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디 임팩트 12권 11화
도현이 흔들의자에 다시 앉아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 모습이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라.
“신전에 론의 지팡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게 된 겁니까? 신전의 대사제와 당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왜 이상하다는 것이지?
“론의 지팡이니까요. 당신과 신전의 대사제만이 알고 있다면, 부담 없이 신전으로 들어가 론의 지팡이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을 텐데요. 왜 그러지 않은 겁니까?”
도현의 물음에 락제프는 껄껄 웃었다.
-내가 그럴 인물로 보였느냐?
“씨드가 탐이 나서 거인의 섬에 다녀왔다고 지난번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연장선상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흐음. 그래, 네 말이 맞다. 충분히 그런 의구심이 들 만하지. 좋다. 재밌는 그림도 봤으니 네 궁금증을 풀어 주도록 하지.
도현은 흔들의자에서 몸을 세워 자수정을 응시했다. 락제프는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왕실의 창고에 처박혀 있던 낡은 지팡이가 있었다.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왕에게 보고를 했지. 그러자 왕은 보고를 한 사람을 죽여 입을 막았다. 그리고 병력을 이끌고 거인의 섬을 다녀왔지. 망각의 숲에서 많은 병사들을 잃고 거인의 섬에 들어간 왕은 거인의 막강한 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신히 목숨만 챙겨 돌아왔다. 그 후유증으로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연유로 인해 왕실의 형제들이 골육상쟁을 벌이게 된 것이지.
락제프는 고대 도시 왕국의 비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도현은 집중해서 그의 말을 들었다.
-그 와중에 론의 지팡이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죽은 왕의 왕비가 이 모든 게 론의 지팡이가 부른 저주라면서 신전의 대사제에게 은밀히 맡긴 것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사실을 품고 왕비는 영면에 들어갔다. 여전히 골육상쟁 중이었기에 신전의 대사제는 유일한 친구인 한 마법사에게만 그 비밀을 토해 냈지.
“그럼 그 마법사가…….”
-그렇다. 바로 나다.
자수정의 눈동자는 오래된 과거를 회상하는 듯이 아련해졌다.
-비록 그 지팡이가 탐이 났지만 친구를 배신하진 않았다. 그는 나를 믿고 비밀을 말해 주었는데 그 비밀을 이용할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강제로 론의 지팡이를 가지고 갔다면 그는 비통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런데 얼음산이 터져 한순간에 모두 다 죽을 줄이야.
“그랬었군요.”
도현은 조금은 숙연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의심할 필요 없다. 신전을 발굴해 론의 지팡이를 찾아라. 그것을 차지했다고 해서 씨드가 너희의 것이 될 거라고 자만하지는 말고. 지팡이는 어디까지나 거인들을 통과했을 때만이 빛을 발하는 물건이니까.
“말씀 감사합니다.”
-고맙다면 부탁을 하마.
“부탁요?”
술을 따르던 도현이 멈칫했다.
-아까 본 만화의 뒤 장면이 궁금하다. 그려 줄 수 있느냐?
발굴 중인 고대 도시는 넓었다. 베일 가문과 뤼호른 연합 세력 간의 큰 싸움에 묻혀서 그렇지 다양한 이유로 고대 도시에 들어와 있는 각종 세력 간에 싸움이 붙는다.
옆구리에 붕대를 감고 그 위에 가죽 갑옷을 걸친 턱이 뾰족한 사내와 다리를 절뚝이는 털보 사내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계약이 끝나 고대 도시에서 용병 시장으로 돌아가는 용병들이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 전투에서 다리가 잘릴 뻔했어. 도끼가 무릎을 스치고 지나가는데 아찔하더라고.”
털보 사내는 말을 하며 자신의 다리를 거친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이놈이 잘렸으면 내 목숨도 그 자리에서 끝이 났겠지. 아주 소중한 놈이야, 흐흐흐.”
“나보다는 낫군. 난 방벽에서 떨어져 적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에 고립되어 있었어. 떨어진 충격으로 숨만 까딱까딱하고 있었는데, 한 놈이 들고 있던 창으로 내 옆구리를 푹 쑤시더군.”
“저런! 그래서 어떻게 됐나?”
털보 사내의 질문에 턱이 뾰족한 사내는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가죽 갑옷 안쪽에 망가진 사슬 갑옷 조각들을 덧대 놨거든. 찌르던 놈은 내가 창대를 잡고 비명을 지르자,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날 거들떠도 안 보더군. 주변 녀석들도.”
턱이 뾰족한 사내는 말을 하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 호방한 표정으로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치다가 꿰맨 상처에서 고통이 밀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별 친분이 없는 털보 용병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꾹 참고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시체 더미에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놈들이 자리를 비운 틈에 잽싸게 일어나서 진영으로 돌아왔지.”
“잘했군. 역시 용병으로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머리를 굴릴 줄도 알아야 돼.”
“고맙네. 근데 자넨 어디서 계약을 맺고 일을 봐 줬는가?”
피가 조금 배어 나온 옆구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다보던 턱이 뾰족한 사내가 물었다.
사내의 물음에 털보 용병의 표정에 웃음기가 어렸다.
“자네, 내가 누군지 모르나?”
“응? 우리 원래 아는 사이였나?”
턱이 뾰족한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세히 봤지만 모르겠다.
“이러면 알 수 있겠군. 잘 보게.”
다리를 절뚝이던 털보 용병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작은 나뭇가지를 창처럼 들고선 옆구리를 찌르는 시늉을 했다. 그의 행동에 턱이 뾰족한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네, 설마?”
“내가 자넬 창으로 찔렀어. 창이 깊이 안 들어가서 ‘아, 이 자식이 꼼수를 부렸구나!’ 생각했지.”
“나와 반대편에서 일을 했군!”
“뭐 그렇지. 우리야 돈에 팔리는 신세 아닌가.”
용병 시장의 술집에서 같이 웃으며 떠들다가도 다음 날 서로 적이 되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계약이 끝나면 개인감정들은 없애 버린다. 그러지 않고는 용병 생활을 이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농담 아니지?”
“농담은. 내가 왜 이런 장난을 하겠나? 그저 우연히 만난 자네가 신기해서 말을 하는 거지.”
털보 용병의 말속에서 진정성을 엿본 턱이 뾰족한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왜 날 살려 줬나? 눈치챘으면서?”
“칼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다면 어쩔 수가 없었겠지만, 그때 상황은 그게 아니었잖은가. 내가 아량을 베풀었지. 언젠가 내게도 그런 위험이 닥치면 누군가는 날 불쌍히 여겨 살려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생긴 건 우락부락한 털보 용병이었지만 말하는 모양새가 생각이 깊어 보였다.
“나도 다음부턴 손에 사정을 둬야겠군. 아무튼 고맙네. 자네가 결국 나를 살린 거군.”
“별말씀을, 하하하!”
크게 웃던 털보 용병이 손에 든 나뭇가지를 길가에 툭 집어 던지다가 걸음을 멈췄다. 나뭇가지를 던지던 그의 눈에 한 푯말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살표를 따라오면 일곱 신의 신전이 있음.
말뚝 위의 푯말은 일견 장난스럽게 보였다.
“이런 곳에 일곱 신의 신전이 있을 리가 있나.”
턱이 뾰족한 사내가 코웃음을 치다가 옆을 돌아봤다. 털보 용병이 큰길에서 벗어나 푯말이 가리키는 작을 길을 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어디 가나?”
“신전에.”
“뭐라고? 신전? 자네 속고 있는 거라고! 그러지 말고 이리 오게. 용병 시장에 도착하면 내가 여자와 술을 사지! 내 목숨의 은인 아닌가!”
“그보다 난 일곱 신께 기도를 할 장소가 필요해.”
오른쪽 낮은 산 방향으로 가는 털보 사내를 뒤에서 지켜보던 턱이 뾰족한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곱 신의 신자인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서둘러 털보 용병의 뒤를 쫓아갔다.
산을 조금 오르자 경사가 거의 없는 제법 넓은 공터가 나왔다.
“뭐야 저게? 저게 신전이야, 거지 집이야?”
신전은 일단 웅장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경건해지고 신에 대한 외경심이 없다가도 생긴다.
그런데 눈앞에 신전은 차마 신전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초라했다.
나무로 지어진 단층 구조에 지붕만 뾰족하고 높았다. 그리고 약간 기울어져서 삐딱했다.
누가 봐도 정성들여 만든 신전이 아닌 급조한 티가 났다. 그것도 아직 완성이 안 된 신전인지 한 중년인이 신전의 지붕에 배를 걸치고서는 망치질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비웃음을 속으로 삼킨 그는 신전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털보 용병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저거 보라고. 말만 신전이지 신전답지 않잖아? 내가 비록 일곱 신의 신자는 아니지만 다른 신들의 신전들을 많이 봐 왔다고. 저건 신전이라고 볼 수가 없지.”
“내가 봐도 그렇군.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털보 용병이 실망하며 몸을 돌릴 때, 지붕을 손보던 딘이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지. 몹쓸 병이야, 병.”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이오?”
턱이 뾰족한 용병이 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기에 당신들 말고 누가 또 있는가?”
지붕의 나무가 휘어져 틈이 벌어진 곳에 나무를 덧대던 딘이 고개를 돌려 용병들을 내려다봤다.
그는 열흘 가까이 땡볕에서 쉬지도 못하고 신전을 짓느라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벽을 세우고 대충 지붕만 얹을 요량으로 신전의 일을 시작한 것인데, 그것도 쉽지 않아서 벌써 여러 날 고생을 하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공간이 갖춰진 신전 짓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딘은 예상치 못했다.
‘역시 영주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어.’
후회됐지만 이미 신전의 외관은 그의 기준으로 그럴듯하게 완성되고 있어서 포기하기도 애매했다.
“신전에 왔으면 기도를 하거나 사제를 만날 생각을 해야지, 왜 애꿎은 신전의 모습을 탓하는가?”
“신전이 신전 같지 않으니 하는 말 아니오?”
“그 기준은 무엇인가?”
지붕 위의 딘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턱이 뾰족한 사내가 말을 더듬었다.
“보통 신전이 다 그렇지 않소? 크고 웅장하고, 신의 은총이 내려질 것 같은 뭐 그런 거 말이오.”
“원래 신과 인간의 관계는 석조 건물이 가로막지 않았어. 나와 당신들처럼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 보는 사이였지. 그 사이에 껴드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신을 가까이하기가 어렵다는 걸 왜 모르는가?”
“그래서 이런 형편없는 건물을 지어 놓고 신전이라고 우기고 싶은 거요?”
턱이 뾰족한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기는 게 아니라 이건 신전일세.”
“당신 누구요? 목수요, 아니면 사제요?”
“날 만나려 온 게 아니라면 내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겠지. 신전에 들어가 보게,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딘은 몸을 돌려 망치질을 다시 시작했다. 산중에 묵직한 그의 망치질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퍼져 갔다.
두 용병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볼품없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턱이 뾰족한 용병은 원래 일곱 신의 신자가 아니었지만 호기심에 들어간 것이고, 신자인 털보 용병은 딘의 말이 그럴듯해서 마음이 바뀐 것이다.
신전의 실내는 좁았지만 천장이 높아서 그런지 답답한 면은 없었다.
일곱 신을 상징하는 여러 조각이나 장식품 들이 보이지 않는 밋밋한 실내 모습을 둘러보던 그들은 등을 보이고 기도를 하고 있는 리드만을 발견했다.
흰 수염을 기른 학자풍의 리드만은 몸을 돌려 신전으로 들어온 두 용병과 마주 했다.
“일곱 신의 종 리드만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신전에서 기도를 드린 게 오래돼서 말입니다. 용병 일을 하고 있는데 언제 죽을지도 모르겠고, 요즘 마음이 좀 불안합니다.”
털보 용병은 리드만 사제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그러시군요. 편안하게 기도를 하십시오.”
“돈을 얼마나 내야 합니까?”
신전에서 기도를 하고 헌금을 바치는 건 대륙에서 일상적인 일이었다.
“정해진 건 없습니다. 마음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헌금을 하시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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