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290화 (290/575)

[290] 디 임팩트 12권 15화

지도를 보던 카심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카샨이 그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천천히 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카심은 흥분으로 목이 탔는지 술을 급히 마셨다.

고대 도시에 씨드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코웃음을 치며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씨드를 수호하는 거인들과 직접 싸우고 왔다. 전설의 씨드가 브링틱 북쪽의 미개척 지역에 존재하는 것이다.

“얼음탑주는 고대 도시에서 마법의 결계를 풀어 줄 열쇠를 찾으려고 합니다.”

“고대 도시에서?”

“고대 도시라고 했지만 좁혀서 말하면 베일 가문의 땅에서 발견된 고대 왕궁일 겁니다. 탑주는 고대 왕궁을 차지하겠다는 암시를 몇 차례에 걸쳐서 했거든요. 브링틱 성에 도착한 직후, 그가 고대 왕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가 말한 열쇠가 고대 왕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게 분명합니다.”

“열쇠란 게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고?”

“아무에게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자인 네게도 말이지?”

카샨은 대답 대신 술잔의 술을 비웠다.

“조만간 탑주는 고대 왕궁을 차지하기 위해 베일 가문을 공격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베일 가문에 고용된 그 용병이 탑주와 부딪치겠지요. 아마 용병은 탑주의 손 아래 죽을 겁니다. 몇 년을 기다렸다가 그자를 상대하라는 형님의 말은 그래서 틀린 겁니다. 그자는 오래 살 운명이 아니기 때문에요.”

“그랬었군.”

카심은 턱을 훑어 내리며 지도를 내려다봤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느냐. 아버지께 말씀드려 가문의 힘으로 거인의 섬을 공격할까?”

“우리 가문의 힘만으로는 거인들을 대적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럼 세 개 가문의 힘 모두 다?”

“그들을 믿을 수는 없지요. 지금은 그저 형님과 아버지만 아는 것으로 족합니다. 탑주가 건재한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되니까요.”

“그러다 탑주가 씨드를 차지하게 되면 어쩌려고? 네가 이 비밀을 내게 말한 건, 씨드를 우리가 차지하자는 뜻이 아니냐?”

“탑주 주변을 차기 탑주 후보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인의 섬을 다녀오며 탑주 자리보다는 씨드에 마음이 더 가 있습니다. 자연히 탑주와 그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벌어질 겁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에게 기회가 올 겁니다. 그때를 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카샨은 말을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암습에 능한 자들로 스무 명만 추려 브링틱 성으로 보내 주십시오. 필요할 때 사용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마. 이 지도는?”

카심이 탁자의 지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필사본입니다. 원본은 따로 있습니다.”

형에게 지도를 넘긴 카샨은 말을 몰아 다시 브링틱 성으로 향했다.

‘탑주, 날 원망하지 마시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니까.’

카샨은 말의 허리를 차며 더욱 속도를 올렸다.

햇빛은 눈부셨고 하늘엔 짙푸른 색이 가득했다. 구름 몇 조각이 떠가는데, 하늘이 너무 푸르러 구름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보였다.

‘날씨가 아주 좋군.’

고대 도시를 떠나 용병 시장으로 가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 본 도현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여러 일을 겪으며 정신없이 지냈다. 그러다 모처럼 한가롭게 길을 걸으며 맑은 하늘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도현은 품 안을 더듬었다. 길쭉한 보석 상자가 만져졌다. 무려 금화 6만 개 가치의 보석들이 그 안에 빼곡히 들어 있었다. 루비와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이었는데, 그중에는 베일 가문이 뤼호른 가문의 진영에서 전리품으로 빼앗은 보석들도 존재했다.

‘이 중에 일부는 금으로 바꿔서 돌아가자. 금화를 애타게 그리워하던 용주가 좋아할 거야.’

목표로 한 금화 10만 개보다 2만 개를 더 얻게 된 도현은 넉넉한 마음가짐이었다.

금화 10만 개면 땅을 사고 발굴을 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지불해도 상당히 많이 남을 것이다. 남은 돈은 동료들과 나눠 가지면 된다.

그러나 남은 금화 2만 개 가치의 보석은 금화로 바꿔 용주에게 ‘옛다, 먹어라.’ 하고 큰소리치며 던져 줄 생각이었다.

‘땅을 매입하고 발굴이 시작될 즘에 집에 다녀와야겠어.’

도장 식구들과 헤어진 지 얼추 20일이 넘었다.

그들이 잘 있는지 보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고 있는 주성하나 료쿄로부터 중요한 연락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 생각을 하며 길을 걷던 도현은 넓은 길 한쪽에 삐딱하게 기울어진 푯말을 우연히 발견했다.

누군가 발로 걷어찼는지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화살표를 따라오면 일곱 신의 신전이 있음.

“일곱 신의 신전?”

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푯말을 살폈다.

“이곳에 신전이 있었나?”

도현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짐작되는 오른쪽 산 방향을 응시했다.

그가 기억하기론 이 근처에 신전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한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신전이 생겼다는 말이다.

“일곱 신의 신전이라…….”

일곱 신의 신전이라는 문구를 보자 헤어진 딘과 리드만 사제가 떠올랐다.

“잘 지내실지 모르겠군.”

영주 딘은 남부 대륙으로 가서 빼앗긴 영지를 되찾아 편하게 지내겠다고 했다. 리드만 사제는 여전히 그의 곁을 따라 다닐 것 같았다.

잠시 그들을 생각을 하며 추억에 빠져 있던 도현은 피식 웃으며 푯말을 지나쳤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되돌아왔다.

“한번 가 보자. 괜찮은 곳이면 리드만 사제님을 생각하며 헌금도 하고.”

도현은 대로에서 벗어나 작은 길을 따라 걷다 앞에 나타난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얼마 되지 않아 경사가 거의 없는 평평한 곳에 지어진 볼품없는 신전이 나타났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본 도현은 문틈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신전의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누구 없습니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도현은 그래도 목소리 높여 사람을 찾았다.

조용했다.

몇 번을 더 소리친 도현은 빈 신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부는 삭막하리만치 일절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았다.

두 눈을 감은 도현은 한동안 그곳에서 명상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전을 연 사람은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도현은 몸을 돌렸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엔 금화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영주님, 여기 금화가 있는데요?”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계곡물에서 몸을 씻고 한 숨 자고 온 리드만과 딘은 신전에 있는 금화를 발견했다.

“누군가 왔다 갔나 봅니다.”

“착한 사람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 일곱 신의 축복을 많이 받고 갔을 겁니다.”

“자아, 그럼 점심 먹으러 용병 시장으로 가 볼까?”

“좋지요.”

신전을 비운 둘은 산을 내려와 용병 시장을 향해 길을 걸었다.

길을 걷던 그들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자신들을 보며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에 익은데.”

“저도 그렇습니다.”

몇 걸음 더 걸은 그들은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자네!”

딘과 리드만이 눈을 크게 떴다.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사람은 도현이었다.

“하하하, 이런 기쁜 일이 있나!”

딘이 도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었고, 리드만은 일곱 신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역시 산에 있는 신전은 두 분이 지으신 거로군요.”

“금화를 놓고 간 사람이 자네였나?”

“네.”

딘과 리드만을 보며 기뻐하던 도현은 말을 하다가 뒤를 돌아봤다. 짐브리오가 서 있었다.

그는 텅 빈 신전을 내려와 용병 시장으로 가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짐브리오를 만났다.

짐브리오는 술집에서 치료의 능력이 있는 일곱 신의 사제 얘기를 듣고는 한번 만나 봐야겠다 싶어서 신전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어베인과 로나의 부상 회복에 사제가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도중에 도현을 만났고, 도현은 치료의 능력이 있는 사제라는 말에 리드만이 떠올라 짐브리오와 함께 신전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 와중에 딘과 리드만을 만난 것이다.

“할 얘기는 많은데 일단 배가 너무 고프군. 우리 점심이나 먹으면서 얘기 나누도록 하지. 가세, 리드만.”

딘이 리드만을 데리고 앞서가자 뒤에 남은 짐브리오가 도현에게 말했다.

“저 인간 버릇없네. 제 마음대로 말 끊고 가고. 과거에 영주였으면 영주지, 지금은 거지 같은 꼴이면서.”

짐브리오는 딘과 리드만을 과거에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스므차의 지하 감옥에서 도현을 구하려고 들어갔다가 그때 같이 갇혀 있는 그들을 본 것이다. 후에 도현으로부터 그들이 영주와 사제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신전의 사람들이 저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짐브리오, 영주는 당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나를? 언제?”

“저번에 절 구하려고 스므차의 지하 감옥에 들어왔었잖아요. 그때 참 훌륭한 동료라고 칭찬을 여러 번 했습니다.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는 의리의 남자라고요.”

도현이 말을 살짝 보태긴 했지만 실제로 당시 딘은 두건을 쓰고 지하 감옥에 들어온 짐브리오와 어베인, 로나에 대해 그런 평가를 했었다. 그러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험, 사람 보는 눈은 있네.”

“가시죠. 리드만 사제님이라면 어베인과 로나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을 겁니다.”

도현과 짐브리오는 손짓을 하고 있는 리드만 사제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보석 반지

고대 도시의 땅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가 필요했다.

먼저 브링틱 성에 위치한 관청에 땅을 사겠다는 신청서를 내야 하고, 이후엔 원로들의 승인이 필요했다.

원로들의 승인이 떨어지면 그때는 약속된 대금을 지급하고 고대 도시의 땅에 대한 소유권이 주어진다.

그 과정에서 원로들과의 면담이 잡히기도 한다.

도현과 짐브리오는 신분이 그럴듯한 사람을 앞세워 땅을 사려고 했는데, 때마침 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

그게 바로 딘이었다.

브링틱 성에 들어온 딘이 도현에게 말했다.

“땅을 사려는 사람이 옷차림이 이래서는 안 되겠지? 누가 봐도 돈이 없어 보이잖은가?”

허름한 옷차림인 딘이 낡은 신발을 내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새 옷을 사야죠.”

도현은 어제 딘과 리드만을 만난 이후로 반가움에 입가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딘과 함께 땅을 사기 위해 브링틱 성으로 왔고, 리드만은 부상에서 회복 중인 어베인과 로나를 돕기 위해 짐브리오를 따라 톨리핀이 있는 산으로 갔다.

“그럼 옷을 사러 가 볼까?”

그들은 고급 상점들이 몰려 있는 브링틱 성의 상점 거리로 향했다.

“도현.”

“네.”

“거인들이 정말 산만 하던가?”

“크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가까이서 보면 마치 산이 걸어오는 것처럼 위압감이 대단하긴 하죠.”

“짐브리오 그 사람은 직접 거인의 섬에 다녀오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자기가 다녀온 것처럼 내게 말을 늘어놓더군. 재밌는 사람이야.”

“전 좀 의외였습니다, 영주님.”

도현이 한산한 거리를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말인가?”

“두 분이 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다가 갑자기 술잔을 나누며 떠들고 웃는 게 말입니다. 보기는 좋았지만요.”

“그 사람은 도둑이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더군. 나와 어딘가 통하는 면이 있어. 어울릴 만한 사람이야.”

딘은 얼마 전부터 기르기 시작한 양 갈래의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리타는 어떻습니까?”

“꼬마 흑마법사? 아니지, 나이가 꽤 많으니 꼬마라고 놀려서는 안 되겠지. 그녀도 괜찮더군. 술 취해서 내게 덤비는 것만 빼면 말이야.”

도현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던 리타를 떠올리며 낮게 웃었다.

“그런데 그 고대 마법사의 영혼 말이야…… 자수정에 있는.”

“락제프 말입니까?”

“그래, 그 사람. 정말 답답하겠어. 수천 년을 그곳에서 보내다니 말이야. 온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야.”

“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대에 죽음을 피한 결과치고는 그가 보낸 긴 세월이 가혹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니까요.”

도현은 만화를 보며 즐거워하던 자수정 속의 락제프를 생각했다.

“오래 산다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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