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디 임팩트 12권 14화
도현은 눈을 감고 생각하는 척을 했다.
원래 짐브리오와 얘기한 게 금화 10만 개였다. 금화 12만 개면 목표로 한 것보다 더 많다.
도현은 눈을 뜨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케일 경을 쳐다봤다. 그는 브링틱의 책임자인 반돌로가 이야기를 할 동안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반돌로도 그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있었다.
‘대충 된 것 같군.’
도현은 반돌로를 응시했다.
“알겠습니다. 금화 12만 개로 하죠.”
“좋은 선택이네.”
표정이 없던 반돌로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조금 맺혔다. 금화 20만 개를 12만 개로 줄인 것은 나름 대단한 성과였다. 추후에 대공께 할 말이 생긴 것이다. 더구나 고대 왕궁도 온전히 베일 가문의 것이 됐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고대 왕궁을 발굴하다 혹시 투명한 수정 구슬이 나온다면 제게 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인데 조건으로 내세우는 건가?”
반돌로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저 수정 구슬입니다. 필요한 데가 있어서요.”
반돌로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단, 나도 할 말이 있네. 고대 왕궁의 권리는 발굴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우리의 땅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켜질 경우에만이 유효한 것이었네. 보상금을 받아도 자네는 일정 부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
“그건 맞는 말이지.”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던 케일 경이 오래간만에 입을 열어서 반돌로의 의견에 동조했다. 도현이 있고 없고는 베일 가문의 땅을 지키는 데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곳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돕기 위해 달려오겠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군.”
“아직 안 됐습니다. 보상금을 언제 어떻게 주실지 아직 명확히 결정되지 않았으니까요.”
베일 가문 진영에는 도현이 임시로 사용하던 숙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도현이 없는 동안에도 케일 경이 사람을 시켜 청소를 꾸준히 해 방 안이 깨끗했다.
지휘소에서 반돌로와 보상금 협상을 한 도현은 방 안을 가볍게 둘러보다가 침상에 걸터앉았다.
아침이 되려면 서너 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침상에 누운 도현은 눈을 감았다.
보상금의 반은 아침에, 남은 보상금은 한 달 후에 받기로 했다. 보상금을 일부라도 받는 데 최소한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일이 잘 풀렸다.
‘이제 신전이 묻혀 있는 곳을 발굴해 론의 지팡이만 찾으면 되는 건가?’
짐브리오는 금화 3만 개 정도면 브링틱의 원로들로부터 땅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론의 지팡이를 찾아내도 마법을 사용하는 거인들을 통과 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동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선두엔 자신이 서야만 했다. 그가 무너지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눈을 감고 침상에 누워 있던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그는 좁은 방 안에서 호검술의 검식을 아주 느리게 한 동작 한 동작 정성스레 연습해 갔다. 수만 번, 수십만 번 수련 해 온 검 동작이었지만 그는 온 정신을 집중해 검과 자신을 하나로 만들어 가는 수련을 이어 갔다.
내공이 쌓일수록 그것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커진다. 내공이 그보다 낮은 무허나 태선군이 선보였던 검은, 내공이 밑바탕이 된 검이긴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검의 기품.
일대 종사의 위치에 오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검의 깊이와 철학이 은연중에 엿보였다.
그것이 매화꽃이 되고 서로를 향해 주고받았을 때, 지켜보던 도현은 가슴이 떨릴 만큼 큰 충격과 기쁨을 누렸었다.
적이었지만 그래도 감탄을 하게 만드는 검객.
도현이 넘어야 하는 자는 그런 검의 기품을 품은 일대 종사였다.
완벽한 검신일체의 경지에 오르면 태선군과 자웅을 겨룰 수 있다고 판단을 내렸지만, 자신의 검에 과연 일대 종사라 불릴 만한 기품이 서려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검을 거둔 도현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방 안은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로 인해 날카롭게 베여 있었다.
크샤코 가문의 장남 카심은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동생을 환대했다.
“카샨, 돌아왔구나.”
“잠을 깨워 미안합니다.”
“무슨 소리냐. 자, 앉아.”
잠을 자다 나오느라 옷차림이 가벼운 카심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호위에게 손짓을 했다.
“당장 음식과 술을 준비해라.”
“예!”
호위에게 지시를 내린 카심은 얼굴이 해쓱해져 있는 동생을 돌아봤다. 20년간 얼음탑에서 마법을 배우며 성정이 차갑게 변한 동생이었지만, 형인 자신에게는 거리를 두지 않고 피를 나눈 형제답게 가깝게 대해 줬다.
“탐사가 아주 고됐나 보다. 피곤해 보여. 살도 많이 빠진 것 같고.”
“괜찮습니다. 근데 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한 겁니까? 설마 내가 굶고 다닐까 봐서 그런 겁니까?”
동생의 가벼운 말에 카심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얼굴이 그 모양이냐? 마법으로 이미 우뚝 솟은 자가 말이다.”
“마법이 아무리 강해도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 보면 몸에 표가 나기 마련입니다.”
카샨은 생각 깊은 표정으로 답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동생을 한동안 바라만 보고 있던 카심이 술과 음식이 탁자에 채워지자 호위에게 지시를 내렸다.
“문을 닫고 모두 물러가 있어라. 내가 찾기 전까지는 가까이 오지 말고.”
“예!”
호위들을 물린 카심은 술잔에 술을 채워 동생에게 건넸다.
“얼음탑주는?”
“브링틱 성에 있습니다. 베져스와 후투가 마련한 저택이 있는데, 그곳으로 갔습니다.”
“섭섭하군. 가까운 곳에 우리가 있는데 한 번도 방문을 해 주지 않다니.”
브링틱 성과 크샤코 가문의 성은 먼 거리가 아니었다. 말을 타고 시간을 좀 내면 얼마든지 올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제자인 너를 아끼지 않는 것이냐?”
형의 민감한 질문에 카샨은 무표정한 얼굴로 술만 들이켰다. 대답이 없는 동생의 모습에 카심이 분노하며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쳤다.
“망할 늙은이가 우릴 무시해도 유분수지! 네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를 원로원으로 초대했었다. 탐사를 떠나기 전에 말이다. 제자인 네 얼굴을 봐서라도 초대에 응할 만도 한데, 그는 끝내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원로들에게 얼음탑주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자랑을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그 때문에 체면을 크게 구기셨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탑주는 왕이 불러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니까요.”
“내가 화가 나는 건 그의 콧대가 높아서가 아니다. 바로 너 때문이야!”
구레나룻이 턱 선을 따라 길게 난 카심이 눈에서 불을 토해 냈다.
“아버지 일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그가 정말 널 아끼지 않는다는 게 네 표정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넌 하나밖에 없는 제자인데.”
“서운해도 어쩔 수가 없지요. 그저 그에게 마법을 배운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넌 분하지도 않냐? 무려 20년이다. 얼음탑이 아닌 브링틱에 있었다면 넌 결혼도 하고 편하게 지냈을 것이다.”
“마법이 없는 삶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세상에 나가 얼음탑주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된 것만으로도 전 만족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흥분하지 마십시오.”
“빌어먹을 늙은이!”
카심은 술을 연거푸 비웠다.
“네가 차기 탑주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지겠지?”
“모르겠습니다. 두고 봐야지요.”
카샨은 차가운 눈빛으로 빈 잔에 술을 따르며 화제를 돌렸다.
“고대 왕궁을 두고 벌어진 싸움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베일 가문이 아주 강력한 용병을 구해 뤼호른과 연합 세력을 밀어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브링틱 성에 오늘 도착한 카샨은 소문을 뒤늦게 들은 상태였다.
“사실이다. 젊은 용병이라던데, 그의 검술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혼자서 죽어 가던 베일 가문을 구해 내다니, 대단한 자야.”
“음.”
카샨은 술잔을 내려다보며 턱을 매만졌다.
검술이 놀라운 용병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장면이 교차해서 떠올랐다.
하나는 성에서 죄수들을 탈옥시켜 도망간 정체불명의 검사였고, 또 하나는 숲에서 검을 날아다니게 만들어 샤비엔다의 얼음 낫에 대항한 신비로운 검사였다.
둘 모두 그에게는 인상적인 인물들이었다.
“소문을 들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죄수들을 탈옥시킨 자 말이냐? 물론, 생각이 났지. 나도 잠시 그가 아닌지 의심을 품긴 했다. 하지만 우리 전투 몬스터들을 죽이고 철갑 기마병들을 눕힌 자는 늙은 사람이 아니냐?”
당시 도현은 나이 든 사람으로 변장을 한 상태였다.
“외모야 얼마든지 변장이 가능합니다. 난 당시에도 그자의 본모습은 젊은 사내일 거라고 추측을 했으니까요.”
“그가 변장을 했다 해도 베일 가문을 돕고 있는 용병과 무관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검술 솜씨가 뛰어난 검사가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넓은 대륙이 아닌 브링틱에서 말입니다.”
“흠.”
카심은 동생의 말이 신경 쓰였다.
“카샨, 설마 고대 도시에 있는 베일 가문의 땅에 가서 그 용병을 만나 보려는 건 아니겠지?”
“생각 중입니다.”
“좋은 생각이 아니다. 설령 베일 가문의 용병과 성을 헤집어 놓고 나간 그자가 동일인이라고 해도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게 좋아. 넌 그날도 그자를 이기지 못했다. 다시 만나도 결과가 같을 수 있어.”
카심은 정신 차리라는 듯 따끔하게 지적을 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죽은 전투 몬스터와 병사 들은 아깝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바로 너다! 넌 하나뿐인 내 형제고, 가문을 발전시킬 수 있는 뛰어난 마법사다. 몇 년 후엔 지금의 탑주보다 네가 더 강해질 수도 있어. 그때 그자를 찾아내서 손을 봐도 늦지 않는다.”
“과연 그때까지 그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이지?”
카샨은 형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샨, 우린 형제다. 형제간에는 감추는 게 없어야 돼. 내 눈을 봐.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거냐.”
“어릴 때나 그런 말이 통하지 지금도 통할 것 같습니까?”
형을 보며 카샨이 피식 웃었다.
“말해 봐. 가슴속에 숨긴 말이 뭐냐? 이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온 걸 보면 단순히 탐사에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려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카샨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는 묵묵히 술을 비운 뒤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보십시오.”
동생이 건네주는 지도를 받은 카심은 탁자 위에 놓인 등 가까이 지도를 가져갔다.
은은한 불빛에 지도가 자세히 보였다.
“이건 아직 개척이 안 된 저 북쪽 깊은 곳으로 가는 길 같은데.”
천천히 지도를 살피던 카심은 망각의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다 본 후 고개를 들어 동생을 봤다.
“지도에 망각의 숲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는데, 혹시 이곳으로 탐사를 간 거냐?”
“네, 정확히는 망각의 숲 안에 있는 거인의 섬을 다녀왔습니다.”
“거인의 섬? 숲 안에 섬이 있다고?”
“망각의 숲 안에 안개가 낀 호수가 있습니다. 그 안에 섬이 있습니다.”
“거인의 섬이라…….”
카심이 지도에 다시 시선을 둘 때 카샨의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 씨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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