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디 임팩트 12권 9화
“그 어린 흑마법사 소녀 말일세. 강력한 마물을 소환하는 재주를 보면, 흑마법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거야. 자네는 그것이 궁금했겠지. 아닌가?”
“흑마법을 동경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비교를 통해 마법의 발전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랬겠지. 자넨 차기 탑주로 거론될 만큼 마법에 대한 열의가 높은 사람이니까.”
드비오는 품에서 술병을 꺼냈다. 잔이 없었지만 괜찮았다. 잔이야 만들면 됐기 때문이다.
주문을 외우자 그의 손에 하얗게 서리가 끼었고, 잠시 후 작은 얼음 술잔이 만들어졌다.
“모양이 그럴싸하군.”
얼음 술잔 두 개를 완성한 드비오는 그곳에 술을 따른 후 잔 하나를 카샨에게 건넸다.
“이 술로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그 껄끄러웠던 사건을 잊기로 하세.”
카샨은 술잔을 건네는 드비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얼음 술잔을 받아 들었다.
조금 전에 미안하다고 말한 것은 진짜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드비오와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게 신경 쓰여서였다. 그런데 이렇게 쉽사리 화해주를 마시자고 하니 그로서는 어리둥절했다.
“탐사대의 인원이 반으로 줄었군.”
술잔을 입에서 뗀 드비오가 야영지를 둘러보며 작게 말했다. 망각의 숲과 거인의 섬에서 칠십여 명 중 반 가까이 죽은 것이다.
“탑주님의 목적이 거인의 섬에 있는 씨드였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어. 차기 탑주를 뽑기 위해서 이곳으로 부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자넨 알고 있었나?”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카샨은 술잔에 시선을 두며 답했다.
술잔 속에 그날 본 거인들의 위용이 떠올랐다. 탑주는 거인의 섬에 발을 디딘 후에야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자신과 노마법사들에게 설명했다.
“고대 도시에 씨드가 있을 거라는 소문을 듣고, 난 진작 허무맹랑한 일이라고 판단을 내렸네. 전설이 만들어 낸 후대인들의 환상일 뿐이라고. 뭐 그래도 고대 도시를 발굴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영주들이 그 난리를 쳐도 그런가 보다 했지. 한데 놀랍게도 진짜가 나타났어. 복용하면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게 된 것이지.”
“씨드 간에도 등급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씨드를 복용해도 그 강함과 약함의 차이가 존재했던 것 같으니까. 하지만 거인들을 보게. 그들이 펼치는 마법을 봐. 고대 마법사 론이 복용한 씨드는 역사에 드러난 적이 없을 만큼 강력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는 저런 가공할 만한 마법을 수천 년이나 지속시킬 수는 없겠지.”
“씨드에 욕심이 나십니까?”
카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럴 리가. 탑주님이 계신데 어찌 내가 그런 마음을 품겠나? 자아, 한 잔 더 받게.”
술을 따라 준 드비오는 모닥불에 시선을 두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씨드 나무에 씨드가 한 개만 맺혀 있으란 법은 없겠지. 여러 개가 존재한다면 그중에 하나는 차기 탑주로 내정될 인물이 복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차기 탑주가 말입니까?”
“난 그리 생각을 하는데, 자넨 그렇지 않은가?”
카샨은 말을 아꼈다. 침묵하는 그에게 드비오가 넌지시 말했다.
“난 차기 탑주가 될 사람은 자네라고 보네.”
술을 입에 가져가던 카샨의 손이 멈칫했다. 차기 탑주는 지금의 탑주가 결정한다. 드비오가 함부로 말할 자리가 아니었다.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겁니까? 드비오 님도 후보 중 한 분이신데요.”
“허허, 나야 이미 탑주님 눈 밖에 나서 말일세.”
“그럴 리가요.”
“후보 다섯 명 중 샤비엔다와 자네가 제일 유력해. 샤비엔다는 우리들 중 마법이 가장 강하고, 자넨 탑주의 제자니까.”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섭섭하겠군요.”
카샨이 들고 있던 술을 비웠다.
“탑주님은 제자라고 해서 절대 봐주지 않는 분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여관에서 차기 탑주 후보 지위를 박탈하려고 했던 것을요.”
“그건 자네 생각이지. 어찌 됐든 자넨 탑주의 제자가 아닌가?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듯, 자넨 탑주님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카샨은 저만치 떨어져서 잠을 자고 있는 백발의 여마법사 샤비엔다를 응시했다. 눈가에 주름이 가득한 그녀는 과묵하지만 손을 쓸 땐 가차 없었다.
10여 년 전, 얼음탑과 시비가 붙어 다툼을 벌이던 어느 영주를 혼내 주기 위해 얼음탑주는 책임자로 샤비엔다를 보냈었다.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수백 명의 병사들을 얼려 죽이고 영주를 찾아가 얼음탑 소유의 땅에 세금을 부과한다면 자신과 같은 마법사들이 모두 찾아와 영주의 모든 것을 파괴할 거라고 경고했다.
성 밖엔 그녀를 상대하려고 했던 병사들의 시신이 언 상태로 돌처럼 굳어 있었다. 영주는 그 시신을 바라보며 결국 그의 영지에 있던 얼음탑 소유의 땅에 부과하려고 한 세금을 철회했다.
시신 중에는 영주가 아끼던 실력 좋은 마법사들도 여럿 껴있었다. 그들이 샤비엔다 한 명을 막지 못하자 영주는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때 대단했었지.’
카샨은 10여 년 전 샤비엔다와 동행했기 때문에 그날의 일을 모두 곁에서 지켜보았다.
그때만 해도 카샨은 풋내기 마법사 딱지를 떼긴 했지만 그 수준이 얼음탑의 쟁쟁한 노마법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지켜만 봤는데,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샤비엔다는 달려오는 영주의 병사들 수십여 명을 한 번에 얼려 버리고 영주 측 마법사 여러 명도 단번에 얼음 사슬로 묶어 공중에서 얼린 다음 지상에 떨어트려 즉사시켰다.
놀라운 마법 수준에 감탄을 여러 번 했는데, 이제는 그녀가 가장 강력한 탑주 후보로 그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탑주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였지만 속내는 모르는 것이다.
샤비엔다를 바라보던 카샨이 시선을 돌려 옆에 앉아 있는 드비오를 응시했다.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그가 호의적으로 돌변한 이유가 궁금했다.
“카샨, 필요하다면 난 자네가 탑주가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네.”
“이유가 뭡니까?”
“베져스와 후투, 그자들이 샤비엔다와 부쩍 가까워진 걸 아는가? 난 그자들이 싫어. 그래서 자네 편에 서고 싶을 뿐이야. 샤비엔다에게 악의는 없지만, 그녀가 탑주가 되기를 그자들이 바란다면 난 반대로 가는 수밖에.”
말을 하는 드비오의 눈가에는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차기 탑주 후보인 베져스, 후투는 거인의 섬에서 나온 이후로 샤비엔다와 붙어 다녔다. 드비오가 보기에 모종의 거래가 이뤄진 듯해 기분이 찜찜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세상일은 모르지 않은가. 씨드를 지키려는 거인과 탑주님이 싸우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지도. 물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야.”
스승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고 있지만 카샨의 표정은 변함없이 무표정했다.
은밀한 눈빛으로 말을 한 드비오는 얼음 술잔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툭 집어넣었다.
작은 얼음 술잔은 불에 녹아 빠르게 사라져 갔다.
“아무튼 우리 잘해 보세. 탑주 자리도 중요하고, 거인의 섬에 있는 씨드도 중요하지 않은가? 이제 졸음이 밀려오는 군. 난 그만 가서 자야겠네. 수고하게.”
멀어지는 드비오의 등을 응시하던 카샨은 들고 있던 얼음 술잔을 발로 밟아 깨트렸다.
“늙은이가 씨드를 탐내고 있군.”
아마도 거인의 섬을 다녀온 차기 탑주 후보 모두의 가슴에 씨드에 대한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펼쳤다. 거인의 섬이 위치한 망각의 숲으로 가는 길이 지도에 그려져 있었다. 탑주의 지시로 그가 표시해 놓은 것이다.
탑주는 고대 도시에서 마법의 결계를 풀어 줄 열쇠를 찾은 후, 거인의 섬으로 돌아가 씨드를 차지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마법의 결계를 풀어 줄 열쇠가 무엇인지는 아무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고대 왕궁이 발견된 베일 가문의 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면, 그 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했다.
‘날 정말 믿었다면 거인의 섬 얘기를 나에게까지 비밀로 하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난 당신을 스승이라 여기고 마음으로 따랐는데 말이야. 날 믿어 줄 수는 없었던 것인가?’
크샤코 가문의 차남이라는 지위를 벗어던지고 20년을 얼음탑에서 보내며 탑주를 섬겨 왔다. 그런데도 끝내 그는 다정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저 무료한 삶을 벗어던지는 방편으로써 제자를 길러 낸 게 아닌가 싶었다.
입술을 한번 씰룩인 그는 지도를 접어 품에 넣었다.
신전
“마시면 안 되는데.”
몇 병 남지 않은 고대의 술을 보며 갈등을 하던 짐브리오는 뒷짐을 지고 실내를 왔다 갔다 했다.
“모르겠다. 조금만 마시자.”
도현이 거인의 섬을 찾아간 후, 짐브리오는 될 수 있으면 고대의 술을 마시지 않으려 노력했다. 도현이 위험한 곳을 찾아갔는데, 그는 여기서 고대의 술로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 미안해서였다.
그런데 술의 유혹이 너무 거셌다.
며칠을 참다 눈이 풀린 그가 꽁꽁 막아 둔 고대의 술병 마개를 허겁지겁 열려 할 때였다.
“짐브리오.”
뒤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짐브리오의 손에서 술병이 미끄러졌다.
술병이 깨지며 사방으로 고대의 술이 튀었다. 짐브리오의 몸이 굳어졌다.
“어어, 술이…… 술이!”
그는 다급히 바닥을 흐르는 술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바닥의 먼지와 흙이 같이 입안으로 흡입됐지만 짐브리오는 개의치 않았다.
“젠장, 이 아까운 술을 다 버리다니.”
숙였던 허리를 편 짐브리오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도현이 나무 집 입구에 서 있었다.
“왔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무사히 와서.”
“왜 그걸 마셔요. 저기 술이 더 남았잖아요.”
입 주변을 닦는 짐브리오를 보며 도현이 남아 있는 고대의 술병을 가리켰다.
“아껴야지. 이제 몇 병 안 남았는데.”
말을 하는 짐브리오의 표정엔 속상함이 가득했다.
“미쳐 버리겠네. 저게 어떤 술인데. 차라리 조금만 더 참을걸.”
아쉬워하는 짐브리오를 바라보던 도현은 안쪽에 세워져 있는 고대의 술병 중 하나를 집어 술잔에 따랐다.
“드세요. 참으면 병 됩니다.”
입맛을 다시던 짐브리오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잔을 받았다.
“너 없이 마시기 미안해서 참았다가 조금 전 그 사달이 났다.”
술을 한 모금한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도현을 봤다.
“거인의 섬은 찾았냐?”
“네.”
“얼음탑 녀석들은?”
도현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한 잔 따른 후 술병의 입구를 막았다.
“저보다 먼저 왔다갔습니다.”
도현은 망각의 숲을 거쳐 거인의 섬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산만 한 거인이 마법까지 사용한다는 이야기에 짐브리오는 질린 얼굴로 남은 술을 비웠다.
고대인들도 거인들을 이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 일의 어려움을 짐작했다. 그런데 거인을 겪어 본 도현을 통해 그들의 능력을 전해 듣자, 어깨의 무거움이 몇 배나 더 증가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결계 안은 보이지 않았다고?”
“네, 푸른 막이 내부를 가리고 있어서요. 가까이 다가갔어도 마찬가지더군요.”
씨드 나무에 씨드가 어떤 형태로 몇 개나 존재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씨드가 많이 있었으면 좋겠군.”
말을 한 짐브리오는 발끝으로 깨진 술병의 잔해들을 모았다.
“어때? 정면 승부로는 거인들을 상대하기 어렵겠지?”
“아무래도요. 재생 능력이 뛰어난 불사의 거인들을 상대하기보다는 그들을 피해 결계만 열고 씨드를 얻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술을 한 모금한 도현이 신중한 얼굴로 답했다. 며칠 전 거인들과 싸우기는 했지만 그들의 힘이 어디까지인지 모두 드러난 건 아니었다.
“거인들을 피해 결계를 여는 일도 쉽지 않을 거야. 그 녀석들이 필사적으로 막을 테니까. 론의 지팡이를 구한 뒤에 모두 함께 가자. 네가 강하다고 해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리타가 마물을 소환하고, 나는 거인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대장과 로나도 데리고 가서 최대한 힘을 써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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