 얼굴을 기름통에 강제로 숙이게 만들었다.
끓는 기름에 얼굴이 타며 죽어 가는 포로의 모습은 보기에도 끔찍했다.
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나설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십여 명 가까운 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 갔고, 마지막 남은 자는 오른쪽 끝에 있는 뤼호른 가문의 책임자였다.
반돌로는 일부러 그에게 시각적인 고통을 주기 위해 순서를 그렇게 정한 것이다.
그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혀를 깨물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듣고 가라. 고대 도시에 있는 너희 재산과 모든 땅은 우리가 몰수한다.”
반돌로가 손짓을 하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이번 전쟁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자의 얼굴을 기름통에 쑤셔 넣었다.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던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고대 도시에 있는 뤼호른 가문의 진영이 잿더미가 되면서 근 한 달여를 끌었던 전쟁도 마침내 끝이 났다.
베일 가문의 진영은 축제 분위기였다.
오후부터 시작된 술과 춤은 밤늦도록 계속 이어졌고, 용병 시장에서 들어온 많은 술집 여자들이 흥겨운 음악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거친 사내들 사이를 누볐다.
많은 수하들을 잃은 용병단장들도 살아남은 부하들과 어깨춤을 추며 술을 입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방벽 위에서 경계를 서는 운 없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승리의 축제가 며칠은 갈 것이기 때문에 당장 오늘 밤 같이 즐기지 못해도 큰 불만은 없었다.
한쪽에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손에 든 술잔을 비우고는 천천히 지휘소로 향했다.
반돌로와 케일 경은 회의 탁자에 잘 차려진 음식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서 오게. 어디 갔었나? 숙소에는 안 보이던데.”
케일 경이 옆에 앉은 도현에게 술을 따라 주며 기분 좋게 물었다.
“고대 왕궁이 있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그랬나? 술이 다 깨는군. 숨 좀 돌리세. 이제 막 전쟁이 끝났어.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고.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발굴에 들어가겠나. 그들이 다 일꾼으로 투입돼야 하는데 말이야.”
케일 경이 웃는 낯으로 좋게 말했다.
“며칠간 축제를 벌이며 지친 병사들과 용병들의 심신을 달래 주고, 또 한동안은 부서진 방벽과 불탄 건물 등을 보수해야 한다네. 최소한 그 정도는 해 놓고 안전하게 발굴을 해야 하지 않겠나?”
발굴을 서두르려고 하는 도현도 그 정도는 감안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발굴을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도현은 반돌로를 보며 물었다. 케일 경이 힘이 있어도 결국엔 반돌로가 발굴 일정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계약 맺은 대로 바로 하고 싶어도 조금 전 케일 경께서 설명하셨듯이 우리는 정비 시간이 필요하네. 그러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인정합니다. 그걸 포함해서요.”
“보름 정도 후에 발굴을 시작하세.”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을 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보름 후부터 발굴을 하는 걸로요.”
“내가 생각해도 그 정도 시기가 적절해.”
도현과 반돌로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케일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대신 발굴지에 일꾼용 몬스터를 투입시켜 주십시오.”
“몬스터를?”
반돌로와 케일 경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거의 동시에 도현을 응시했다.
“이유는?”
“발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섭니다. 고대 왕궁의 대부분 건축물들이 석재로 되어 있을 텐데 그 모든 게 부서져 매몰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고대 도시의 규모로 볼 때 고대 왕궁의 규모도 상당했을 게 아닙니까. 여기 있는 병력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꾼으로 투입될지는 모르겠지만, 땅을 파고 들어가 거대한 석재들과 마주쳤을 때 그 처리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도르래를 이용해 깊은 땅속에서 그걸 끄집어내 지상으로 올리는 것도 위험하고 힘든 작업이고요. 몬스터를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있을 겁니다.”
도현의 긴 설명에도 반돌로는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다 그렇게 해 왔네.”
“일꾼용 몬스터를 이용하면 작업 시간이 몇 배나 줄어들 겁니다. 그것이 제가 원하는 것이고요.”
“몬스터는 위험해. 발굴지에서 병사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가 있어.”
“브링틱인들은 아무 위험 없이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현은 브링틱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일꾼용 몬스터를 왜 고대 도시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세력들이 발굴지에 투입하지 않는지 보면서 답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첫 번째가 바로 거부감일 것이다. 그러나 그 거부감만 없앤다면 아주 유용한 녀석들이었다.
도현은 알레빙스 산맥을 넘어 브링틱 성으로 들어오기까지 다양한 일꾼용 몬스터들을 목격했다. 그들은 브링틱인들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반돌로 경, 발굴이 늦어져서 좋을 게 없습니다. 경께서는 고대 왕궁을 무사히 발굴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여태까지 적들과 힘들게 싸운 것이고요.”
“음, 그래도 몬스터라니. 몬스터와 같이 일을 하면 브링틱인들처럼 야만인으로 취급당할 수가 있네.”
“밖에서 뭐란들 신경 쓸 이유가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필요하면 하는 게 맞는 거지요. 고대 왕궁에 대한 권리가 있는 제 의견을 존중해 주십시오.”
도현은 혼자서 연합 세력을 붕괴시킨 인물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고대 도시에서는 이미 그에게 걸리면 그날로 끝이라는 식의 소문이 퍼졌다.
“자네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네.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는 거지.”
한발 물러난 반돌로는 말없이 술만 들이켜는 케일 경을 봤다.
“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꾼용 몬스터를 우리가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까?”
“주위에 쓸 만하게 있으면 가져다 쓰는 게 좋지.”
그는 도현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연합 세력이 와해되고 뤼호른 가문도 고대 도시에서 축출됐지만 뱃길이 열리면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 아니오. 고대 왕궁 발굴에 속도를 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케일 경은 도현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동안 묵묵히 술을 마시며 깊은 생각에 잠겼던 반돌로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도현을 바라봤다.
“일꾼용 몬스터를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외지인들이 일꾼용 몬스터를 거래하는 건 브링틱에서 금지된 사항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구할 수도 없지 않나?”
“일꾼용 몬스터를 소유한 사람들을 고용하면 됩니다. 그건 아무런 제약 조건이 없으니까요.”
도현은 어베인과 로나를 만나러 톨리핀의 집이 있는 산속에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일꾼용 몬스터와 관련된 얘기를 어베인과 한동안 나눴었다.
그때 동석했던 톨리핀이 일꾼용 몬스터에 관해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어서 기본적인 사항은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다.
“난 솔직히 몬스터를 곁에 두고 일을 시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몬스터는 몬스터일 뿐이니까. 하지만 케일 경의 말도 일리가 있고, 자네가 강력히 요구하니 모른 척할 수가 없군. 일꾼용 몬스터를 투입하세.”
“비골보다 센 녀석도 있나?”
짐브리오가 침대에 누워 발을 까닥거리며 물었다. 바닥에서 뒹굴거리며 육포를 먹던 리타가 답했다.
“응, 있어. 하지만 걔는 너무 위험해서 함부로 소환하면 안 돼. 아직 소환할 능력도 안 되지만.”
“그런 애를 뽑아야지. 우리끼리 있을 때 얼음탑 마법사 녀석들이 떼거리로 덤비면 어떡하냐.”
“당신이 막아야지.”
“내가? 흥, 너 놔두고 난 도망갈 거다.”
“나도 도망가지 뭐.”
육포를 씹던 리타는 집 천장에 있는 거미를 발견하고는 주문을 빠르게 외우고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나간 검은 기운이 거미에 적중하자 거미가 갑자기 커다랗게 변해서 침대에 누워 있던 짐브리오의 배 위에 털썩 떨어졌다.
“뭐야, 이게.”
머리만큼 커진 거대한 거미가 배 위에 떡하니 나타났지만 짐브리오는 놀라는 대신 손으로 집어서 근처 바닥에 누워 뒹굴거리는 리타에게 집어 던졌다.
거미는 리타 앞에 와서 본래 크기로 줄어들었다.
“어때, 놀랐지?”
“크게 만들려면 집채만 하게 만들어야지. 그래 가지고 사람들이 놀라기나 하겠어?”
“치이.”
리타는 손에 든 육포를 다 입에 밀어 넣고 또 다른 주문을 외우려고 했다.
그때 문을 열고 도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와아, 도현이다.”
리타가 벌떡 일어나 도현에게 달려갔다.
“소식 들었어. 최고야.”
리타의 칭찬에 도현이 피식 웃으며 머리에 깊게 눌러쓴 모자를 벗었다.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
“고생했다, 도현.”
짐브리오는 도현의 등을 두드려 주며 사내답게 크게 포옹을 했다.
지난 며칠간 도현이 벌인 일은 용병 시장 술집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였다. 함께 싸우며 도움을 줄 수 없어서 마음이 불편했던 짐브리오는 고대 도시에서 벌어진 일이 용병 시장으로 흘러들어 올 때마다 긴장감을 풀지 않고 소문에 집중했었다.
“축하주 해야지?”
그들은 식탁에 둘러 앉아 술을 마셨다. 도현은 소문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연합 세력과의 자세한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발굴은 보름 정도 후에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피해 복구를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일꾼용 몬스터는?”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오, 잘됐군. 시간이 많이 절약되겠어.”
도현은 짐브리오와 사전에 발굴과 관련된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그 중심에 일꾼용 몬스터가 존재했다.
“그런데 조금 짐이 생겼습니다.”
“무슨 짐?”
“일꾼용 몬스터 지휘를 제가 맡으랍니다. 말을 꺼냈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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