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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80화 (280/575)

[280] 디 임팩트 12권 5화

-씨드를 약으로 보고 찾는 자들이 있다니. 그건 평범한 인간을 영웅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위대한 것이다. 선택받은 자들이 아니고서는 구하기 어렵다.

약간은 비웃는 듯한 말투에 짐브리오가 인상을 썼다.

“선택받은 자들이 따로 있나, 찾아서 먹으면 그게 선택받은 자지. 말 나온 김에 물읍시다. 여기 리타가 설명했다시피 내 동료 중에 그런 여자가 있는데, 고대에는 그런 여자가 없었소? 대대로 여자들만 단명한 집안 말이오.”

-찾아보면 왜 없겠느냐? 다만 그들을 내가 알지 못할 뿐이지. 치료 방법을 묻는 거라면 포기해라, 나 역시 마법 외에는 아는 게 많지 않다.

“기대도 안 했소.”

-그놈의 주둥이를 마법으로 없애 버리고 싶구나. 너는 내가 육신이 있는 상태에서 만났어야 했다. 감히 내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도록 만들었을 테니까.

“그래도 고마운 줄 아시오. 나라도 되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신과 이야기하기를 꺼렸을 거요. 잔뜩 경계만 하면서 말이요. 누가 봐도 당신은 거북스러운 존재 아니오?”

짐브리오는 허리를 굽혀 고대 마법사의 해골을 안아 들었다.

“어쨌든 과거 일을 알려 줘서 고맙소. 이 유해는 내가 땅에 묻어 줄 수도 있고, 아니면 태워서 숲에 뿌려 줄 수도 있소. 어느 걸 원하시오?”

짐브리오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고대 마법사의 영혼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장례식을 치러 주겠단 말이냐?

“그렇소. 내가 비록 도둑놈이지만 은혜는 아는 사람이오. 당신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돌려줘야겠지. 안 그런가, 도현?”

“물론입니다.”

도현은 대답을 하며 자수정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영혼이 죽지 않은 고대 마법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어쩌면 불쾌해할 수도 있었다.

한참 만에 눈동자가 움직이며 말문을 열었다.

-버릇없는 덩치 큰 녀석이 그래도 한 가닥 깊은 마음은 있군. 태워서 숲에 뿌려 다오.

“알겠소. 있다 다시 오겠소.”

짐브리오와 도현, 리타가 서재를 나가려는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자수정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세상은 어떠한가? 여전히 해와 달이 뜨고 숲은 아름다운가?

뒤돌아선 도현이 책상 앞으로 다가와 자수정의 눈을 내려다봤다.

“밖이 궁금하다면 같이 가시죠.”

고대 마법사는 수천 년 만에 밖으로 나와 세상을 눈동자 속에 담았다. 노을이 진 하늘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고, 숲은 오래전 그날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협곡 위의 숲은 수천 년이라는 시간을 그냥 벗어난 듯 변함이 없었다.

노을 진 하늘이 어두워지며 별이 보였다.

그 또한 보기 좋아서 고대 마법사는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도현과 짐브리오는 자른 나무들로 제단을 만들며 키 높이만큼 쌓았다.

제단 하단에는 기름 성분이 있는 끈적끈적한 나무 진액들이 잔뜩 묻혀 있었다. 숲에서 구한 것으로, 일단 불이 붙으면 놀랄 만한 화력을 가지고 제단의 나무들을 용광로처럼 뜨겁게 태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골을 상단에 올려놓은 그들은 가까이서 지켜보는 리타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고대 마법사의 영혼이 깃든 자수정이 놓여 있었다.

별을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스르륵 아래로 내려와 다가온 도현과 짐브리오를 쳐다봤다.

“다 준비됐소.”

-태우게.

“지켜보는 게 별로 유쾌하지 않을 텐데.”

-괜찮으니까 해.

“정 그렇다면 알겠소.”

한쪽에 준비해 놓은 불을 이용해 도현과 짐브리오는 동시에 제단 양쪽에서 불을 붙였다.

숲 공터에 쌓아 놓은 제단의 나무들이 빠르게 타올라 그 불길이 제단 위의 해골을 감쌌다. 불길이 워낙 세서 근처에 서 있던 도현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저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도현은 리타의 손에 들려 있는 자수정을 보며 기분이 묘해졌다.

지구에서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경험들을 이계에서 겪어 왔다. 몬스터도 있고, 마법도 있고. 그렇지만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채 수천 년을 살아온 존재는 이전과는 다른 충격과 놀라움이었다.

살아 있다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죽었다고 볼 수도 없는 이상야릇한 존재.

도현은 자수정의 눈동자가 불타오르는 제단을 묵묵히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고, 그 안에서 온갖 감정들이 요동치는 게 보였다.

‘자수정에 들어간 이유는 죽음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과연 살아 있는 걸까?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해골이 이제 가루가 되어 숲에 뿌려진다면, 그는 오로지 영혼만이 이 세상에 남는 것인데.’

3시간 가까이 타오른 불길이 차츰 약해져 가자 도현과 짐브리오는 조심스럽게 뼈를 모아 가루로 만들어 넓적한 나뭇잎에 담았다.

그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본 고대 마법사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 장례식을 누가 치러 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아무튼 고맙군. 집 뒤편에 있는 나무 밑을 파 보게. 술을 보관하는 장소네. 오늘 밤 그 술로 내 고마움을 전하고 싶군.

도현이 듣기에 고대 마법사의 목소리는 3층 서재에서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같은 목소리였지만 날카로움이 많이 무뎌진 그런 어투였다.

“술이 남아 있었소?”

고대의 술맛을 잊지 못하는 짐브리오와 리타의 눈이 번뜩였다.

-숲이 크게 바뀐 게 없는 걸 보니 아마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가져다 마음껏 마셔라.

땅속 술 저장고에는 밀봉이 된 술병이 약 열 개 정도 됐다. 그중 일부를 챙겨 온 일행은 늦은 저녁과 함께 술을 마셨다.

고대의 술은 향기롭고 독했다.

“두 번 다시 맛보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아주 좋군.”

짐브리오는 술을 아껴 마시려 했지만 그 맛에 취해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다.

“술이 오래돼서 맛이 좋은 건지, 아니면 술 자체가 좋은 건지 모르겠군. 어느 쪽이오?”

-좋은 술이 긴 세월을 견뎌 내 맛이 깊어진 것이겠지.

자수정 안의 고대 마법사가 답했다.

그는 나무 식탁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는 도현과 짐브리오, 리타를 지켜보고 있었다.

“늦었지만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도현이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난 마법사 락제프로 불렸다.

“락제프…… 그렇군요. 이미 아시겠지만 전 도현이라고 합니다.”

“난 짐브리오요.”

“리타예요. 괜찮으시면 고대 마법 좀 알려 주세요.”

마법을 알려 달라는 리타의 말에 락제프는 웃기만 했다.

-수천 년 전 얼음산이 터질 때는 세상의 끝이 온 것처럼 느껴졌는데, 긴 세월이 흘러 다시 인간을 만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구나.

락제프는 3층 서재에서 말하지 않았던 감정을 뒤늦게 표현했다. 그만큼 도현 일행과 거리감을 줄인 것 같았다.

“술이라도 같이 나눴으면 좋겠는데 아쉽게 됐소.”

짐브리오가 술잔을 들어 보이며 자수정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자수정 안에서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 술의 맛이 기억이 안 난다.

“험, 미안하오. 놀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 오해는 마시오. 그런데 왕실과는 무슨 원한이 있었던 거요? 몬스터를 동원해 공격했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은 걸 보면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우리 집안은 암살자 집안이었소. 실컷 부려 먹고 약속한 땅을 주지 않는 왕을 노력 끝에 암살했지. 그 대가로 집안은 박살이 났지만, 난 그런 집안의 어른들이 무척 존경스럽고 자랑스럽소. 당신도 우리와 비슷한 사정이 있어 보여서 물었던 거요.”

-암살자의 손에 왕이 죽을 만큼 지금의 왕들은 허약한 존재인가? 호위들은 무엇을 하고 있고?

“우리 집안의 어른들은 나보다 몇 배나 뛰어난 인물들이었소. 죽이는 방법과 계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 그러니 아무리 왕이라도 목을 내놔야 했던 거요.”

-궁금하구나, 너희들은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그거라면 내가 재밌게 얘기해 줄 수 있소.”

술잔의 술을 비운 짐브리오는 큰 목소리로 남부 대륙과 북부 대륙을 오가며 경험했던 각지의 영주와 왕 들의 이야기를 재치 있는 말솜씨로 설명했다. 그렇게 그는 세상이 어떤지 그 단면들을 보여 줬다.

-순 도둑질한 이야기밖에 없구나.

“도둑질하면서 돌아다녔으니까. 그래도 난 도둑이자 모험가요. 이왕이면 도둑 모험가로 불러 주시오, 험.”

짐브리오의 설명으로 대충 지금의 세계가 어떤지 파악한 락제프는 도현과 리타를 둘러봤다.

-너희들은 어쩌다 이 도둑놈과 같이 다니게 된 것이냐?

도현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는 틈에 리타가 먼저 대답을 했다.

그녀는 부모를 죽인 흑마법사 모엘의 손에 이끌려 산에서 지내다 도현과 만난 이야기와 그 뒤로 짐브리오와 동료가 된 사실도 말해 주었다.

-자질이 뛰어나구나, 원수의 눈을 피해 몰래 배운 마법으로 내가 펼쳐 놓은 마법의 장막을 걷어 내다니. 시간이 지나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마법의 이해와 능력이 부족한 자는 결코 마법을 제거할 수가 없지.

“고맙습니다, 락제프.”

싱글벙글 웃으며 리타는 술을 마셨다. 그녀는 짧은 시간 동안 적지 않은 고대의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적당히 마셔라, 술주정하지 말고.”

“나 술 세거든!”

“또 헛소리한다. 금방 취할 거면서.”

짐브리오는 리타와 술을 몇 번 마셔 봤기 때문에 그녀의 주량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안 마시면 당신이 다 마실 거잖아. 이 아까운 고대 술을 말이야.”

“쪼그마한 게 술 욕심은 많아서.”

눈을 흘기는 리타의 시선을 슬며시 피한 짐브리오는 도현을 쳐다봤다. 도현이 자수정을 보며 이야기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전 짐브리오와 우연히 싸움터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게 됐죠.”

간단한 말로 끝냈지만 락제프는 도현에게 관심이 깊은지 눈동자의 초점을 도현의 얼굴에만 맞췄다.

그 시선을 받아 내며 도현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락제프, 혼돈의 마나를 알고 있습니까?”

-혼돈의 마나라…… 알고 있다. 그것을 흡수해 힘을 키우는 자들은 특별한 제약이 생기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폭주를 한다든가 하는. 네가 익혔느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가 살던 시절에도 혼돈의 마나를 익히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 위험성 때문에. 그런데 그 수련법이 후대에 이어졌다니, 놀랍군.

“혼돈의 마나를 익힌 고대인들은 이계의 수정이란 물건을 통해 어둠의 기운을 뽑아냈다고 들었습니다. 폭주를 막기 위해서요. 맞습니까?”

도현은 스므차 성주에게 얻은 정보를 확인해 보기 위해 물었다.

-사실이다. 네 표정을 보니 넌 이계의 수정을 구하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혹시 고대 도시 어딘가에 그것이 존재합니까? 왕궁이나 또 다른 곳에 말입니다.”

술을 마시며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짐브리오와 리타가 락제프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다.

잠시 말이 없던 락제프가 눈동자를 움직이며 천천히 답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난 이계의 수정에 별 관심이 없어서. 하지만 한 가지만은 말해 줄 수가 있다. 내가 살던 시절에도 이계의 수정은 구하기 대단히 어려운 물건이었다. 그런 이유로 혼돈의 마나를 익힌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왕궁이라면 하나 정도는 보관되어 있을 수 있지 않겠소?”

짐브리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왕궁을 발굴한다고 했더냐? 찾아봐라, 있는지.

이계의 수정이 없을 거라는 것에 더 무게를 둔 회의적인 말투였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네. 씨드도 없고, 이계의 수정도 없고, 참나.”

짐브리오는 술잔을 들고서 도현을 응시했다.

“자 자, 술이나 마시자. 술맛은 달콤하지만 기분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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