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디 임팩트 12권 4화
짐브리오와 눈빛을 교환한 도현은 만약을 대비해 언제든 자수정을 파괴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저희는 조사할 게 있어서 당신의 집을 수색 중이었습니다.”
도현은 경계를 하면서도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무엇을 조사한단 말이냐?
“대답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책상에 펼쳐 놓은 지도의 도시는 당신이 살던 시기의 도시입니까?”
-그렇다. 내가 자란 곳이기도 하지. 후에 이곳에서 혼자 살게 됐지만 말이야.
도현은 그가 왜 거목 속에 집을 지어 놓고 사는지 궁금했지만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가기로 했다.
“그 도시는 지금 땅속 깊숙이 매몰되어 있습니다.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담은 채로요.”
-긴 세월이 흘렀군. 하긴 그 정도 시간은 지났으리라 예상했지.
“자수정 안에서도 시간을 느낄 수 있나요?”
리타가 궁금한지 물었다.
-난 한시도 시간의 흐름을 놓쳐 본 적이 없다.
“나 같으면 심심해서 미쳤을 거요. 자수정 안에서 수천 년이나 살았다니, 왜 그런 짓을 한 거요? 그냥 죽고 말지.”
짐브리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덩치만 큰 녀석아,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네가 감히 날 평가하려고 하다니. 예전이라면 그따위 말을 한 네놈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잖소? 그 안에 사는 게 즐겁소?”
-내 행동은 내가 판단한다.
자수정에서 흘러나오던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짐브리오.”
도현이 짐브리오에게 눈짓을 했다. 불필요하게 자수정 안에 있는 고대 마법사의 영혼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미안하오. 난 그저 답답해서 해 본 소리요.”
짐브리오가 슬쩍 사과를 했다. 어찌 됐든 고대인의 영혼과 마주친 지금, 잘하면 적지 않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도현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조금 전 대화를 이었다.
“최근에 당신이 살았던 도시가 발견되어서 발굴 중입니다.”
-그랬군. 그래서 조금 전에 너희들이 이 지도를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내 집을 조사하는 일이 무슨 관계가 있지?
“발굴 중에 도시에서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도현은 몬스터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허허, 그 녀석들이 아직 살아 있었나 보군.
“그 몬스터를 아십니까?”
-너는 내게 묻기만 하는구나. 내 궁금증을 먼저 풀어 주면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걸 얘기해 주지. 왜 내 집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냐?
“그 몬스터들이 발굴지를 벗어나 이 집이 있는 거목 주변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연 같지는 않고 해서 거목을 조사하다가 당신의 집을 발견한 겁니다.”
-마법의 장막이 펼쳐져 있어서 이 서재는 찾기 어려웠을 텐데?
“제가 찾았어요. 수천 년이나 지나서 마법이 약해져 있었거든요.”
눈동자는 잠시 초점을 리타에게 맞췄다가 이내 움직여 다시 도현을 주시했다.
-몬스터가 모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내 집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말이로군. 그래서 내 서재도 엉망으로 만들고.
도현은 바닥에 흩어진 책과 양피지 들을 힐긋 돌아본 후 헛기침을 했다.
“빈집인 줄 알았습니다.”
-몬스터들은 어떻게 됐나? 그 녀석들이 주변에 있었다면 통과해서 이곳으로 들어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보이는 몬스터들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네가 죽였나?
눈동자가 도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몇 마리나?
“서른 마리 정도 됩니다.”
도현의 대답에 자수정 속 눈동자가 흔들렸다.
-혼자서?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에 검을 찬 것을 보니 검사 같은데, 실력이 매우 뛰어난 자였군.
“몬스터가 모인 이유는 당신 때문입니까?”
몬스터에 대해 잘 아는 눈치인 고대 마법사에게 도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눈동자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바로 보았다. 그 녀석들은 내가 종으로 부리던 몬스터들이다.
그의 대답에 듣고 있던 모두가 놀랐다.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남아서 주인인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왔군. 몬스터지만 충성심이 뛰어나서 인간보다 나은 존재들이지.
아득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목소리가 서재에 은은히 퍼져 갔다.
“당신이 도시에 몬스터들을 보낸 겁니까?”
-그렇다.
“왜 그런 겁니까?”
-알 필요 없다.
고대 마법사의 영혼은 도현에게 딱 잘라 말했다. 단호한 그의 어투에는 다시 물어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느낌이 묻어났다.
도현이 다른 질문을 하려 할 때 짐브리오가 끼어들었다.
“거 알려 주면 안 되오?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닐 텐데. 이미 수천 년이나 지난 과거고.”
-수천 년이라…… 그래 아주 긴 시간이었지.
눈동자가 자수정 속에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고대 마법사의 영혼이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이야기해 보시오. 우리가 들어줄 테니. 수천 년간 자수정 안에 홀로 지내다 보면 사람이 그리웠을 거 아니오. 대화도 나누고 싶고. 아까 내가 한 말에 기분 상해하지 마시고 얼른 말씀 좀 해 보시오. 도시에 몬스터는 왜 보낸 겁니까?”
-나를 어린애 다루듯 하지 마라. 네 말은 아무런 힘이 없어서 나를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시면 관두시오. 몬스터가 온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는 걸 알아냈으니 우린 대충 궁금증이 풀렸소. 여기 있는 마법서나 챙겨서 돌아가지 뭐. 도현, 리타, 물건 챙기자. 자수정은 돌다리 밑에 흐르는 계곡물에 던져 버리자고. 물속에서 물고기나 원 없이 구경하라지.”
짐브리오는 과격한 말을 거르지 않고 뱉어 냈다. 분위기를 보니 자수정 속 고대 마법사의 영혼은 별다른 힘이 없는 것 같았다. 구태여 조심해서 상대할 게 아니라 적절히 자극을 주며 상대하는 게 더 효과적일 듯싶었다.
-넌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박하고 덩칫값 못하는 녀석 같으니. 같잖은 짓으로 날 위협하려고 하다니.
“무슨 소리요 그게? 어두운 서랍 속보다는 밤과 낮에 따라 변하는 물속이 좋지 않소? 물고기 구경도 하고. 난 호의를 베푸는 거란 말이오.”
-네놈 속셈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왜 고대 일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냐. 내가 몬스터를 도시에 보낸 이유가 너희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게 다 이유가 있으니 물어보는 게 아닙니까?”
짐브리오는 고개를 숙여 자수정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물속에 던진다는 말은 사과하리다. 대신 우리가 궁금해하는 고대의 일에 관해 정보를 좀 주시오. 당신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소?”
-음…….
“몬스터들을 왜 도시에 보낸 거요?”
한동안 침묵하던 고대 마법사의 영혼이 천천히 말했다.
-도시에 있는 왕궁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왕과 원한이 있었소?”
-그렇다고 해 두지.
“한데 몬스터들은 왜 그 모양으로 땅속에 파묻혀 있던 거요? 도시의 멸망을 함께 겪은 것 같은데.”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던 얼음산이 평지가 될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얼음산 지하에 존재하던 지독한 한기가 순식간에 도시를 덮쳤지.
도현은 전설로 내려오던 얼음산 이야기가 언급되자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어 죽어 갔다. 하늘에선 흙비가 내렸지. 땅도 흔들렸다. 견고했던 도시의 집과 시설들, 왕궁의 화려했던 건축물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긴 역사를 가진 도시 왕국은 차가움과 비명 속에 사라져 갔다. 그 속에서 작은 존재들인 몬스터들이라고 무사할 수는 없었지. 그런데 일부가 살아 있었던 모양이야. 겨울잠을 자는 짐승들처럼 땅속에서 살아남은 거지.
고대 도시가 멸망하는 생생한 이야기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책상 위 지도에 시선이 갔다.
번성했던 도시 왕국이 자연재해로 인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당신도 그 현장에 있었습니까?”
도현이 물었다.
-있었다. 모든 마법을 동원해 무너지고 얼어붙은 도시를 간신히 탈출했지. 그러나 죽을 자리만 바뀌었을 뿐,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훑고 지나간 한기의 영향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거참 안됐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누가 들어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을 툭 뱉어 낸 짐브리오는 턱을 매만지며 은근한 어조로 질문했다.
“근데 말이오. 고대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만 병의 병사들이 집단으로 죽어 있던데, 그걸 두고 여러 말들이 많소.”
-무슨 뜻이냐?
“씨드를 두고 왕들끼리 싸웠다나 뭐라나. 혹, 아는 게 있소?”
-씨드?
“그렇소, 씨드.”
-잘못 알고 있군. 그건 왕좌를 두고 왕실의 형제들이 벌인 골육상쟁이다. 내가 그 틈을 이용해 몬스터를 데리고 왕궁을 공격했던 것이고. 그들의 죽음은 씨드와는 관련이 없다. 그들 역시 얼음산의 영향으로 얼어서 최후를 맞이했을 뿐.
과거의 인물이 직접 설명하는 일이니만큼 그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었다.
도현과 짐브리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얼음산과 수만 명의 병사들의 죽음이 씨드 때문이라는 가정하에 인근에 위치한 고대 도시에 그렇게 몰두를 했던 것인데, 들어 보니 정작 그것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도시 왕궁엔 씨드가 정말 없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짐브리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씨드가 있었다면 골육상쟁을 벌이던 왕실의 녀석들이 벌써 복용했겠지. 씨드는 왕궁에 없다.
“빌어먹을!”
로나를 위해 씨드를 구하려고 했던 짐브리오는 실망을 하며 발로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가 박살이 나며 벽에 처박혔다.
-그건 내가 직접 잘라서 못질을 하고 다듬은 의자다.
불쾌함이 가득한 눈동자의 목소리에 도현은 짐브리오를 대신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씨드가 없다는 얘기에 도현도 실망을 했지만 고대 마법사의 영혼이 아니었다면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감정을 절제하고 정중히 사과를 했다.
의자를 걷어차며 씩씩대던 짐브리오가 길게 숨을 토해 내며 돌아섰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왜 얼음산과 수만 명의 병사들이 싸운 이야기가 씨드와 관련이 있다고 전설처럼 우리에게 내려온 거요?”
-그걸 내게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냐? 난 여기서 벗어난 적이 없다. 너희들의 역사는 너희들이 더 잘 알겠지. 아무튼 그날의 싸움은 왕실의 골육상쟁이었고 도시 왕국의 멸망은 얼음산의 영향 때문이었다. 네가 주장하는 씨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요만큼이라도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은 없소? 당신이 모르는 왕실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소.”
짐브리오가 손톱을 보이며 재차 물었다.
-없다. 왕실이 두 쪽이 나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고대 마법사의 생각은 확고해 보였다.
“젠장, 도현이 네가 그렇게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싸워서 고대 왕궁의 권리를 얻었는데, 씨드가 없다니.”
짐브리오는 조용히 서 있는 도현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이 무엇 때문에 검을 들고 앞장서서 싸웠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씨드에 대한 욕심보다는 로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고대 왕궁의 발굴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도록 하지요. 씨드의 단서라도 나올지 모르잖습니까.”
도현의 차분한 반응에 끓어오르던 짐브리오의 거친 감정이 점차 식어 갔다.
“도현의 말이 맞아. 힘내자고 짐브리오.”
짐브리오와 티격태격하던 리타가 의젓하게 말했다.
-씨드는 왜 찾는 것이냐? 그것은 구하고 싶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고대 마법사의 물음에 리타가 나서서 대답했다.
“우리 동료 중에 저주받은 피를 가진 사람이 있어요. 젊은 여자인데, 그녀 조상들 중 여자들은 대대로 단명을 했대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때문이라던데, 씨드를 복용하면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고대 도시에 찾아온 거예요. 씨드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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