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디 임팩트 12권 6화
술잔을 부딪친 셋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락제프가 돌연 놀라운 말을 꺼냈다.
-왕궁엔 씨드가 없지만 씨드가 있는 곳을 내가 알고 있다.
“푸훗!”
술을 뿜어낸 짐브리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라고 했소? 씨드가 있는 곳을 안다고?”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수정을 바라봤다. 도현만이 냉정함을 유지하며 술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그 역시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말해 주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을 해야겠다.
“말씀해 보십시오.”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난 책상 서랍 어둠 속에서 부활을 꿈꾸며 견뎌 왔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 이제는 영원한 소멸이 한없이 그립다. 자수정에 갇힌 내 영혼을 없애 주길 바란다.
뜻밖의 요구에 도현과 짐브리오, 리타는 침묵했다.
-난 애초부터 죽음을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태운 내 육신의 마지막 조각인 뼈들이 잘게 부서질 때 나는 그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난…… 과거 속에 이미 사라져야 했다.
고대 마법사의 영혼이 자수정 안에서 느꼈을 깊은 고독과 허무가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적막감이 실내에 가득 찼다.
“잘 생각했소. 화끈하게 죽으시오. 구질구질하게 이렇게 살 필요 없지.”
짐브리오가 말을 하고는 탁자 위의 술을 단숨에 비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얼굴도 편치는 않았다. 그는 장례를 치러 줬다고 술까지 대접하는 고대인의 영혼을 무덤덤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이 그게 좋다면 그렇게 해 주는 게 또 사나이다운 일이다.
“걱정 마시오. 씨드 이야기를 해 주면 내가 도끼로 자수정을 시원하게 박살 내 줄 테니까.”
-덩치 큰 녀석아, 그런 방법으로는 날 소멸시킬 수가 없다.
“자수정을 파괴시키면 되는 게 아니었소?”
-자수정이 파괴되면 내 영혼은 가까운 물체로 이동해 스며들 것이다. 또 다른 시작일 뿐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현이 차분한 눈빛으로 물었다.
-마법이다.
자수정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도현의 맞은편에 서 있는 리타를 응시했다.
-꼬마야, 네가 마법을 이용해 날 소멸시켜 줘야겠다.
리타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제가요?”
-그래.
“하지만 그런 마법은 모르는데.”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내가 알려 주면 되니까. 해 주겠느냐?
리타는 도현과 짐브리오를 한 번씩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 안에 있는 게 힘들면 없애 줄게요.”
-좋다. 이제 씨드가 있는 곳에 대해 말해 주지.
일행의 시선이 모두 자수정의 눈동자로 향했다.
-이곳에서 북쪽을 향해 가다 보면 망각의 숲이라 불리는 거대한 숲이 나타난다. 망각의 숲은 보통 사람들은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위험한 곳이다. 거대한 그 숲엔 검은 악령들이 돌아다니며 숲에 들어온 인간들을 환각 상태에 빠뜨려 숲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수정 속 눈동자는 세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살던 시간으로부터 천 년 전, 위대한 마법사이자 탐험가였던 론은 악마에 땅이라 불리던 망각의 숲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악령들의 위협은 별로 대단치 않았거든. 한동안 조사를 하던 론은 숲 중앙에서 항상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있는 커다란 호수와 거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섬을 발견했다
“거인요?”
리타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말을 끊지 마라.
리타는 입술을 삐죽이며 술잔을 입에 댔다.
-론은 섬 곳곳에 있던 거인들의 유적을 살피다 빛나는 나무를 발견했다. 바로 씨드가 열리는…….
“씨드가 나무에서 열린단 말이오?”
짐브리오가 깜짝 놀라며 외치듯 물었지만, 락제프는 무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론은 씨드를 취하고 한동안 그곳에서 머물다 거인의 섬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그곳을 비울 순 없었다. 혹시나 씨드 나무가 파괴되거나 심성이 사악한 자가 후대에 이곳을 발견해 씨드를 복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나무라도 뽑아 가지고 갔나요?”
술기운이 오른 리타가 장난치듯 말했다.
-그는 마법으로 죽은 거인들을 부활시켰다.
“거인들을 부활시켜요?”
리타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론은 씨드를 복용하기 전에도 대단한 마법사였지만 씨드를 복용한 후에는 그 능력이 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부활한 거인들은 영혼이 없는 존재들이었지만 씨드 나무를 지키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보호막을 펼쳐 놨다. 씨드 나무 주변에 결계를 쳐 놓은 것이지. 거인들을 통과해도 마법의 결계는 침입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위대한 마법사가 쳐 놓은 두 가지 방어막은 그로부터 천 년이 넘게 흘러도 깨어지지 않았다. 내가 영혼이 되기 전까지도 말이다. 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락제프는 말을 잠시 멈춘 후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봤다.
-너희가 원하는 씨드는 바로 그런 곳에 존재한다. 소문을 듣고 찾아간 수많은 강자들이 안개 호수 안 거인의 섬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갔다. 천 년간 그래 왔으니 죽은 이들이 제법 될 것이다.
락제프의 긴 설명이 끝났다.
원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내의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고대 강자들도 어쩌지 못한 그곳에 씨드가 있다니, 절로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천 년이 지났는데, 거인의 섬이 지금도 그대롤까요?”
리타가 물었다.
-가 보면 알겠지.
“당신은 두 눈으로 그곳을 직접 봤소?”
짐브리오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나도 씨드 욕심에 다녀온 적이 있다. 거인을 상대하다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살아 돌아왔었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도현이 손을 뻗어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고대의 술로 속을 뜨겁게 만든 도현이 천천히 말했다.
“거인을 물리쳐도 마법의 결계가 남는데, 그건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도현은 거인의 문제는 일단 건너뛰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어떤 판단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속을 달구는 고대의 술처럼 호승심이 타오를 뿐이다.
-씨드 나무를 감싼 마법의 결계를 풀기 위해선 결계를 친 론의 지팡이가 필요하다.
“지팡이요?”
-그렇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따 ‘론의 지팡이’라고 부르지.
“그럼, 론의 지팡이가 없다면 거인을 통과해도 소용없는 겁니까?”
-그건 너의 판단에 맡기겠다. 수많은 강자들이 거인의 섬에 도전한 이유는, 거인이나 마법의 결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깰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자수정의 눈동자는 눈빛이 깊은 도현을 한동안 응시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과거의 강자들보다 훨씬 좋은 입장이다.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적어도 론의 지팡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내가 알고 있으니까.
짐브리오가 탁자 모서리에 놓인 자수정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이오? 그게 어디요?”
-너희들이 지금 발굴한다는 도시에 있다.
“왕궁 말이오?”
-천만에, 신전의 지하 보관소다.
짐브리오는 잽싸게 3층의 서재에 다녀왔다. 그의 손에는 리타가 발견한 고대 도시의 지도가 들려 있었다.
술잔과 술병을 한쪽으로 치운 그는 커다란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신전이……. 오, 여기에 있군.”
지도의 한쪽을 가리킨 짐브리오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 맞소?”
-그래, 그곳을 발굴하다 보면 론의 지팡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현은 지도에 표시된 신전의 위치를 보며 턱을 매만졌다.
“짐브리오, 이곳은 아직 발굴이 안 된 곳 아닙니까?”
“맞아, 고대 도시 외곽에 있는 곳인데, 팔리지 않은 땅 중 한 곳이지. 돌아가서 돈을 구해 이 땅을 브링틱 원로들에게서 사자. 일단 론의 지팡이를 구해 놓고, 거인들을 상대해 보자고.”
-거인은 쉽게 볼 존재들이 아니다. 운으로 통과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걱정 마시오. 무슨 수를 쓰든 씨드를 차지할 거니까. 그리고 정말 고맙소. 당신이 아니면 이런 정보를 어디서 구했겠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너희를 죽음으로 내모는 정보일 수도 있으니까.
“거인의 섬은 어떻게 찾아가야 합니까?”
탁자 위의 지도를 말아 한쪽에 놓은 도현이 물었다.
락제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수천 년이나 흘러, 가는 길이 사라지거나 중간에 지형이 변화했을 수도 있지만, 그 점을 고려해 락제프는 특징이 될 만한 거대한 산과 강, 별자리를 통해 찾아가는 법 등을 알려 주었다.
과거엔 협곡의 정상인 이곳에서 대충 열흘 정도 되는 거리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른다.
거인의 섬을 찾아가는 방법을 다 들은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듣고 보니 갑자기 고대 몬스터를 쫓다 중간에 마주친 얼음탑 마법사들이 떠오른 것이다.
‘설마 그들이 거인의 섬을 찾아가는 길이었을까?’
수십여 명의 마법사들이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했는데, 어쩌면 거인의 섬을 찾아가던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수천 년 전에는 락제프의 말처럼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거인들도 마법의 결계도 약화되어 있을 수 있었다. 마치 락제프가 서재를 숨기기 위해 펼쳐 놓았던 마법의 장막이 긴 세월에 스스로 약해진 것처럼.
“왜 그래?”
심상치 않은 도현의 표정에 짐브리오가 물었다.
“얼음탑 마법사들이 걸려서요.”
“그놈들이 왜?”
“그들이 향하던 곳이 거인의 섬이 아닌지 의심이 들어서요.”
“설마.”
짐브리오는 손사래를 쳤다. 자신들도 락제프를 통해 지금 알게 된 사실인데 그들이 무슨 수로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짐브리오는 도현의 의심이 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닐 거야. 신경 쓰지 마.”
도현은 고개를 돌려 자수정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거인의 섬 이야기가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다. 나만 아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다만, 론의 지팡이가 신전의 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은 신전의 대사제와 나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내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너희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거인의 섬 이야기는 얼마든지 기록으로 남아서 이 시대까지 전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짐브리오는 미간을 좁혔다.
“젠장, 가능성이 있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거인의 섬을 가야만 한다.
“얼음탑 녀석들이 거인의 섬을 찾아갔다면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닌데.”
“내일 제가 거인의 섬을 다녀오겠습니다.”
“같이 갈까?”
“아닙니다. 빠르게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짐브리오는 동행하고 싶었지만 도현에게 짐이 될까 봐 별말 하지 않았다.
“같이 가자.”
술이 오른 리타가 도현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넌 소멸 마법을 배워야 해. 어려운 마법이기 때문에 며칠을 집중해야 한다.
“에이, 알았다고요.”
리타는 휘청거리다가 탁자에 머리를 처박고 잠이 들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술에 취해 잠이 든 리타를 보며 혀를 찬 짐브리오가 도현에게 말했다.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라.”
다음 날 이른 새벽, 도현은 고대의 술 한 병을 가방에 챙겨 길을 떠났다.
‘얼음탑 마법사들을 숲에서 목격한 지 상당히 오래됐어. 이 정도 시간이면 벌써 거인의 섬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거야. 서두르자.’
얼음탑 마법사들이 거인의 섬을 찾아갔다고 의심하는 게 괜한 기우인지 아닌지는 도착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공을 끌어 올린 도현은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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