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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285화 (285/575)

[285] 디 임팩트 12권 10화

도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들을 상대하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어서 혼자하고 싶었지만, 거인들의 관심을 끌어 줄 누군가가 더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얼음탑 녀석들 말이야, 우리하고 악연인가 보다. 왜 자꾸 우리와 얽히는 건지.”

굵은 눈썹을 꿈틀거린 짐브리오는 부서진 술병 조각들을 손으로 모아 문밖으로 집어 던졌다.

“그 녀석들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을 거야.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 거인의 섬을 재차 방문하겠지. 어쩌면 다른 힘 있는 녀석들을 끌어모을 수도 있겠고.”

짐브리오는 말없이 서 있는 도현에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지금은 우리와 얼음탑 녀석들만 거인의 섬에 대해 알고 있지만, 소문이라는 게 어디서 어떻게 퍼질지 모르는 거거든. 그때가 되면 정말 거인들이 아니라 인간들을 상대하다 우리가 지칠 거다.”

“그 전에 론의 지팡이를 찾아서 우리가 도전을 해 봐야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야. 돌아가는 대로 론의 지팡이가 있다는 신전 지역을 우리가 사서 발굴해야 돼. 문제는 돈인데…….”

짐브리오는 도현이 거인의 섬에 다녀오는 동안 고대 도시의 신전 지역을 어떻게 구입을 해야 할까 여러모로 생각해 왔다. 땅값이 워낙 비싸서 어설프게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준비할 수도 없었다.

“도현, 고대 왕궁의 권리를 베일 가문에 다시 돌려주자.”

“고대 왕궁을 말입니까?”

도현은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쉽지만 씨드가 중요하잖아. 그 대신 거금을 반돌로에게 받아 내자. 그 돈으로 브링틱 원로들에게 신전 지역의 땅을 사는 거야.”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고대 왕궁을 발굴하려는 진정한 목적은 씨드와 이계의 수정 때문이었다. 그것들이 없다면 고대 왕궁을 애써 손아귀에 쥐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고대 왕궁에는 씨드나 이계의 수정이 아니라도 값진 물건이 꽤 많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것을 고려해서 거금을 요구해야겠지. 이계의 수정이 어쩌면 왕궁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건 달라고 단서 조항을 달아 놓고.”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왕궁의 발굴을 서두르면 어떨까 싶었는데, 발굴이 계획대로 척척 제시간에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발굴품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시간이 길게 걸릴 수도 있었다.

고대 도시에 있는 신전 지역이 아직 팔리지 않았을 때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구입하려면 여유를 부릴 수 없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그렇게 하죠. 근데 돈은 얼마나 요구하는 게 좋겠습니까?”

“음, 그건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짓자. 아무튼 거인의 섬에 다녀오느라 고생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내가 얼른 고기 구워 줄게. 아침에 잡아 온 싱싱한 사슴 고기가 있어.”

짐브리오가 나무 통 안에서 다듬어진 사슴 고기를 꺼냈다.

“리타는 위에 있습니까?”

도현이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보며 물었다.

“서재에서 락제프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어.”

“아직 소멸 마법을 다 못 배운 겁니까?”

“배우긴 했는데 리타의 수준이 아직은 낮아서 그 마법을  당장은 사용 못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락제프가 그녀의 마법을 높여 주려고 이런저런 마법 지식을 전수해 주고 있는 것 같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락제프랑 당분간 같이 있어야겠다. 리타를 여기에 남겨 두고 갈 수는 없잖아. 같이 다니다가 리타가 소멸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때, 락제프의 소원대로 그의 영혼을 자수정에서 소멸시켜 주면 되겠지.”

“그가 좋아할지 모르겠군요.”

도현이 조금 남은 술잔의 술을 비우며 말했다.

자수정에 갇혀 긴 세월을 보낸 락제프는 세상에 대한 염증과 깊은 고독감에 스스로를 놓아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원하는 건 그의 공식적인 삶이 마무리된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방법이 없잖아. 리타가 움직이면 따라서 같이 움직여야지.”

도마로 사용되는 통나무 위에 사슴 고기를 올린 짐브리오가 손도끼로 ‘쿵’ 하고 고기를 내려찍어 잘라 냈다.

도현의 예상은 적중했다. 락제프는 저녁을 먹고 있는 짐브리오에게 이곳을 떠나기 싫다고 말했다.

-난 밖으로 나가기 싫다.

“안 가면 어쩔 거요, 리타는 우리랑 같이 움직일 텐데.”

-너희는 내게 약속을 했다. 날 소멸시켜 주기로. 그것을 잊었느냐?

“아직 리타가 능력이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이오?”

-리타는 여기 두고 너희들끼리 가라.

“이런 말하기 싫지만 당신 혹시 음흉한 속셈이 있는 거 아니오?”

-무슨 뜻이냐?

“우리가 없을 때 리타를 지배해서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게 아니냔 말이오. 더 나아가서 영혼을 바꿔치기한다든가.”

-네 이놈! 감히 날 어떻게 보고!

자수정 속 눈동자가 식탁에 앉아서 사슴 고기를 뜯어 먹는 짐브리오를 죽일 듯 노려봤다.

-네놈은 덩치도 크고 머릿속은 똥밖에 차지 않는 덜떨어진 녀석이다! 내 손으로 널 찢어서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아 놨어야 하는데, 어쩌다가 내가 네놈에게 이런 아쉬운 소리를 하는 신세가 된 것인지.

“락제프, 미안해요. 흥분하지 마세요. 짐브리오는 원래 이래요. 제가 사과할게요.”

사슴의 갈비뼈를 접시에 내려놓은 리타가 식탁 끝에 있는 자수정을 보며 사과했다.

“리타, 얼마나 더 있어야 소멸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시끄러운 싸움을 지켜보던 도현이 조용히 물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어. 한 달이 걸릴 수도 있고, 아니면 1년이 걸릴 수도 있어. 락제프가 알려 준 소멸 마법은 너무 수준이 높은 고대 마법이거든. 내 마법 수준을 많이 올려야 해서.”

-내가 옆에서 도와주면 그 시간이 훨씬 단축될 것이다. 나와 같이 이곳에 머무는 게 어떠냐, 리타?

“싫은데요.”

리타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여기서 뭐 하고 살게요. 난 친구들과 같이 모험도 하고 어울려 사는 게 좋아요.”

-마법사는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 친구가 적을수록 마법이 강해지는 법이지. 즐거움을 포기하고 마법에 빠지면 너의 마법 수준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발전을 이룰 것이다.

“알레빙스 산맥에서 30년간 심심하게 지내봤거든요. 더 이상은 싫어요.”

리타가 딱 선을 그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도현이 락제프에게 말했다.

“먼저 씨드와 관련된 이야기는 고마웠습니다. 진심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영혼이 그 안에서 되도록 빨리 소멸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마 리타도 그래서 밤낮없이 당신과 붙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리타는 도현이 없는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락제프로부터 마법을 배웠다. 그 점을 락제프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소멸 마법이 그리 간단치 않은 마법이라면 리타에게도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힘드시겠지만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주십시오.”

-무엇을 말이냐?

“내일 우리와 함께 이곳을 떠나시든지 아니면 이곳에 남아 리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음.

자수정 속 눈동자가 도현의 깊은 눈동자를 한동안 응시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루한 시간이 흐른 뒤 락제프가 느리게 답했다.

-너희들을…… 따라가겠다.

리타와 짐브리오는 2층 침실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리타는 침대에서 짐브리오는 바닥에서.

도현은 홀로 1층의 식탁 앞에 앉아 밤늦은 시간까지 술을 조금씩 음미했다.

열어 둔 문밖으로는 어둠에 잠긴 숲이 보였고, 바람이 가끔씩 불어 들어왔다. 고요하고 정적이 흐르는 밤이었다.

-왜 잠을 안 자는 것이냐?

자수정에서 락제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향이 생각나서요.”

도현은 지구에 있는 홍영과 도장 식구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수인 태선군도.

-네 고향은 어디지?

“아주 먼 곳입니다, 설명하기 힘들 만큼.”

도현은 흔들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의자가 편한가?

“고대의 의자치고는 여전히 편안하군요.”

도현이 식탁 모서리에 있는 자수정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난 마법사지만 가구를 만드는 데도 조예가 깊었지. 이 집 안의 물건들은 거의 다 내 손으로 만든 것이다.

락제프가 자랑을 하듯 말했다.

“그렇군요.”

-너는 검을 다루는 것 외에 취미가 있느냐?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합니다.”

도현이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그림? 어떤 그림을 말이냐?

“만화라고 있습니다.”

-만화? 생소한 말이로군. 벽화의 일종이냐? 아니면 초상화?

“그림을 그리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 주는 것을 만화라고 합니다. 여러 그림을 연결시켜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죠.”

-이 시대에 유행하는 그림의 종류인가 보군.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화라는 단어조차 모르니까요.”

-궁금하구나. 보고 싶은데 보여 줄 수 있겠나?

“그게…….”

도현은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다. 도장 생각을 하며 밤 분위기에 취해 있다 저도 모르게 편하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싫으면 안 해도 좋다. 어차피 자수정에서 즐거움 없이 지낸 지 수천 년이나 됐으니까.

자수정에 나타난 눈동자가 서서히 작아지려고 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도현이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보여 드리죠.”

-정말이냐?

자수정의 표면에서 사라지던 눈동자가 다시 크게 나타났다. 도현은 3층 서재에서 락제프가 사용하던 필기도구와 빈 종이들을 챙겨 내려왔다.

술잔과 술병을 옆으로 옮긴 그는 식탁 위에 종이를 펼쳐 놓고 빠르게 만화를 그려 갔다.

순식간에 만화 그리는 일에 몰입한 도현은 얼마 후 완성된 만화 몇 장을 식탁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보시면 됩니다.”

도현은 자수정을 손에 들어서 그가 잘 볼 수 있게 했다.

-이건 너희들과 내가 처음 만났던 그때를 묘사한 것이로구나.

“그렇습니다.”

만화는 리타가 2층 침실에서 마법의 장막을 해체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리타가 이런 말을 했구나. 그림과 글씨가 함께 연결되니 보는 재미가 있어.

“만화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이죠.”

-그림들이 아주 생동감이 넘쳐. 행동들이 마치 살아서 뛰쳐나올 만큼 역동적이야.

“만화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과장스러운 장면이 재미를 더해 주지요.”

만화는 이제 3층의 서재실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락제프와 만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내가 이렇게 우습게 묘사돼도 되는 것이냐? 내가 아주 가벼운 늙은이처럼 보이는데?

만화 내용에 항의를 하자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재미로 보십시오.”

-안 된다. 당장 그림을 바꿔라. 대화도 바꾸고. 특히, 짐브리오 이 녀석은 얼굴을 못생기게 만들고.

도현은 만화에 너무 빠져서 언성을 높이는 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즉석에서 그림을 수정했다.

-좋아, 그래야지.

만화는 도현이 거인의 섬을 향해 떠나는 장면에서 끝이 났다.

“잘 보셨습니까? 이게 만화입니다.”

-굉장한 그림이야. 어떻게 이런 그림을 내가 살던 시절엔 만들 생각을 못 했을까? 아주 훌륭했다.

“감사합니다.”

도현은 손에 들고 있던 자수정을 식탁에 다시 올려놓은 뒤, 만화가 그려진 종이들을 정리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락제프가 조용히 말했다.

-거인의 섬에서 거인과 대화를 나눴다고?

“네. 마법도 사용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미리 알려 주셨다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텐데요.”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살아올 줄 알았으니까.

“당신도 그저 도망치듯 거인에게 쫓겨서 섬을 빠져나온 것은 아니지요?”

-바로 보았다. 나 역시 마법의 검과 방패로 무장한 거인에게 경고를 듣고 물러났지.

“그럴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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