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디 임팩트 12권 1화
눈동자
도현은 램프에 불을 켜고 뒤돌아섰다.
그를 따라 들어온 짐브리오와 리타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거목 속 집 안을 빠르게 훑어보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는 꼼꼼히 조사한다고 했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집의 비밀을 찾아내지 못한 걸 수도 있고요.”
숨겨진 물건이나 장소를 찾는 데 경험이 풍부한 짐브리오와 같이 온 도현은 이번엔 뭔가를 발견해 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발굴 중인 고대 도시에서 뛰쳐나온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약속이나 한 듯 모인다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맡겨 둬, 내 앞에선 어떤 것도 숨지 못하니까.”
큰 덩치에서 우러나오는 굵직한 목소리로 자신 있게 말한 짐브리오는 등에 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리타, 넌 도현과 여기서 꼼짝 말고 서 있어.”
“왜?”
램프에 밝혀진 실내를 둘러보던 리타가 짐브리오를 쳐다봤다.
“둘이 같이 하면 성가시잖아. 좁은 곳에서 부딪히고.”
“혼자 찾아내서 자랑하려고 그러는 거지?”
“집중이 필요한 일이니까.”
눈빛이 바뀐 짐브리오가 조사를 시작했다.
의자와 탁자, 화로, 식기류, 물통 등 집주인이 사용했을 만한 모든 물건들이 그의 손에서 면밀히 관찰되고 파악됐다.
“물건들의 배치를 보면 집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지.”
뒤에서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도현과 리타에게 설명하듯 말한 짐브리오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2층 침실을 조사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이번엔 바닥과 벽에 코를 대고 킁킁대기도 하고 귀를 가져다 대고 손으로 두드려 보기도 했다.
“도현, 저쪽에서 바닥을 쳐 봐.”
쿠웅.
도현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자 바닥에 내려앉아 있던 많은 먼지들이 허공으로 뿌옇게 떠올랐다.
“먼지들이 춤을 추네.”
램프의 붉은 빛에 비치는 먼지들을 보며 중얼거리던 리타가 짐브리오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못 찾겠지?”
“가만있어 봐.”
짐브리오는 허리에 찬 손도끼로 바닥을 냅다 찍었다.
깜짝 놀란 리타가 뒤로 물러났다.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이놈의 집구석 다 파헤쳐 보면 숨겨진 뭔가가 나타나겠지.”
자신만의 기술로 1층과 2층을 다 뒤져도 딱히 단서를 못 찾은 짐브리오는 도현을 보기 미안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바닥과 벽에 도끼질을 해 댔다.
‘이러다 집이 다 망가지겠어.’
도현이 조용히 나서서 짐브리오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리타가 남았잖아요.”
“리타?”
집을 부수던 짐브리오가 뒤를 돌아봤다. 리타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노려보고 있었다.
“어, 그렇지. 미안하다, 리타.”
도끼를 슬며시 내린 짐브리오가 한쪽으로 물러났다.
도현은 리타가 집을 조사하는 것을 보며 짐브리오에게 물었다.
“이 집이 고대인의 집 같기는 합니까?”
“집 안의 물건들을 보면 고대인의 집이 거의 확실해. 고대 도시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비슷한 물건들이 상당히 많이 보이니까. 그나저나 놀라워.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을 텐데 집 안은 여전히 썩지 않고 살아 있어. 이 나무의 효과인가?”
짐브리오는 종류를 알 수 없는 거목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집주인의 성격은 어떤 것 같습니까?”
물건의 배치를 보면 집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말했던 짐브리오는 턱을 매만지며 답했다.
“일단 집주인은 상당히 깔끔한 자야. 집 안의 물건들이 흐트러짐이 없었고, 움직이는 동선에 맞춰서 가재도구들이 배치되어 있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그가 왔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집주인은 혼자 생활하면서도 상당히 격식에 맞춰서 살았던 것 같아. 저기 보이는 식사 도구 보이지?”
선반 위에는 나이프와 포크, 스푼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손에 구운 고기 기름을 묻히기 싫어했을 거야. 혼자서 청승맞게 귀족처럼 식사를 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는 찻잔과 찻잎이 약간 보관된 통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고상한 척하는 귀족들처럼 맛없는 차를 즐겨 마시기도 했고.”
“이 집의 주인이 귀족이었을까요?”
“글쎄.”
짐브리오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가는 리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타가 램프를 들고 가는 바람에 1층 실내는 어두워졌다.
“고대의 귀족이 이런 외진 곳에서 나무 속에 집을 지어 놓고 살았을까 싶기도 하고.”
협곡 정상 부근은 굉장히 넓었는데, 그 안에 있는 거목들의 숲은 고대나 지금이나 지형적인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된 것 같았다.
협곡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달린 돌다리만 봐도 거쳐 온 세월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마 고대의 그 시절에도 협곡의 이 숲은 사람들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장소일 가능성이 높았다.
“미안하다. 몬스터가 이곳으로 오는 걸 보면 뭔가가 있는 게 확실한데, 못 찾겠다.”
“사과하실 일이 아니죠.”
도현은 빙그레 웃었다.
“리타도 소득이 없으면 어쩔 거냐?”
“그땐 어베인과 로나를 데리고 와야겠지요. 나중에 말입니다.”
집을 부순다고 해결될 일이라면 벌써 그렇게 했겠지만 도현은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주변에 샘이 있다고 했지?”
“예.”
“고기 좀 손질해 올게. 오늘은 이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내일 고대 도시로 돌아가자.”
집 안에는 화로를 비롯해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도구들이 다 비치되어 있었다.
“리타가 아직 안 내려왔는데요. 보고 가시죠.”
“보나 마나지 뭐.”
짐브리오는 오면서 잡은 커다란 토끼를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샘이 어느 방향이냐?”
“왼쪽 바위 뒤편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있습니다.”
“알았어.”
짐브리오가 토끼를 들고 돌아설 때였다. 침실이 있는 위층에서 리타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그녀의 목소리에 흠칫한 짐브리오는 토끼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서둘러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향했다. 도현도 한걸음에 올라갔다.
리타는 침대의 오른쪽 벽 앞에 서 있었다.
“왜 불렀어? 뭘 찾아낸 거야?”
짐브리오는 그녀가 서 있는 주변의 벽과 바닥을 빠르게 훑었다.
“여기.”
리타는 벽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짐브리오가 손으로 벽을 만지며 말했다. 이 벽은 그저 나무 벽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까 그가 몇 번이고 확인한 곳이기도 했다.
“너 장난친 거냐?”
“장난 아니거든.”
리타는 팔짱을 끼며 턱을 추켜세웠다.
“이 벽엔 마법의 장막이 펼쳐져 있어서 아무나 못 찾아.”
“마법의 장막? 그게 무슨 뜻이지?”
도현이 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있는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면서 주변의 사물과 혼동시키는 거야.”
“눈은 속여도 손의 감각은 속일 수가 없는데.”
짐브리오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리타가 가리킨 벽을 재차 두드려 봤다. 옆의 나무 벽과 차이를 느낄 수가 없었다.
“마법의 장막을 그저 그런 눈속임용 마법으로 보면 곤란해, 이 마법은 아주 강력한 고대 마법이니까. 오랜 시간이 흘러서 이 마법이 약해지지 않았다면, 지금 내 수준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웠을 거야.”
도현은 벽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법의 장막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리타, 마법의 장막을 걷어 낼 수 있겠어?”
“응, 마법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할 거야.”
“그럼 부탁할게.”
“뒤로 조금만 물러나 있어.”
벽 앞에 혼자 선 리타는 음산한 어조로 모든 마법을 해제시키는 흑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 발밑에서 뭉게구름처럼 생성된 검은 기운들이 마법의 장막이 펼쳐진 벽을 뒤덮었다.
땀을 흘리며 마법의 장막과 싸우던 리타는 천천히 벽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쥐더니 힘껏 잡아당겼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벽이 사라졌고, 그 공간에 문이 하나 나타났다.
‘저런 게 존재했군.’
흥미로운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던 도현은 리타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제법 많은 힘을 소진했는지 지쳐 보였다.
“수고했어, 리타. 네가 아니면 그대로 지나칠 뻔했어.”
“이 정도 가지고 뭘.”
작은 체구의 리타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도현에 이어 짐브리오도 그녀를 칭찬했다.
“험, 수고했다. 쓸 만한 데가 많아.”
“무시할 때는 언제고, 흥!”
“이렇게 훌륭하신 흑마법사님을 누가 감히 무시해?”
“진정성 없는 말, 사양하겠어.”
“작은 일 하나 해냈다고 아주 코가 하늘로 치솟네, 치솟아.”
“뭐라고?”
리타가 노려보자 짐브리오는 딴청을 부리며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안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으니까, 곧장 들어가지 말고 문만 열어 보자고.”
마법을 사용해 문을 가린 걸 보면, 집주인은 외부인에게 이곳을 감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안에 또 다른 마법이 그들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도현은 짐브리오의 의견을 따랐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고 아주 고요했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보지.”
문을 열어도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자 짐브리오가 바닥에 내려놓은 램프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죠.”
“어허, 나도 뭔가 역할을 해야지. 내가 안에서 죽으면 시체는 태워서 숲에 뿌려라.”
말릴 사이도 없이 짐브리오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도현과 리타도 지체 없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어두운 공간 끝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3층으로 가는 길인가 보다.”
거목 속 집은 2층이 전부가 아니라, 3층이 또 존재했다.
그들은 램프로 앞을 밝히며 얕은 나무 계단을 통해 비밀스러운 3층으로 올라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도착한 그들은 램프의 불빛에 드러난 3층의 일부 모습을 통해 이곳의 용도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서재 아냐?”
벽 한쪽을 장식하는 책장과 그 안에 꽂힌 수십여 권의 서적들. 탁자 위에는 물주전자와 컵도 보였다.
서재로 추정되는 공간을 입구에서 둘러보던 그들은 왼편 탁자 위에 놓인 또 다른 램프를 발견하고 그곳에도 불을 붙였다.
두 개의 램프가 빛을 발하자 서재의 전체 모습이 더욱 자세히 보였다.
벽의 좌우로 두 개의 책장이 존재했는데, 양피지와 두툼한 서적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서재 안쪽 끝에는 책상과 의자가 위치했다.
“짐브리오, 보셨습니까?”
“그래, 봤다.”
“뭘 봤는데?”
리타가 묻자 도현은 검을 뽑아서 책상 앞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어.”
벽을 향해 놓인 의자는 등받이가 아주 높았다. 그래서 키가 작은 리타의 시선에는 의자의 뒷모습만 보일 뿐 누가 앉아 있는 것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키가 큰 도현과 짐브리오는 누군가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서재에 살짝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도 그럴 게 마법의 장막 뒤에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봐, 얼굴 좀 보이지.”
짐브리오가 큰 소리로 말했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당신 집이면 사과하고 돌아갈 수도 있어. 우린 주변에 몬스터가 모여 궁금해서 온 것뿐이니까.”
대답이 없었다.
짐브리오가 도현을 쳐다봤다.
“의자에서 죽은 거 아냐? 숨소리도 안 들리잖아.”
“가까이 가 보죠.”
의자 좌우로 다가간 도현과 짐브리오는 거의 동시에 의자의 주인을 확인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의자의 주인은 앙상한 해골이었다.
“죽었네. 아주 깔끔하게 해골만 남았어.”
짐브리오가 혀를 찼다.
“편안하게 바닥에 누워서 죽을 일이지 왜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나.”
“기록을 남기려다 죽은 것 같습니다.”
검을 거둔 도현은 책상에 놓인 누렇게 바랜 종이를 내려다봤다. 뚜껑이 열린 채 말라 버린 잉크와 펜이 옆에서 뒹굴고 있었다.
‘빈 종이. 결국 글을 남기지 못하고 죽은 것 같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까? 이 집의 주인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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