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디 임팩트 12권 13화
락제프로부터 당시 왕궁의 규모와 형태를 전해 들은 도현은 발굴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학자들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려 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고대 왕궁의 모습을 도현이 아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의심스러운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꾼용 몬스터들.’
도현의 시선에 수십 마리의 일꾼용 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브링틱 성의 상인이 계약대로 일꾼용 몬스터들을 보내온 것이다. 그가 없었지만 반돌로가 발굴에 투입시킨 것 같았다.
발굴지에 투입된 일꾼용 몬스터는 크게 두 종류였다.
땅파기 몬스터와 무거운 돌이나 흙더미를 옮길 수 있는 짐 나르기 몬스터.
황소의 세 배 덩치를 자랑하는 땅파기 몬스터들이 논을 갈 때 사용하는 쟁기와 같은 것을 몸에 부착하고 주인의 지시에 따라 왕궁을 덮고 있는 땅을 갈아엎고 있었다.
짐 나르기 몬스터들은 그곳에서 나온 흙더미를 실은 수레를 지상으로 이어진 경사진 길을 따라 옮기거나, 땅에 노출된 무겁고 큰 바위를 어마어마한 팔 힘으로 직접 빼내기도 했다.
몬스터 없이도 가능은 하지만, 말이나 인력을 통한 것보다는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수백 명의 일꾼과 수십 마리의 일꾼용 몬스터들이 어우러진 넓은 발굴 현장을 둘러보던 도현은 찾고자 했던 사람을 발견했다.
“바쁘시군요.”
학자들과 발굴 상황에 관해 논의하고 있던 케일 경은 도현의 등장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왔는가? 안 올 줄 알았는데 나타났군.”
“여길 놔두고 그냥 사라질 수는 없지요.”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은 둘은 학자들과 떨어져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습니까?”
“조용했네. 자네가 연합 세력을 시원하게 손본 이후로, 고대 도시에 들어와 있는 세력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게 됐거든.”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발굴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일꾼용 몬스터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반돌로에게 일꾼용 몬스터들을 투입시키자고 주장한 사람이 도현이었다. 지휘와 관리도 그가 하기로 했기 때문에 도현은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기 일하는 일꾼들은 모두 베일 가문 소속의 병사들이네. 용맹한 병사들인데, 그런 그들도 발굴 첫날에는 몬스터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자 신경이 곤두서서 일을 못 하겠다고 불평을 토해 냈지.”
“지금은 아닌 것 같군요.”
“이삼일 아무 사고 없이 지나자 일꾼용 몬스터들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사그라진 것이지. 하지만 일단 사고가 나면 병사들이 동요할 걸세. 좀 더 지켜봐야겠지.”
말을 하던 케일 경은 걸음을 늦추고 발굴 현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몇 달 전 왕궁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진짜 발굴은 지금부터지. 왕궁의 잔해가 나타날 때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흙들을 모두 걷어 내고 있네. 이 속도라면 머지않아 왕궁의 잔해들과 마주칠 수 있을 걸세.”
“잘됐군요.”
도현이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 반응이 별로군. 기쁘지 않나? 자네가 원하는 고대 왕궁이 이렇게 발굴이 되고 있는데 말이야.”
“기쁩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아무래도 술이 필요하겠군. 내 방으로 가세.”
도현의 심상치 않은 말에 케일 경이 살짝 긴장을 하며 몸을 돌렸다.
“돈을 받고 고대 왕궁의 권리를 포기하겠단 말인가?”
“네.”
손에 든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도현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케일 경을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군.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건가?”
“그럴 일이 생겼습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게 돼서요.”
“내 눈이 정확하다면 자넨 돈이나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자네가 돈이 필요해 고대 왕궁의 권리를 포기 하다니, 대체 무슨 일 때문인가?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돕도록 하지.”
도현과 가까워진 케일 경이 나름 걱정을 해 던진 말이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그런 일이 아닙니다. 좋은 일 때문에 큰돈이 필요해서 그런 것뿐이지요.”
“음.”
케일 경은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도현을 바라봤다. 떠돌이 용병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 강자 중의 강자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곳은 뤼호른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없겠지. 반돌로는 아직 못 만났지?”
“네, 브링틱 성에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원하는 금액을 내게 먼저 말해 줄 수 있겠나?”
케일 경은 술잔에 술을 조금 더 따르며 물었다.
“금화 10만 개입니다.”
“반돌로가 들으면 까무러치겠군.”
케일 경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고대 왕궁에서 발굴될 보물들을 생각하면 그리 큰 금액은 아닐 겁니다.”
“나도 안다네. 하지만 그건 우리의 바람일 뿐이고, 생각보다 적을 수도 있어.”
“반대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보물들이 존재할 수도 있지요.”
도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일 경은 술을 한 모금 했다.
“아깝지 않은가? 뤼호른과 연합 세력들은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 땅을 차지하고 싶어 했어. 고대 왕궁에 씨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가능성을 믿고 말일세. 우리 역시 다르지 않아. 그런데 정말 금화 10만 개를 받고 조용히 물러나겠다는 건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현은 흔들림이 없는 눈빛으로 말을 하고는 술잔을 비웠다.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군.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조언을 하지. 금화 10만 개를 원한다면 반돌로에게 그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다네.”
“흥정을 할 여유를 두라는 말씀이군요.”
“똑똑하군. 바로 보았어.”
케일 경은 도현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반돌로는 싸움에서 이겼지만 자신의 역할이 미미하다고 걱정을 하고 있어. 대공의 눈 밖에 날 일을 걱정하는 것이지. 이럴 때에 자네가 그의 기분을 조금 좋게 해 줄 필요가 있네. 자네를 위해서라도.”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실제 원하는 금액보다 아주 크게 부풀려서 요구하게. 그것을 깎는 역할을 반돌로가 하게 만들라는 말일세. 그의 체면도 서고 나중에 대공께 보고하기도 훨씬 수월해지니까 말이야. 물론, 그러다 보면 자네도 원하는 금액을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거야.”
도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제게 조언을 하는 것처럼 들리긴 하지만, 반돌로를 위해서라는 기분도 드는군요. 반돌로와 사이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요. 왜 그를 걱정하는 겁니까?”
“내가 그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케일 경이 피식 웃었다.
“잘못 봤네. 난 그저 자네가 큰 갈등 없이 원하는 보상을 받길 원하는 것뿐이라네. 그래야 나와 자네 사이가 이대로 끈끈하게 유지될 수 있지 않겠는가? 참고로, 난 자네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직 단념하지 않았네.”
수십 기의 말들이 한밤중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베일 가문의 땅으로 들어왔다. 밤늦게 브링틱 성에서 돌아온 반돌로와 그의 호위 병사들이었다.
뤼호른 연합 세력과의 싸움은 끝났지만 혹시 모를 암습에 대비해 반돌로는 적지 않은 호위 병사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말에서 내린 반돌로는 불이 켜진 지휘소로 걸어 들어갔다. 케일 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녀오셨소?”
“지루해서 혼났습니다.”
브링틱을 다스리는 세 명의 원로 중 한 명인 베노아의 생일 연회에 다녀온 반돌로는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다가 흠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도현이 지휘소 문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생각보다 늦게 돌아왔군. 개인적인 일은 잘 마무리했나?”
“네.”
“그쪽에 앉게.”
반돌로는 의자에 앉는 도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케일 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늦은 시간까지 날 기다린 게 저 사람 때문입니까?”
“그렇소. 그가 고대 왕궁과 관련해 새로운 제안을 우리에게 했소이다.”
“새로운 제안요? 어떤 제안을?”
“직접 들어 보시오.”
반돌로의 시선이 도현에게 향했다.
“무슨 제안을 했나?”
“고대 왕궁을 반씩 나누겠다는 계약을 없던 것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반돌로가 기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싸움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그의 승리가 아닌 용병 도현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브링틱의 현장 책임자로서 수치스러운 결과였다.
게다가 고대 왕궁을 반씩 나누겠다는 계약까지 맺어서 대공을 뵐 면목도 없고, 자칫 대공의 진노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데 돌파구가 생긴 것 같았다.
“요구하는 게 있겠지?”
기뻐하던 얼굴도 잠시, 반돌로는 표정을 근엄하게 바꾸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경께서는 고대 왕궁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보고 계십니까?”
“그건 내가 대답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 발굴이 끝나기 전에는 말일세.”
“가치가 없었다면 뤼호른과 연합 세력이 생사를 걸고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았겠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고대 왕궁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금전적으로 보상을 하셨으면 합니다.”
이건 반돌로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빈손으로 물러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편하게 말해 보게. 얼마를 원하는 겐가?”
도현은 술을 마시고 있는 케일 경을 힐끔 쳐다본 뒤, 천천히 입을 뗐다.
“금화 20만 개 가치의 보상을 원합니다. 그것이 황금이든, 보석이든 상관없습니다.”
“뭐라고!”
표정이 굳어진 반돌로의 이마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
“지금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금화 20만 개라니! 발굴을 하기 위해 우리가 손해 본 병력과 시간, 금전이 얼마인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겐가!”
“제가 돕지 않았다면 이 땅의 주인이 바뀌었을 거라고 감히 말씀드려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맞습니까?”
차분한 눈빛으로 도현이 물었다.
반돌로는 얼굴만 붉힐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도현을 노려봤다.
“중간의 사정이야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전 계약을 맺고 도와 드린 겁니다. 그걸 위해 이 손에 피를 적지 않게 묻혔습니다. 제가 한 일이 적은 것입니까?”
도현의 눈동자 속에 차가운 빛이 어리자 지휘소 실내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고대 왕궁의 가치를 그나마 적게 평가해서 내린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금화 20만 개라니 과한 요구네.”
반돌로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리고 고대 왕궁의 가치는 발굴이 모두 완료되기 전까지는 섣불리 장담할 수 없어. 현장 책임자인 나는 그 점을 강조하고 싶은 걸세.”
“그럼 경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어느 정도가 적절한 것인지.”
“칼라치는 우리 싸움을 돕는 대가로 과거에 금화 2만 개를 요구했었네. 자네에겐 금화 8만 개 가치의 보상을 해 주지.”
“실망스럽군요. 칼라치와 비교해 보상금을 정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로 인해 칼라치가 떠났네. 그가 연합과의 전쟁 초기에 건재했다면 전쟁은 조기에 마무리되었을 걸세. 확대도 되지 않았고.”
도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지금 절 탓하시는 겁니까? 칼라치가 떠난 건 그의 선택입니다. 내게 싸움을 건 것도요.”
“그때 일에 아쉬움이 남아 말한 것뿐이네, 진정하게.”
속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꺼냈던 반돌로는 도현의 차가운 시선에 헛기침을 하며 한발 물러섰다.
도현도 더는 칼라치 문제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금화 15만 개로 하지요. 저로서는 많이 양보한 것입니다.”
“금화 10만 개로 하세. 그것만 해도 적은 돈이 아니지 않은가?”
“제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새로운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십시오.”
도현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반돌로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치듯 말했다.
“좋네, 금화 12만 개를 주지! 하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 되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이야. 잘 생각해 보게, 자네도 고대 왕궁의 권리를 포기하고 돈을 달라는 이유가 분명이 있지 않은가?”
한동안 말이 없던 도현은 다시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고대 왕궁을 왜 갑자기 포기하는지 그 이유는 묻지 않겠네. 내 입장에선 그저 자네의 제안이 고마울 뿐이니까. 하지만 내가 제안할 수 있는 마지막 보상금은 금화 12만 개네. 그것도 지금 당장은 다 줄 수 없고, 반만 줄 수 있어. 이곳의 재정이 그리 넉넉지 않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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